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즉위 후 피부병 시달려 세자 급사하고 예종도 단명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손에 묻은 피의 흔적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친족을 죽였다는 패륜의 낙인도 마찬가지였다. 단종을 밀어내고 조선 제7대왕으로 즉위한 세조는 평생을 역창과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았다. 즉위 3년째에는 세자가 급사했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둘째아들 예종마저 스무 살에 죽었다. 왕실의 잇단 변고를 지켜본 이들은 세조의 죄업이 그 원인이라 수군거렸다. 세조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한 이는 바로 아내 정희왕후 윤씨였다. 그녀는 남편의 극심한 피부병과 정신질환을 돌봤을 뿐 아니라, 이후 세자와 예종 두 아들의 죽음으
조선 최초 간택으로 왕비돼 15세때 연하인 단종과 혼인 숙부 왕권 야망에 노심초사결혼 1년반 만에 왕위 이양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여인의 울음소리가 언덕을 휘감고 내려와 마을을 덮었다. 그 슬픔은 깊고도 묵직했다. 일을 하던 마을 사람들도 함께 통곡했다. 땅을 치고 가슴을 치는 ‘동정곡(同情哭)’은 여인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나누고자 했던 민초들의 애틋한 마음이었다. 여인이 매일 올라 눈물짓는 언덕배기는 동망봉(東望峰)이라 불렸다. 떠나간 남편이 머문 곳이 동쪽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 그녀의 기구한 삶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서럽고 아픈 사연으로 점철돼 있다.
태종 셋째아들 충녕과 혼인1년 만에 왕자비에서 왕비로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소헌왕후 심씨에게 1418년은 끔찍하리만치 다사다난한 해였다. 남편 충녕대군이 갑작스레 왕세자가 됐고, 3개월 만에 조선의 왕이 됐다. 그리고 다시 3개월 만에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와 가족들은 천민으로 전락했으며 그녀 스스로도 폐비의 위기를 감내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1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일어났다. 극단적인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는 끔찍한 세월이었으며 왕비가 된 기쁨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도 드러내지 못한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10년전, 열네 살이었던 그녀는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대군
이방원이 꾸민 ‘왕자의난’에한순간 오빠 둘·남편 잃어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1399년, 조선의 공주가 출가했다. 왕이 직접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유교적 이념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비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하들 모두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다.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속세를 등지려 하는 공주의 기구한 삶이 가엾고 애달팠다. 태조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 그녀는 조선 최초의 왕실 출가자다. 어머니를 여읜지 2년 만에 왕위찬탈의 희생양으로 두 오빠와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비운의 공주이기도 하다. 경순공주의 출가는 그녀의 돈독한 불심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무
고려여성에 불교는 삶 일부수행결사·법회도 적극 동참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여성불자를 빼놓고 한국불교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불교신앙은 역사적으로 유독 남다른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가정의 평안과 가족의 무탈을 발원하는 간절함은 굳건한 신심으로 이어졌으며 순수한 불심에 기반한 신행활동은 한국불교를 지탱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이런 여성들의 불심을 시대별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유독 고려시대에는 신심 깊은 여성들에 대한 기록이 많아 눈길을 끈다. 특히 그 중 왕실 여성으로 직접 만일결사를 주도했던 인예태후는 깊은 불심과 종파를 아우르는 신앙으로 후대 불교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
원나라 위왕의 딸 보탑실리 고려 독립·자주정책 지지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깊은밤, 한줄기 달빛이 고요한 방안을 깨웠다. 달빛은 곧장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에 가 닿았다. 어슴푸레 빛나는 영정을 마주하니 마치 공주가 살아 돌아온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염없이 영정을 바라보던 공민왕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세월이 얼마나 흘러야 그녀를 잊을 수 있을는지. 어쩌면 영원히 잊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공민왕에게 노국공주는 영혼까지 나누었던 다시없을 동반자였으며 삶을 지탱하는 힘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은 함께 부처님을 따르는 도반이기도 했다.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사찰을 찾아 나라의 안녕과 마음의 평안을 발원했다. 나란히 엎드려
남편 여읜 후 불교에 귀의감응사 창건해 왕생 발원통도사 순례땐 사리 얻기도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고려시대를 통틀어 나라에서 대사 칭호를 받은 유일한 비구니 성효 스님. 그녀는 뛰어난 승려이자 한평생 법도에 어긋남 없는 삶으로 당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충숙왕은 그녀가 입적한 후 ‘변한국대부인 진혜대사(眞慧大師)’로 추봉했으며, 비구니였음에도 그의 묘지명에는 세속 지위인 ‘관인(官人) 김변의 처 허씨’로써 남다른 인품과 행적이 기록됐다. 무엇보다 그녀는 불교에 통달한 고승이면서도, 유교적으로 모범적인 여성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면모를 지닌다. 묘지명을 쓴 김개물은 그녀의 이같은 행적을 칭송
14년 동안 태자비로 살다가충렬왕 재혼 후 후비로 격하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여인은 부처님 전에 몸을 낮춘 채 일어설 줄을 몰랐다.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가녀린 어깨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고려 충렬왕 8년(1282), 강화 진종사(眞宗寺)를 찾은 정화궁주는 복받쳐오는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10여년전 남편 충렬왕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생생했다. 당시 고려는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에 임시수도를 꾸렸다. 정화궁주는 이곳에서 태자였던 충렬왕과 결혼했고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오랜 전쟁으로 시름도 많았지만, 되돌아보면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녀는 종종 충렬왕과 함께 진종사를 찾아
최고권력자 아내로 권세누려권력 아귀다툼 속 허망함도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갈한 글씨체로 정성껏 써내려간 편지에는 깨달음을 갈구하는 한 여인의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구절구절마다 여인의 절절한 불심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참선 공부에 마음이 간절했으나 업장에 얽매여 그 한끝도 친히 듣지 못하고 오직 그리워할 뿐이었습니다. 여러 곳의 노장 스님께서 때때로 저를 찾아와 말씀하기를, ‘마음이 트일 때는 어디로 가나 걸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진정한 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변두리만 맴돌 뿐 아직 철저히 깨치지 못했습니다. 원컨대 스님께서 제게
왕건의 손녀이자 경종 아내 목종의 모후로 집권기 섭정 1009년 2월, 고려의 수도 개경. 남녀 한 쌍이 말 두필에 의지해 급히 성문을 나섰다. 모자(母子)지간인 이들은 오랜 시간 정신없이 말을 달려오느라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서른살 가량의 아들은 병색이 완연했다. 그럼에도 범상치 않은 옷차림은 이들이 고귀한 신분임을 한눈에 드러냈다. 말을 끌거나 앞뒤로 따르며 보필하는 이는 없었다. 오직 서로를 의지해 말을 달릴 뿐이다. 배고픔에 지치면 옷을 벗어 팔거나 구걸해 음식을 마련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아들이 어머니를 대하는 모습은 더없이 극진했다. 음식을 마련하면 어머니께 먼저 올린 후
1921년 일제강점기. 한 일본인 학자가 출간한 책 ‘사십칠사원(四十七祠院)’에 학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명확히 짚으면 이들의 관심을 끈 것은 책이 아니라 부록으로 간행된 ‘균여전’이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시대 화엄고승 균여 스님의 전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균여전’은 이후 1946년 최남선의 ‘증보삼국유사’에 부록으로 다시 게재되면서 본격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민족의 암흑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세상에 나타난 ‘균여전’은 고려 문종 29년(1075)에 진사 혁련정이 저술한 것으로, 원전은 균여 스님의 저서와 함께 해인사 장경각의 대장경 보판에 숨겨져 있었다.1000년
신라 진평왕 미모의 셋째 딸‘서동요’확산에 궁궐서 쫓겨나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고개를 떨군 선화공주에게 부왕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귀족들이 추천한 배필감을 잇따라 퇴짜 놓고 결혼할 사람을 직접 고르겠다고 큰소리쳤던 것이 이런 화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 사실이 아님을 아무리 강변해도 공주에 대한 부왕의 오해는 풀어질 기미 없이 분노만 더할 뿐이다. 왕은 결국 공주를 궁궐 밖으로 내쫓아 버리기에 이른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 뛰어난 미색으로 소문이 자자한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번 사태는 어이없게도 궁궐 밖 아이들이 부르고 놀던 짧은 동요 하나에서 불거졌다. 그 내용이 바로 공주에 관한 추문이었던
성스러운 혈통 명분으로 즉위지혜·불심으로 왕권 강화해 한반도 최초의 여성통치자, 신라 선덕여왕(632~647). 역대 왕들 가운데 선덕여왕만큼 얘깃거리가 많은 왕이 또 있을까. 첫 여왕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역사 속 그녀의 존재감은 분명하다. 특히 여성의 몸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엔 왕이 되어 선정을 펼친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뭉클하다. 역사서에 따르면 그녀는 너그럽고 지혜로운 왕이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선덕여왕에 대한 설화 세 개를 별도 서술해 그녀의 지혜로움을 보여준다. 향기 없는 모란, 여근곡을 침입한 적군을 알아차리고, 죽는 날을 예언해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지시한 이야기가 그것이
법흥왕 적통 이은 유일한 딸어린 진흥왕 대신 11년 통치 신라 진흥왕 10년(550). 양나라로 유학을 떠났던 각덕 스님이 불사리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사리의 안전한 이운을 위해 양무제가 직접 보낸 사신들이 동행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처음으로 신라 땅에 전해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와 관련 ‘삼국사기’는 왕이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불사리를 맞아들이게 했다고 전한다. 신라 개국 이래 지위고하를 막론한 모든 관료들이 일제히 궐 밖으로 나서 사신을 맞이한 사례는 없었다. 왕명을 받든 관료들이 흥륜사 앞길에 일제히 정렬한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으리라. 5년 전 중창불사를 마친 흥륜사도 더욱 눈부신
법흥왕, 이차돈 순교 이전보도부인 통해 불교 심취 “법흥왕은 등극 이후 백성들을 위해 복을 짓고 죄업을 소멸시킬 곳을 마련하고자 열렬히 원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왕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절을 세우고자 하는 신성한 계획을 따르지 않았다.”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조. 법흥왕 14년인 527년.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내전을 훑고 지나갔다. 분노에 찬 왕의 눈길이 귀족들을 찬찬히 훑었다. 왕좌 옆에는 형벌을 내릴 때 사용하는 형구(形具)의 일종인 풍도(風刀)와 상장(霜仗)이 서슬 퍼런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왕의 유례없는 진노에 귀족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오금이 저렸다. 까딱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정토왕생 발원하며 청정 지켜남편과 더불어 칭명염불 수행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왕자 싯다르타는 부처가 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보리수 아래 길상초를 깔고 앉아 금강 삼매에 들었다. 이때 그를 방해하기 위해 마왕 파순의 세 딸이 등장한다. 딸들은 각 600명의 여인으로 변신해 왕자를 유혹했으나, 싯다르타는 이에 현혹되지 않고 마침내 위없는 깨달음을 이룬다. 여기서 마왕의 세 딸은 애욕과 욕망의 상징인 동시에, 남성의 본능을 일깨워 번뇌를 유발하는 수행의 장애를 뜻한다. 한국불교의 고승 수행담 및 불교설화에서도 여성은 남성 구도자의 수행을 방해하는 장애요소로 종종 등장한다. 남성 위주의 불교사에서 특히 여성의 존재
의상 스님에 연심 품었으나 굳은 구도심에 감복해 귀의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청량함이 감도는 얼굴에 날렵한 콧날, 총명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떡 벌어진 풍채와 느긋하면서도 안정된 몸놀림, 진중한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비범한 인상마저 풍겼다. “어찌 저리도 멋진 분이 있단 말인가.” 선묘낭자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머나먼 나라 신라에서 바다 건너 온 귀한 손님이라 했다. 화엄불교를 배우기 위해 막 당나라에 당도한 참이라고. 손님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뒤에 서서 공손히 예를 갖추고는 있지만 벌렁대는 심장에 숨이 막혔다. 몰래 훔쳐보다 언뜻 비친 온화한 미소에 선묘낭자의 복숭아 빛 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차별·고통 없는 극락정토 염원불교, 괴로운 삶 위로하는 희망 만일결사 동참한 주인과 참배 법당 밖서 손 꿰어 묶고 염불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허황되고 기이하다 여겨지는 이야기 속에 진리가 숨어있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 스님이 서문에서 밝힌 바다. 이 같은 역사의식에 기반하여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를 집필함에 있어 야사와 설화까지 모아 고증하고 기록하는 방식을 택했다.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이 철저한 유학자의 입장에서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실만을 취사선택한 것과 대조적이다. 일연 스님의 이 같은 방식은 설화를 통해 나타난 당시 여성 불자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도록 한다. 불교설화 속
고구려 아도 스님 모신 모례 장자의 누이부처님법에 감화되어 출가…영흥사 창건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인연 따라 찾아온 객(客)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분간 묵어갈 수 있을까요.” 신라 눌지왕대(417~458)의 어느 늦은 밤, 왕성 인근마을인 일선군에 위치한 모례 장자의 집에 불쑥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당시 그의 집안은 지역의 세력가이자 부호(富戶)에 속했기에 신세지길 원하는 객들의 방문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흔쾌히 손님을 반기려던 모례 장자가 잠시 멈칫했다. 어두운 그늘 사이로 비치는 객의 모습이 보통의 손님들과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회색빛 장삼에 짚으로 만든 삿갓을 깊이 눌러쓴 독특한 차림새. 게다
한국여성, 승단 외호·지탱하는 지지기반1700년 불교역사 속 여성 재가불자 조명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대승불교의 핵심은 여래장(불성) 사상과 보살사상이다. 즉 누구든지 성불(成佛)하겠다는 서원을 일으켜 보살의 길로 나아간다면 그 사람이 바로 보살이며 미래에 깨달음을 얻을 부처라는 것이다. 때문에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이자, 중생들이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적 목표이기도 하다. 본래 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과거세에, 무수한 이타행으로 공덕을 닦던 시절의 인물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중생이 지향해야 할 모델이기 때문이다. 불교학자들에 따르면 부파불교에서 보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