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초인간적인 힘에 의해 목숨이나 상황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운명이라 한다. 원인 없이 나타나는 결과가 무엇 하나 있을까만 한 치 앞을 알 수 없기에 굳이 운명을 얘기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건 그렇지 않건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때때로 한 사람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음은 분명하다. 설잠(雪岑)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스님의 삶이 그러했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알았고, 두 살 때 시를 배웠으며, 세 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는 신동. 그의 이름은 서울에 널리 알려졌고, 다섯 살 나던 해에 세종이 직접 승정원을 시켜 김시습을 시험한 뒤 그 능력을 칭찬하고 비단까지 하사했던 불세출의 천재였다. 특히 세종은 “그 아이의 재주를 함부로 드러나게 하지 말고 지극히 정성스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27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1,893권 888책이라는 방대함과 조선시대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라 평가받는다. 그러나 때때로 조선왕조실록은 극도의 편협함에 사로잡히곤 한다. 특히 불교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세종대왕이 유언을 통해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릴 정도로 공경했던 신미(信眉, 1405?~1480?) 스님. 한글창제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훈민정음을 이용해 숱한 책을 발간한 일등공신임에도 스님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인색하기 그지없으며 그나마도 걸
사람이 나고 성장하고 늙어 죽어가듯 사상이나 종교도 흥망성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신라와 고려시대 그 화려했던 불교의 영광은 조선시대로 접어들며 옛 이야기로 전락하고 존립기반마저 뿌리 채 흔들렸다. 새 왕조의 주역들인 신진사대부들은 사상적, 제도적으로 불교를 압박해 왔다. 이에 불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불교의 권위를 찾을 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불교계마저 사분오열돼 갔다. 함허당 득통 기화(涵虛 得通 己和, 1376~1433) 스님은 이러한 혼돈의 시기를 살아갔던 고승이다. 나옹과 무학대사의 법맥을 잇는 선사임에도 각종 경전 해설서를 저술하는 한편 유가의 억불논리에 맞서 이를 논파하는 『현정론』을 펴냄으로써 불교와 유교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려 애썼다. 58년이
마지막 왕사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 대사는 조선왕조 탄생의 산파역을 담당했고 조선의 도읍이 한양이 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고승이다. 풍수와 도참으로 온갖 전설과 신비의 대상이 된 무학대사. 역사서에 따르면 그는 1327년 경남 합천군 삼기면이 고향으로 어려서부터 천재로 일컬어졌다. 네 살 때 천자문을 배웠고 다음해에 효경, 사략, 당시(唐詩) 등을 익혔다. 특히 여섯 살 때 사서를 공부했다는 대사는 그 무렵 소나무를 보고 “푸른 수염은 대장부의 기상이요, 붉은 갑옷은 장군의 몸”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대사는 18세 때 홀연 송광사로 출가해 소지선사 문하에서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사는 용문산 혜명국사 등 고승을 참방하며 공부의
인간은 역사를 규정하고 그 역사는 다시 규정된 인간을 만든다. 이는 기록된 자료와 그 평가 잣대에 의해 한 인물이 오래도록 위인이나 악인으로 존속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고려말 편조 신돈(遍照辛旽, ?~1371) 스님은 여말선초 개국공신들에 의해 작성된 『고려사』를 통해 지난 600여 년 간 요사스럽고 삿된 승려로 낙인찍혀 왔다. 고려사는 물론이고 한국사에도 유일하게 수행자가 최고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유일무이한 사례였던 까닭이다. 그러나 지난 1960년대 말을 기점으로 신돈 스님은 학자들에 의해 재평가되고 있다. 정치적 입지가 약했던 공민왕의 전격 등용에 의해 정치에 입문한 후 기득권층에 맞서 왕권강화와 민생구제를 실현하려 했던 ‘비운의 개혁가’라는 것이다. 편조 스님은 오늘날 경
보제존자 나옹 혜근(懶翁慧勤, 1320~1376) 스님은 살아서는 ‘생불’로 추앙받고 입적해서는 ‘전설’이 된 고승이다. 그 분이 남긴 시들은 여전히 대중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으며, ‘일체작법의 증명법사’로 스님이 직접 쓴 발원문과 많은 게송들은 조석으로 스님들에 의해 암송되며 계승되고 있다. 이러한 스님의 ‘신화’는 고려말 격동과 수난의 회오리에 맞서 살활자재(殺活自在)한 깨달음과 중생에 대한 지극한 자비심으로 일관되게 살았다는 데서 비롯된다. 1320년 지금의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머니가 참외를 먹고 임신했다는 얘기도 있고, 또 세금의 수탈에 못 이겨 아버지가 집을 떠난 가운데 어머니가 관리한테 끌려가던 중 그를 낳자 까치들이 보호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미 7세에 서역의 고승 지공
시대의 폐단 혁신해불법 중흥하려 한 것이선교통합의 이유 부모님, 도반, 임금이름없는 들풀까지 은혜 갚아야할 대상 한국불교사에서 한 획을 그었던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스님은 경기도 양평이 고향으로 13세 때 회암사 광지선사에게로 출가했다. 9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종풍에 따라 스님은 선가의 가풍에 자연스레 젖어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참구했으며, 교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26세 때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교학의 한계를 깨닫고 궁극적인 깨침에 이르고자 모든 반연을 끊고 화두에만 전념했다. 죽음을 넘나드는 치열함으로 정진하던 33세 때 용맹정진 7일만에 1차 깨달음을 경험하고, 이어 37세 때에는 『원각경』을 읽다가 ‘일체가 다 사라지면 부동(
경전의 문자도마음 그 자체도 버린무심의 경지가 禪 찬란한 ‘불일(佛日)’의 시대를 지나 불교가 지탄의 대상으로 떠오르던 고려말. 스님들은 귀족화되고 사찰은 고리대금업 등으로 기업화되던 진흙탕 같던 말법시대에도 연꽃 같은 선지식들이 있었으니 백운, 태고, 나옹 스님 등이 바로 그 분들이다. 이중 태고보우 스님은 임제의 법맥을 잇는 한국 간화선의 적자로, 나옹혜근 스님은 생불로 추앙되며 오랜 세월 명망을 받아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백운 스님은 치열한 구도와 큰 깨침으로 일세를 풍미했지만 곧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던 스님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우리 곁에 온 것은 1970년대 초. 스님의 저술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직지)이 세계 최고(最古
법화경 팔만자에눈물 흐르니불교가 다시 보여 일촌밖에 안되지만쓰기에 따라천리 되는 것이 마음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는 훗날 다산 정약용이 ‘문장이 동국의 으뜸’이라고 칭송했을 정도로 한국 한문학사에서 시인으로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또 문학적인 성취는 물론 문학 장르의 폭넓은 활용으로 중세기를 밝혀준 이상적인 교양인인 동시에 한국지성사에서도 맞수를 찾기 어려운 위대한 문화인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어릴 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고 글재주가 탁월했던 그는 22세 때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했으나 관직을 받지 못하고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며 살았다. 빈궁에 시달리다가 32세 때 최충헌의 초청시회에서 그를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 비로소 전주목이라는 벼슬길에 올랐으나 부임 1년 4개월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믿는 것으로, 그 사람의 식견과 양심을 믿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에 꼭 맞는 말이다.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으로 고대 우리 민족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일연 스님은 지금으로부터 꼭 800년 전인 1206년 경산에서 태어났다. 이 해는 칭기즈칸이 몽고족를 통일하던 해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다가 9세에 광주 무량사에서 출가의 길을 걷는다. 어릴 때부터 대단히 총명했던 그는 14세에 강원도 진전사로 가 그곳에서 구족계를 받고, 22세에는 최고 고시인 선불장(選佛場)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후 스님은 현풍 비슬산으로 옮겨 수행할 무렵 몽고의 침략이 시작됐다.
선의 높다란 경지무지한 중생에겐큰 위안 못돼 부처님 염송하는그 마음 또한부처되어 가는 길 역사에도 굴곡이 있다. 조선 세종 때를 태평성세라 한다면 몽고와 왜군의 침략 시기는 살육과 굶주림과 눈물로 점철된 고난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 고난은 사람들을 절망과 상실로 몰고 간다. 하지만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암울함 속에서 영웅과 성자를 배출하기도 한다. 원묘(圓妙)국사 요세(了世, 1163~1245) 스님도 바로 그런 성자다. 정치가 타락하고 종교마저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내란과 외세의 침략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격동의 시대. 스님은 어둠의 한 가운데서 온 몸으로 희망을 말하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1163년 지금의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스님은 12세에 지금의 합천 천락사로 출가했
원효대사가 한국불교의 새벽이라면 지눌(知訥, 1152~1210) 스님은 먹구름을 뚫고 대지를 환히 밝히는 한줄기 빛이었다. 불일보조(佛日普照)이라는 그의 시호처럼 암울한 시대에 좌표마저 상실한 민중들에게 ‘부처님의 해처럼 널리 비추는 나라의 스승’으로 삶의 참된 이치와 영원한 수행자상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1158년 황해도 서흥군 동주에서 태어난 지눌 스님은 국자감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아들을 위해 부모는 온갖 좋다는 약과 명의를 찾아다녔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어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사찰을 찾아 기도를 드렸고, 그러던 중 아이의 병만 낳는다면 출가자의 길을 걷도록 하겠다는 서원을 했다. 그러자 씻은 듯 병이 나았고 어린나이에 그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굴산 종휘 선사 문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