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조 때 축성에 동원됐던 충청 출신 승군 주둔지로 창건대웅전보다 요사가 컸던 이유산성 내 사찰은 사실상 수용소병자호란 후 승번제 생겨 면천 1975년 원인 모를 화마로 소실옛 사진 토대로 복원해 놓으니 국유지라며 거액 변상금 부과 천신만고 끝 소유권 되찾아와 의승군 추모 무차회 봉행으로400여 년 아픈 역사 씻어내고평화 깃든 품 넓은 도량 발원 ▲1975년 발생한 원인모를 화마로 소실되었던 장경사는 1958년 찍은 전경 사진을 토대로 복원됐다. 아픈 역사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정갈하고 예쁜 도량이다. 남한산성(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가는 길은 젖어 있었다.
신라 경순왕 때 대경선사 창건천년 세월 지나며 퇴락한 암자로 1984년 법장 스님 주지 부임사찰 중흥 100일 기도 끝나자서쪽 하늘에 붉은 기운 가득삼선암서 서광사로 이름 바꿔유치원 건립…진신사리 봉안 상좌 도신 스님 스승 뜻 이어삼층 법당 준공 등 불사 지속 ▲ 서광사 주지 도신 스님은 전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의 상좌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만큼이나 노래에 대한 애정이 깊은 도신 스님에게 언젠가 스승이 던진 “네 노래는 무언이냐 유언이냐?”는 물음은 이생에서 반드시 풀어야할 화두다. 지난 부처님오신날에 부처님은 어디로 다시 내리셨을까. 오월의 산사는 싱그럽다. 산 위에서는 녹음이 흘러내리고, 풍경을 흔드는 바람은 어
통일신라 시대 창건 됐으나 조선 개국 이후 반대파 모여 새 세상 도모한 ‘은둔의 산’전답몰수·화재 등 부침 겪어 1854년 경허 스님 출가 인연만공·보월·금오·월산 스님근대 선풍 중흥조 법맥 이어져 주민보다 먼저 마을로 다가가는‘포근한 사찰’이 미래의 청사진 비가 내렸다. 봄비는 확실히 다르다. 세상 구석구석을 닦아낸다. 가늘어도 그 빗줄기를 타고 온갖 새 울음이 내려올 것이며, 그 울음은 온갖 새 잎들을 춤추게 할 것이다. 비가 그치면 볕은 곱고 봄날은 화사할 것이다. 의왕시 청계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내렸다. 부처님오신날 봉축 연등이 마을까지 내려와 있었다. 연등을 따라 올라갔다. 산사로 가는 길을 벚꽃
무학대사 달보고 깨달아사찰 이름 ‘간월’로 전해낙조 ‘서산3경’으로 꼽혀 1941년 만공 스님이 중창성철·원담 스님 등 수행처 선방·기도처·요사 짓고자연석으로 도량 주변 장엄암자 품에 사는 생명들에게자유 찾아주는 것도 불사 ‘최고 명승지’ 속명 대신‘최고 기도도량’ 거듭나길 ▲간월암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이다. 해가 지면 달빛은 앞 바다 도량에 고인다. 사진 제공 간월암. 천수만 북쪽에 붙어있는 간월도, 그 앞에 조그만 섬 하나가 있다. 밀물 때는 섬이었다가 썰물 때는 뭍이 되는 작은 섬에 부처를 모셨다. 섬 전체가 절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암자, 간월암(주지 정암 스님)에 갔다. ‘달을 본다(看月)
길상화 보살의 시주로정권실세 요정 대원각시민운동도량으로 변신 백석과의 사랑이야기순백의 추억으로 남아 “누구에게나 열린 도량”법정 스님 염원 받드는종교 화합·나눔 정신이살아있는 도량 만들어 ▲ 모나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그렇다고 누추하지도 않은 길상사. 쾌락과 술수, 관능과 음모가 술판 위에 질펀했던 밀실은 사자후 같은 법문과 청정한 향기가 흘러나오는 도량으로 바뀌었다. 어두웠던 예전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모처럼 포근했다. 햇살을 앞세우고 서울 성북동 길상사(주지 덕운 스님)를 찾아갔다. 육중한 집들의 위세에 눌려 길상사로 가는 사잇길은 유독 가늘다. 일주문에 걸린 포스터에 법정 스님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일제강점기 만공 스님 주석호산 스님 부임 후 중창불사매년 민주열사 천도재 봉행 대장경 전산화 출판본 소장“천년 지혜 21세기 전하는아름다운 장경도량 될 것” ▲서울 흑석동 서달산에 위치한 달마사는 남산을 마주 보고 한강을 굽어 본다. 도심사찰로서는 보기 드문 풍광을 지녔다. 달마사는 서울 동작구 서달산 중턱에 있다. 이름을 듣고 얼핏 달마대사를 떠올리겠지만 대사의 어떤 그림자도 깃들이지 않았다. 다르마(dharma)에서 비롯했으니 법과 진리를 붙들려고 했을 것이다. 1931년 유심 스님이 창건했고, 한 때 만공 큰 스님이 주석했다. 일제 강점기에 왜 이곳에 절을 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만공 스님의 상좌였던 유심 스님이
18세기 성능 스님 진국사로 창건북한산성 축성한 스님들 머물던승영사찰이나 正史엔 언급 없어 1977년부터 종후 스님이 도량 정비선원 건립·정진 마지막 불사 원력“수행 당부한 월산 스님 뜻 따를 것” ▲노적사 하늘 한쪽을 노적봉이 가득 차지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볏짚으로 산봉우리를 위장해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 가난한 전설 대신 ‘부처님의 감로가 쌓인 봉우리’라는 해석에 무게를 실어 본다. 적사는 북한산 노적봉 밑에 있다. 노적봉은 북한산의 많은 봉우리 중에서도 특히 넉넉하다. 어찌 보면 여인의 젖가슴 같고 어찌 보면 노적가리 같다. 노적봉마다에 서려있는 흔한 전설이 북한산 노적봉에도 서려있다. 즉 임
농산 스님 목정굴 기도로정조 득남 후 대대적 중창억불시대 불교중흥 발판 법안 스님 94년 주지 부임나무 한그루 베지 않고 불사자연 어우러진 친환경 도량 사찰운영위가 모든 결정신도들 절 살림에 훤하니주인 의식도 저절로 성장 ▲서울 삼각산 금선사에는 조선불교를 구한 기도정진이 스며 있다. 그리고 200년이 넘은 소나무 곁을 지나 108계단을 오르면 주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보인다. 계곡 위에 정갈한 사찰. 어디를 둘러봐도 허튼 구석이 없다. 떨군 나무들이 줄지어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초겨울산은 어느 때보다 쓸쓸하다. 녹음을 헤치며 기운차게 뻗어있던 산길은 가랑잎 하나 치우지 못한 채 이리저리 풀어져있
폐허로 변한 절 쌀 한줌도 없어형님·동생 두 비구니 스님영양실조와 싸워가며 노동 ▲ 추수 끝난 김천 대덕면 조룡 2리 봉곡사 앞의 빈 논은 누워 있었다. 그러나 불손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어서 충만했다. 길은 냇물을 따라 이어지고, 그 길을 산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도 가도 산이 따라왔다. 김천 시내를 벗어나 한 시간 쯤 달려 봉곡사(주지 성주 스님)를 찾아갔다. 김천시 대덕면 조룡 2리. 봉곡사는 마을 속에 있었다. 절 앞은 바로 논이었다. 추수가 끝난 빈 논은 누워 있었지만 결코 불손하지 않았다. 비어 있어 오히려 충만했다. 일주문 옆에서 커다란 감나무가 키 작은 인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봉곡사는 신라시대 자장대덕이
정확한 창건연대 기록 없지만 고려 때 중창되며 전설 더해져 ‘고란초 자라는 절’ 소박한 이름일본 사서에도 거론되는 수행처 ‘부여 사람들’ 정성스런 보살핌은 사라진 백제 보듬는 추억의 손길 ▲부여 부소산 고란사가 가을 빛에 묻혔다. 절벽 아래 숨어 있는 작은 도량엔 백제의 마지막, 낙화암의 전설이 서려있다. 그 아픔을 삭히려는 듯 작은 도량은 눈 앞에 굽어 흐르는 백마강을 품에 안고 있다. 비 내리는 가을, 부소산에 올랐다. 산 전체가 단풍에 불타고 있었다. 가을비는 가만가만 내렸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 백제, 그리고 가장 슬픈 땅 부여에도 계절은 피었다 스러진다. 왜 백제를 떠올리면 가슴 한쪽이 시려올까.
호암산 호압사는역성혁명 일으킨 이성계반란 다스리는 상징으로사찰 세워 ‘호랑이’ 제압근대엔 서민들 도량으로 ▲호압사는 호암산 둘레길과 맞물려 있다. 일요일이면 잠시 쉬어가려는 등산객들로, 혹은 산책 삼아 찾아 온 인근 주민들로 늘 북적인다. 정묵 스님은 사찰 문을 활짝 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포교라고 강조한다. 호암산(삼성산) 호압사(주지 정묵 스님)는 서울 금천구 유일의 전통사찰이다. 산문 앞에 ‘호암산 호압사’라 새겨진 육중한 바위가 서있다. 산문을 지나면 가파른 언덕길이다. 오르다 문득 뒤돌아보면 저 멀리 온통 아파트들이다. 그만그만한 크기에 그만그만한 색을 칠했다. 그 속에 또 그만그만한 인간들을 품고 있
옥천암은약수 나오는 곳에 마애불외국인 눈에도 진귀한 풍경이교도 만행으로 우여곡절 냇가에 하얀 부처가 있다.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서울 서대문구 홍은2동, 발 아래로 홍제천이 흐른다. 부처님 얼굴은 온화하고 근엄하며 자태는 우아하다. 5미터 높이의 부처님을 누가 언제 조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이 바위를 쪼았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고,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민씨(閔氏)가 고종의 복을 비는 치성을 드리며 불상에 분을 바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기록이 아닌 구전이다. 하얀 마애불을 모시고 있는 옥천
지리산 실상사는신라 구산선문 최초의 가람禪風 발상지나 수 차례 全燒도법 스님 ‘마음 탁발’ 계기 생명평화 운동 중심 도량으로 “우리 절은 남녘에서 가장 크고 깊은 지리산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수 만평의 논 한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이 너른 들판이 여름이면 새록새록 자라는 볏 잎으로 초록바다가 되고 실상사는 그 속에 마치 섬처럼 있습니다. 가을이면 벼가 익어 황금물결 일렁이는 그 속에 보물선 마냥 흔들리며 있습니다. 겨울이면 벼 베인 휑한 들판에 무상(無常) 모습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봄이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너른 들판 한 가운데 마치 신기루처럼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보시면 너른 들판 가운
반야산 관촉사는…울음 터뜨리며 태어난 바위38년 대역사로 미륵불 조성미간서 밝은 빛 뿜어 ‘관촉’황산벌 바라보며 중생 위로 ▲천년 세월 변함없이 한 자리를 지키고 계신 충남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 투박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의 미륵부처님은 백제와 신라의 처철했던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이 내려 보이는 언덕에서 오늘도 수많은 중생들의 소원을 묵묵히 굽어보고 계신다. 여인이 봄날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고 있었다. 갑자기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를 나는 곳을 찾아가니 아기는 보이지 않고 큰 바위가 막 땅에서 솟아올랐다. 바위가 태어나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이 기이한 광경을 마을에 내
▲비봉산 자락이 품고 있는 포란사에는 번듯한 법당도 유려한 전각도 없다. 화재로 전소된 대웅전 자리엔 온갖 야생초들이 무성히 자라고 있지만 그 속에서 정법도량 복원의 원력도 함께 자라고 있다. 충남 청양 포란사는 비봉산 자락에 앉아 있다. 늘씬한 소나무들이 열 지어 서있는 오르막길을 오르면 작은 평지가 나타난다. 하지만 경내에 들어서도 도무지 사찰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아담한 기와집 앞에 ‘큰 법당’이라고 써 붙였다. 보고 있으면 안쓰럽다. 비봉산 포란사는 원래 천태산 약수암 절집을 그대로 옮겨왔다. 약수암 일대가 광산으로 개발되자 비봉면 주민들이 부처님을 ‘알을 품는 곳’으로 모셔왔다. 주민들의 힘을 모았으
유명 창건설화·수행담 없어도 ‘청룡산 자궁 터’ 평안한 도량 남편·자식 갑자기 쓰러지고 한꺼번에 찾아든 병마·가난 벼랑 끝 심정으로 찾은 사찰서모든것 비우고 ‘여연심’ 얻어 ▲청룡산에 걸쳐있는 고산사는 경내에서 아래 풍경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오랜 세월 이어져 오면서도 큰 화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 대전·충남지사=이장권 지사장 홍성 고산사는 청룡산에 걸쳐있다. 소나무 숲속을 헤치며 가파른 길을 오르면 이윽고 길이 끊긴다. 돌계단을 오르니 기와집 세 채가 나란히 서있다. 아담하고 정갈하다. 뒤 쪽에는 나리꽃이 피어나 저희끼리 두런거리고 있다. 막 장맛비가
창건연기 ‘원홍장’ 설화는‘효녀 심청’ 이야기의 모델 빨치산 토벌 때 사찰 전소잿더미 속에서 불두 발견 “처녀 성덕이 관음 모셔오고최보살이 사라진 불두 찾아” ▲관음사 원통전에는 빨치산 토벌 때 훼손된 금동관음상의 불두가 남아 있다. 검게 그을린 상처 위로 변함없는 미소가 흐르고 있다. 불단에는 새로 조성한 관세음보살상이 봉안돼 있다. 곡성 관음사로 가는 숲길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마을은 드문드문 나타났다. 백제 고찰이 이렇게 숨어있다니, 흡사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느낌이었다. 길은 선세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5킬로미터 정도 이어졌다. 외길은 긴 하품처럼 늘어져 있었고, 유월의 뙤약볕이 등짝을 때렸다.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