제자들 이름과 장점을기억하며 넉넉한 격려 거친 이도 담금질 해서수행자로 길러낸 스승 벌써 5월이다. 노동자의 날을 시작으로 어린이날, 어버이날, 그리고 스승의 날까지 이 5월은 부모님과 스승의 은혜를 기억하고 보은하는 달이다. 2011년 오월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만 2년이 지나고 있다. 총무원의 바쁜 하루는 눈 깜짝하는 순간에 지나간다. 빠른 하루의 속도만큼 2년이 그렇게 훌쩍 지나고 있다. 내가 오늘 왜 이 자리에 있는가? 이 머리 아픈 소임이 왜 하필이면 나에게 주어졌는가? 종무행정에 문외한인 내가 감히 이런 막중한 소임을 맡다니 무식이 용감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었다. 그 해 5월 북경 만월사에서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을 마치고 만 5년간의 주지 소임을 마무리 하며 후임자를 찾기
가피로 죽음 벗어난 뒤불연 맺고 찾아온 인연스포츠 불자 육성 계기 부처님과 인연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죽음에 직면하면서부터 싹텄다. 심하게 ‘이질’을 앓았다. 당시 생각보다 병이 심각해 학교에도 나가지 못했다. 부모님을 따라 병원에 다니기를 반복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당시에는 다들 ‘죽는구나’하고 생각했지만 불교를 만나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 등에 업혀 집 근처에 있는 비구님 스님 사찰에서 불공을 올렸다. 땀과 눈물이 범벅된 어머니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어머니의 정성과 부처님 가피덕분이었던지 마침내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완쾌된 뒤로 어머니는 절에서 살다시피 하셨다. 불연은 종립 보문고로, 군종병으로 이어졌으나 생업전선에 뛰어들면서 불교는 삶에서 비켜가기 시작했다.
학업조차 잇기 어려웠던고난의 시기 큰 의지처이웃종교 인연 계기도 중학교 시절 집 근처에 통도사 포교원 해남사가 있어 자주 드나들었다. 그때의 불연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부처님오신날마다 사찰을 찾는 것은 물론, 15년이 넘게 해남사 신도로도 활동하는 등 불자로 살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국회 불자의원모임인 정각회장 소임까지 맡아 불제자로서 국민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렇듯 불교와의 인연이 남다르지만 사실 한때 가톨릭 성당을 다닌 적도 있다. 바로 고등학교 시절 친구 우기영과의 인연 때문이다. 1966년 3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처음으로 고향 울산을 떠나 부산에 가게 되었다. 낯선 환경과 곳곳에서 모인 급우들을 보면서 몇 반이고 짝은 누가될까 궁금해 하고 있을 때 발표가 났다. 경남고등학교 1학년
새벽예불 거르지 않고양말 한 짝도 아꼈던청빈한 수행자의 사표 비록 마곡사 문중으로 출가하였지만 취담당 일현 큰스님은 출가 은사인 범진 스님의 스승으로, 나에게는 너무 멀고도 아득한 어른이었다. 영암 스님과 더불어 한국불교 의식의 거장으로 알려졌다지만 출가 문중인 마곡사에서는 수행이 깊고 본사 주지를 여러 차례 지내신 어렵고도 높으신 스승일 뿐이었다. 만공 스님의 맏상좌인 용음 법천 스님의 소리를 그대로 물려받은 일현 큰스님의 소리는 다시 당신의 둘째 상좌인 범진 스님에게 이어졌다. 당신의 소리 내력에 큰 자부심을 가진 범진 스님은 당연히 상좌인 내게도 범패를 가르치고자 했다. 하지만 범패소리는 예술적 자질을 타고 나야만 가능했던가보다. 회초리를 맞아가면서 배웠지만 스승의 소리를 만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했
선학원서 첫 만남 때 마음공부 강조 日 유학시절 써주신 佛자 덕에 안정 따듯한 마음이 나를 움직인 원동력 1960년 나는 언제부터였는지 원인모르는 신경쇠약 증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떤 약물로도 치료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증상은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처음으로 일러주신 분이 이두 스님(당시에는 월천 스님)이셨다. 여름방학동안 진주 응석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러면서 파계사의 성철 스님, 화엄사의 금오 스님, 서울의 청담 스님을 소개해 주셨다. 이 세 분 큰스님들은 당대의 고승이셨고 좀처럼 만나 뵙기 어려운 선지식이셨다. 그러나 이중 청담 스님에게 제일 마음이 끌렸다. 그것은 고향이 같은 진주이고 정화운동에 헌신하고 계신 청담 스님은 이미 내 가슴 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세 살 어린 나이 막연한 출가 후고된일 자청하는 스승께 인욕 배워“혜자야” 인자한 소리 지금도 생생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한 사람은 바로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게 해주신 은사 청담 큰스님이시다. 환영일까. 지금도 이른 새벽 예불을 드리기 위해 법당에 들어서면 어디선가 “혜자야!”하고 나를 부르는 인자하신 큰스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큰스님이 부처님가셨던 열반의 길에 들어선 지도 어언 42년 남짓. 그러나 단 한 번도 큰스님의 가르침을 잊어본 적이 없다. 그 가르침은 오직 ‘마음’ 하나였다. 내가 열 세 살 어린 나이로 출가하기 위해 도선사로 가서 처음 큰 스님을 뵈었을 때 만해도 그저 절에 계신 한 분의 인자하신 어른이라는 생각만 했다. 당시만 해도 누구나 그렇듯이, 경제가 매우 어려운 터
방명록에 읽은 책 적게 하셨던 분 마음으로 더 넓고 크게 보라 가르쳐 교육자로 사는 내 삶 속에 녹아있어 1970년대, 조지훈의 ‘승무’와 서정주의 ‘사소단장’, 만해 스님의 ‘알 수 없어요’에 심취했던 문학소녀였다. 절의 말, 시(詩)를 배우고 싶었다. 세종대 전신 수도여자사범대학 국문과 71학번으로 입학해 불교학생회에 입문했다. 법정 스님을 지근에서 뵐 수 있었던 인연의 싹이 튼 계기였다. 법정 스님은 수도사대 불교학생회 지도법사였다. 선배들 얘기로는 수도권에서는 유일한 사범대이고 사립대학이자 여자들만 다니던 대학에 생긴 최초의 여자 불교학생회였다. 그 불교학생회를 법정 스님이 이끌고 계셨다. 불교학생회가 나룻배를 타고 건너던 강남 봉은사로, 불음(佛音)의 향훈 가득한 다래헌으로 길을 내준 것이다.
불교공부는 이기영·서경수 두분 덕우리 불교연구가 불교학 자체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 배워 내가 불교공부를 결심하게 된 동기는 두 분의 은사 때문이었다. 이기영 교수와 서경수 교수는 서울대학을 나와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한 분들이다. 1967년 동국대학에 입학한 나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불편하였다. 2년 동안이나 공대 공부를 했던 탓도 있고, 학과의 급우들이 모두 스님들이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다. 대부분의 불교 강의는 진부하고 천편일률적이었다. 당시 이기영 교수는 불교대학의 스타였다. 우선 학벌이 우리를 압도했다. 경성제국대학 출신인데다, 1950년대에 프랑스 유학생이었다. 영어, 불어, 일본어에 능통하였을 뿐 아니라 산스크리트, 티베트어는 물론 라틴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대만 유학시절 교수님 소개로 만나 “원력 같은 불제자니 함께 살자”며 일용도구 챙겨주고 청규 일러준 분 세상을 살다 보면 잊히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좀 더 주의 깊게 마음에 새겨지고 꼭 소개하고 싶은 사람도 적지 않다. 사람은 좋을 때 만난 사람보다 어려울 때 만나 도움을 받은 사람이 언제나 기억에 생생하여 그 모습에 잠기며 더불어 하고 싶어진다. 처음 대만에 유학을 갔을 때 머무는 곳과 먹는 것, 그리고 언어의 소통이 가장 절실한 난관이었다. 대만 대북의 양명산에 위치한 문화대학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한 1980년 9월, 대장관 기숙사에 입소하여 3명이 한 방에서 기거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으나, 공양시간이 되어 식당에 가면 먹을 것이 가장 어려움을 주었다. 중국
‘대불련 수련회’에서 처음 만나불광법회 불사하며 인연 이어가‘보현행원품’의미 일깨워주기도 1969년 1월2일 나는 박성배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교수와 함께 해인사로 가고 있었다. 그 해는 눈이 많이 왔다. 대구에서 해인사까지는 멀고도 멀었다. 나는 심각한 고뇌에 빠져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가 태산 같이 앞을 막았고, 바위같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박 교수님은 며칠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돼 있었고, 나의 고민을 안 그는 성철 큰스님 밑에서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성철 스님을 뵙고 인사를 하니 총무 스님인 보성 스님(현재 송광사 방장)방에서 매일 3000배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나는 다음날부터 새벽 두시에 일어나 대적광전 옆 지장전에서 청수
고교때 남 돕는일 하며 살자 약속신부되어 강원도 산골서 노인 봉양40년 짧게 마감한 생은 자비심 가득 사람이 살다보면 한 두 사람쯤은 가슴에 박혀 지울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내 가슴에 박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10여년 전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어릴적 친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친구는 시골 읍장의 아들로 태어나 여느 아이들보다 비교적 성장환경이 좋았다. 그렇지만 교만하지 않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팔을 걷어붙이고 돕기를 마다하지 않는 모범적이고 반듯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집안이 대대로 가톨릭신자인 관계로 항상 성경을 가지고 다니며 틈만 나면 읽는 습관을 가졌다. 또 나와는 성격적으로 유사한 면이 있어 누구보다도 친하게 지냈다. 이 친구는 예수나 석가모니처럼 사는 것을 삶의
법다운 위의에 자석 끌리듯 합장금강심론 배우며 보배 꿰는법 익혀염불선·보리방편문 수행 계기도 이제 이순(耳順)을 넘긴지도 몇 해가 되었고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다. 30대 중반에 청화 큰스님을 처음 뵐 때 큰스님의 세납이 꼭 그랬다. 1985년 신록이 푸르른 봄날 아침에, 곡성 태안사 해회당 툇마루를 걸레로 닦고 계신 스님을 뵙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법다운 위의에 자석에 끌리듯 나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합장하였다. 대각을 이룬 후 첫 설법을 위해 5비구를 찾아가는 부처님과 마주친, 범지 우파카도 이런 느낌을 받아서 부처님께 질문을 던졌을까? 멀리서 오는 부처님을 보고 외면하자고 말을 맞춘 5비구가 저절로 일어나 예를 올리던 때가 이 느낌이었을까? 탁발을 위해 성중
해인사 강주 때도 직접 화장실 소제가산대사림 내생에라도 완성 발원항상 수행자 평상심으로 사셨던 분 지관 스님을 떠올리면 고고한 학과 같은 풍모를 지닌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님은 처음과 끝, 안팎이 다름이 없는 분이셨다. 나는 스님을 통해 글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수행자의 면목을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해인사에서 살 때다. 출가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은 15세 정도였으니까 무얼 알았겠나?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스님들 사시는 모습을 본받아가며 하루하루를 보낼 때였다. 하루는 새벽에 지관 큰스님께서 화장실 소제하는 모습을 보았다. 강원 학인 스님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낭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스님은 나름의 수행에 열심이셨던 것이다. 대중을 위한다는 상(相)을 떠나 승려로서 일
산골 작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밤 늦게까지 가르침 주셨던 분 오늘날 교육자 사명 되새기게 해 기원전 500년경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流轉한다(panta rhei)”고 했다. 모든 사물은 부단히 생성·변화·유전한다고 보고, 이 생성·변화를 지배하는 영원한 법칙을 로고스라고 불렀다. 고인이 된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늘 이야기한 “Everything is in the Flux(모든 것은 변화·유전한다)”라는 원리도 이러한 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연기사상도 만물이 고정불변하지 않고 생성·변화되어 성·주·괴·공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이다.사람은 누구나 성장하면서 많은 선생님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나게 된다. 훌륭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은 부
젊은 스님 고생한다 위로하고남몰래 반찬놓고 사라지던 분그 따스한 손길에 지금도 먹먹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봉화 청량산. 땅거미가 내려올 즈음 청량산 청량사 도량에는 하나둘 연등이 켜진다. 겨울 밤 고즈넉한 모습의 청량사를 보고 있으면 30여년 전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난다. 당시 청량사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청량사뿐 아니라 사하촌도 마찬가지 상황이었고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해 지금은 청량사 노보살님들의 자랑거리가 된 자식들이 아주 많다. 살기 어렵다던 시절을 한참 거슬러 올라왔음에도 봉화 산골은 여전히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고, 그 안에 청량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다. 유리보전만 우두커니 서 있는 작은 암자에 처음 소임을 맡고 내려 왔을 때 깊은 밤 촛불을 켜며 눈물을 흘렸던
90년대 중반 해운업 운영할 때 부산서 공부 장소 제공이 인연법화경 사경·신행정진 계기 돼 삶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 관계 맺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 그 만남은 때로는 큰 영향을 주고받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관과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맺은 한 스님과의 인연이 오늘날 나의 불심을 일깨우고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서울 법화정사 회주이신 도림 스님이시다. 도림 스님과의 만남은 내 평생 잊지 못할 큰 축복이자 인연으로 남아 있다. 스님께서는 1998년 제주도에 평화통일불사리탑을 봉안하시고, ‘법화경’의 공덕을 불자들에게 알리는 등 한국불교의 위상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데도 온힘을 기울이고 계신다. 나는 부산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교직생활을 한 적이 있
한겨울밤 눈이 오던 어느 날 ‘탕탕탕’ 하는 거센 소리에 눈을 떴다. 작은 눈송이들이 방 문풍지를 치면서 소리를 울리고 있던 까닭이다. 문득 일생을 올곧게 수행정진 하시어 고요 속에서도 귀가 밝으셨던 은사 스님이 떠올랐다. ‘호랑이 스님’으로 유명하신 명허 스님은 이제 돋기 시작한 새순에 죽비 소리를 보태주신 분이다. 1960년대 주석하셨던 해인사 경내에서 젊은 연인들이 다정하게 손이라도 잡고 있으면 “여기가 파고다 공원이냐”며 불호령을 치셨고, 젊은 스님이 뒷짐 지고 어슬렁거리는 것도 용서치 않으셨다. 태도만 엄하신 것이 아니라 시주물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 것을 생명으로 삼았다. 한번은 3000원을 주시면서 가야시장에 가서 털신, 비누, 바늘, 실을 사오라고 하셨다. 장을 보고 스님께 물건과 거스름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