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는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특히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곳의 대자연과 인간이 주는 감동과 여운은 대단히 크다. 여행은 힘과 사랑을 그대에게 돌려준다. 어디든 갈 곳이 없다면 마음의 길을 따라 걸어가 보라. 그 길은 빛이 쏟아지는 통로처럼 걸음마다 변화하는 세계. 그곳을 여행할 때 그대는 변화하리라. 잘랄루딘 루미의 ‘여행’ 흐르지 않는 물은 곧바로 썩어버리듯 문화도 교류가 활발할 때 늘 새로워지고 풍성해진다. 실크로드는 지난 수천 년 간 문화와 문화를 이어주는 교량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이 길을 통해 로마, 중동, 인도, 중국, 한국의 문화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찌워왔다. 인류문화의 대동맥으로 세계문화의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가운데 부처님은 당 고종이 그녀를 본 따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권력 쟁취를 위해 자식까지 죽여야 했던 측천무후이건만 이 부처님은 한없이 평화롭고 자비로워 보인다. 시안(西安)의 법문사를 뒤로 하고 차는 드넓은 평원과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 빠르게 나아갔다. 그렇게 점심이 지나고 오후가 기울어갈 무렵 이정표는 뤄양(洛陽) 시내에 들어서고 있음을 알려준다. 동탁, 여포, 조조 등 『삼국지』의 영웅들이 활거하던 곳. 불타는 뤄양을 뒤로하고 훗날을 기약하는 조조의 분노에 찬 눈매가 불연 듯 스쳐간다. 그 때 한 스님이 남도의 걸쭉한 목소리로 성주풀이 한가락을 뽑아내고 있다.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인가 우리
새벽 5시. 이 곳 호텔은 시안(西安)에서 손꼽힐 정도로 크지만 어제 밤 정전이 된 후 아직까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샤워를 하거나 머리를 감다 정전 사태를 맞은 사람들이 로비에 나와 항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호텔측은 공사 중이니 어쩔 수 없다며 초 한 자루씩 나눠줄 뿐이었다. 짐을 꾸려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호텔 안보다는 환하다. 차는 어둠을 가르며 바오지(寶鷄) 법문사(法門寺)를 향했다. 빠듯한 일정 탓에 실크로드를 향할 때도, 다시 돌아올 때도 들르지 못했던 법문사를 마침내 가게 된 것이다. 1시간 30분 정도 달려 바오지에서 법문사 입구로 접어들 무렵 짙게 깔린 안개 속에서 새악시 볼 같이 붉은 해가 꿈틀거리고 있다. 그 동안 실크로드의 삭막했던 것과는 달리 평화로운 농
깎아지른 절벽에 새긴 민초들의 ‘눈물 서원’ 시닝을 벗어나면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하늘을 만날 수 있다. 톈수이(天水)에 접어들 무렵 시간은 벌써 9시를 가리키고 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시닝(西寧)의 하늘을 뒤로 하고 떠나 온 것은 새벽 5시 30분이었다. 일찍 출발한 덕에 우리는 오늘 마이즈산(麥積山) 석굴을 보고 시안(西安)으로 향할 수 있을 것 같다. 톈수이 지역에서 들어서면서부터 짙게 깔린 안개가 10시가 넘도록 걷히지 않는다. 라이트를 켜도 몇 십미터 앞도 분간하기 힘들다. 톈수이는 중국 전설상의 황제인 복희 씨의 고향이며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의 뿌리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탓에 당나라 때는 이곳이 진주(秦州)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실크로
석양에 차 그림자가 길게 누울 무렵 길 위에서 만난 한 수행자는 오체투지로 라싸를 향하고 있다. 사막의 섬 둔황, 여기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 생애 다시 한 번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달리는 차창 밖으로 고요한 둔황이 어둠에서 깨어나고 있다. 오늘은 둔황으로 올 때와는 달리 남로를 택했다. 칭하이성(靑海省)의 성도 시닝(西寧)을 거쳐 란저우(蘭州)로 이어진 길이다. 둔황을 벗어나 한 시간 정도 달리니 멀리 당진산(當金山)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 산의 정상은 3535미터로 이 곳을 기점으로 칭하이성의 고원지대가 시작된다. 차가 산비탈을 오를수록 사막의 무더위는 사라지고 서늘한 바람이 몸을 휘감는다. 온도계를 들여다보니 영하 5도다. 다시 1
타얼사에서 가장 큰 규모인 대경전(大經展)에 들러 나오니 앞에 두 스님이 걸어가고 있다. 그 스님들은 맹인부부 앞에 들러 보시를 하고는 절의 입구 쪽으로 향한다. 우리는 달려가 스님들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눴다. 한 스님은 서른 살이고 앳되어 보이는 스님은 열일곱이란다. 두 분 모두 눈이 칭하이호처럼 해맑다.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라싸에서 왔다며 쫑까파 스님의 성지를 순례하러 이 곳을 찾았다고 답한다. 티베트 문화의 특징이 무엇이냐는 다소 애매한 질문에 “티베트의 정신은 불교”라고 나이든 스님이 힘 있게 말한다. 오대산을 들러 라싸로 돌아갈 거라는 이들에게 한국 스님들은 여비에 보태 쓰라고 슬며시 봉투를 내민다. 오대산을 거쳐 라싸로 떠날 계획이라는 젊은 티베트 스님들. 티베트의 독립과 달라
둔황에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야단지질공원. 온갖가지 모양의 거대한 흙덩어리들이 사막 위의 섬처럼 불쑥불쑥 솟아있다. 새벽부터 부산스럽다. 오늘도 둔황까지 먼 길을 가야하는 탓에 꼭두새벽부터 서둘렀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호텔 측에서 식사를 준비할 수는 없단다. 대신 미리 준비한 만두와 빵 음료수를 챙겨 둔황으로 향했다. 우루무치를 목적으로 달려온 실크로드 장정. 쿠차와 카슈가르까지 달리지 못하는 게 여간 아쉽지 않지만 돌아가며 볼 티베트 사원, 마이즈산(麥積山) 석굴, 룽먼석굴(龍門石窟), 법문사(法門寺) 등으로 위안을 삼을 밖에. 오전 7시, 우루무치를 벗어났는데도 온통 암흑투성이다. 이 곳 일정이 짧은 탓에 우리가 미처 우루무치 시간으로 바꿔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장 소도시의 택시
카오창고성을 빠져나올 무렵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우리는 길을 서둘렀다. 우루무치까지는 아직도 200여 킬로미터를 더 가야한다. 어스름한 창밖으로 검붉은 사막이 펼쳐져 있다. 이곳 타클라마칸의 흙빛은 고비 사막의 그것보다 훨씬 짙다. 날이 지고 있는 탓도 있지만 풍부한 광물자원 때문이다. 사실 위구르족의 자치구인 신장(新疆)은 실크로드의 요충지일 뿐 아니라 100억 톤의 석유와 석탄을 비롯해 엄청난 광물자원이 묻혀있는 중국의 보물창고다. 이런 까닭에 여기저기서 유전개발을 하는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얀 솜사탕 같은 만년설을 머리에 인 톈산 보고타봉, 그 아래 자리 잡은 천지는 주변의 푸른 수목들과 어울려 기막힌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이국에서 듣는 ‘나그네 설움’
시안(西安)의 아침은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분주하게 시작되고 있다. 오전 7시를 조금 넘긴 시간인데 거리는 이미 차들로 가득하다. 여기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많은 자전거 행렬들. 전 세계 자전거의 3분의 1인 4억5000만대가 이곳 중국에서 움직인다는 말이 실감난다. 대부분 시가지에 언덕이 없어 먼 거리를 힘들이지 않고 갈 수 있고, 곳곳에 자전거 전용 도로를 설치한 것이 중국을 ‘자전거 왕국’으로 만들었을 듯하다. 무뚝뚝한 표정에 경직된 모습의 병사들. 2200년의 시공을 넘어 그들과 마주하고 있는 듯 하다. 11개 왕조가 도읍 정한 古都 우리 일행은 시내구경에 나섰다. 거리에 신문을 파는 이, 잠깐 비가 그친 틈을 이용해 공터에서 태극권을 하는 노인들의 모습도 띈다. 멀리로는 강철,
2000년 중국부교의 최고봉 현장 법사. 그는 이 곳 자은사를 지을 때 인부들과 함께 벽돌을 나르기도 했다. 사진은 대안탑 7층에서 내려다 본 자은사 전경. “길을 가기 수만리,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혹한과 얼음으로 뒤덮힌 산길, 파도 높은 격랑의 골짜기, 여독흑풍의 매서움, 야수와 맹수들의 무리를 현장법사는 홀로 갔다. 쌓인 눈이 새벽에 날려 땅을 덮어 길을 잃고, 바람에 날리는 모래 저녁에 일어나 공중 밖 하늘에서 헤매었다. 만리산천의 구름과 안개를 헤치며 그림자를 내몰아 수없이 거듭되는 추위와 더위와 서리와 이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으리라. 심오한 법을 구하여 통달하기를 바라며 인도를 두루 유학하기 17년, 온 나라를 다 편력하며 바른 가르침을 구하였어라.”-『대자은사삼장법사전』 中
시안에서 란저우로 이어진 협곡마다 온통 밭이다. 먹고 살아야 하는 힘겨운 삶의 무게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까지 농사를 짓게 했으리라. 병마용갱과 대자은사를 뒤로 하고 화청지(華淸池)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유명 관광지 어디나 그렇듯 화청지 앞에도 상점들과 노점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주차장 앞 공터에는 반바지 차림의 아이들이 공을 쫓아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있다.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에도 등장하고 있듯 이곳 화청지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슬픈 사랑이 환영처럼 서려 있는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제법 운치를 더해준다. 화청지 내에 20∼40위엔을 내면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대중온천목욕탕도 그런대로 어울리는 편이다
란저우를 벗어나면 삭막한 대자연과 마주하게 된다. 이 길은 4세기 초 법현 스님이 구법의 길을 걸으며 "위로는 날아가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다. 오직 죽은 사람의 오래된 뼈만이 길 가는 이의 표지가 될 뿐이구나."라고 토로했던 곳이기도 하다. 오늘도 날은 어김없이 밝아온다. 몸은 젖은 솜처럼 무겁다. 어제 15시간의 강행군 끝에 우리가 란저우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가 가까워서였다. 불과 몇 시간 전이지만 마치 꿈결처럼 아련하다. 찬물을 머리에 쏟아부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어느새 창밖으로는 란저우가 어둠을 밀어내고 거대한 몸통을 드러내고 있다. 란저우(蘭州)는 서북부 최대의 공업도시로 300여 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대도시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인구 수십만의 변방도시였으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우리는 주유를 하기 위해 장예(張掖) 부근에서 잠시 멈췄다. 그 때 한 노인이 다가와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70~80년대 복장에 허연 수염이 인상적이다. “할아버지, 이 동네 사세요?” “응”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이 어느 나라인지 아세요?” “한국?,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할아버지는 82세로 이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실크로드를 따라간다는 말에 “나도 언젠가는 꼭 가고 싶다”고 말했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할아버지는 긴 수염을 휘날리며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랴오둥 산하이관을 떠난 만리장성이 거대한 용처럼 꿈틀대며 이곳 서역의 사막, 치롄산맥의 발치에 초라한 머리를 쳐들고 있다. 사진은 만리장성의 끝 자위관. 밝은 달은 천산에 떠오르고/고향은 아득히 구름 바다 너머에 있네 긴 바람 소리 옥문관을 휩쓸고 가네 우리 군사는 백등산으로 밀려나고/오랑캐는 청해를 넘보는데 예로부터 전쟁터에서/살아 돌아온 사람 보지 못하였네 삭막한 변방의 병사들/고향 생각에 지친 얼굴들 이 밤 높은 누각 위에서도/한숨소리 그치지 않는구나. 明月出天山 蒼茫雲海間 長風幾萬里 吹度玉門關 漢下白登道 胡窺靑海灣 由來征戰地 不見有人還 戍客望邊色 思歸多苦顔 高樓當此夜 歎息未應閑 -이백(李白)의 관산월(關山月)- 주취안(酒泉)에서 하룻밤. 호텔측에서 제공하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아득한 길, 이 길은 둔황으로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멀리 치롄산맥 아래 긴 굉음을 울리며 사막을 가로지르는 육중한 화물열차가 보인다. 자위관을 뒤로 하고 차는 둔황을 향해 빠르게 나아간다. 누런 사막 위에 길게 뻗은 도로가 마치 검고 굵은 한 마리 뱀 같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유유히 떠 있는 구름은 어린 시절 고향 산천에서 보았던 하얀 눈마냥 뽀송뽀송해 보인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아득한 길, 이 길은 둔황으로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그 때다. 멀리 긴 굉음과 함께 아스팔트보다 짙은 육중한 열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량, 두량, 세량…. 끝이 안 보이는 게 족히 오십량은 됨직하다. 땅 덩어리가 크다보니 화물열차도 저렇게 긴 걸까
짐을 꾸려 숙소 밖으로 나왔다. 새벽공기가 꽤나 쌀쌀하다. 어둠이 채 걷어드리지 못한 별들이 희뿌연 하늘에 걸려 있다. 2600년 전 카필라국의 젊은 왕자 싯타르타도 저 별을 보고 깨달았다지. 오랜 고행에 야위고 뼈만 남았을 그 젊은이에게 저 별은 어떤 의미였을까. 둔황에서 300여km 떨어진 대설산. 해발 5555m의 이 산은 몽고인들의 생활 터전이기도 하다. 갈수록 낯설어지는 중국음식들. 간단히 아침식사를 떼운 후 차의 시동을 걸었다. 오늘 목적지는 간쑤성(甘肅省) 몽고족자치현의 대설산이다. 둔황의 상징 막고굴보다 대설산을 먼저 간다니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몽고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차는 숙소를 빠져나와 고향길 같은 도로를 세차게 나아갔다. 이른 아침인데도
세계 최대의 호랑으로 일컬어지는 둔황 막고굴. 백양나무가 기도하듯 경건하게 서 있다. 헤매고 돌아다닌 거/나를 찾아/가고 또 간 길. 모래산 나즉이 누웠고/월아천 눈썹 눈물이 나/천수천안 백양나무 앞에 서 있었다. 흙벽 소담한 돈황의 언덕,/흙산을 뚫으며/부처님 찾아 관세음보살 외치던/수천 수만 염원의 손,/그 세월의 벽화를 만나며/옛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황량한 흙먼지,/오래지 않아 무너질 흙굴,/가도 가도 자갈사막 이어지던/천산의 만년설 흘러내린 곳에/“기다리면 가득하리라”/초록 물빛 산에 잠기고 있었다. - 정영자의 ‘막고굴의 서원’ 中 272굴 사유보살상. 우리나라의 금동미륵반가상(국보118호)과 대단히 비슷하다. 하루 종일 차에서 지내다보니 온 몸에 피로가 덕
거센 모래 바람이 그치지 않는 황량한 산웨이산(三危山). 둔황 막고굴은 그 곳 산기슭에 고요히 둥지를 틀고 있다. 4세기 중엽인 5호16국 시대부터 14세기 원나라 때까지 약 1000여 년간 조성된 까닭에 막고굴의 불상과 벽화들 모습도 제각각이다. 초기의 굴, 그러니까 수나라 이전의 굴들에서는 불상의 얼굴이나 의상 등이 서역풍에 대단히 가깝다. 불교가 아직 이 지역에 정착하지 못한 때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세련된 멋은 없지만 정겹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매력적이다. 반면 북위시대를 거쳐 당대에 이르면 정교함과 화려함은 극치를 이루고 불상과 보살은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물씬 넘친다. 벽화도 초기에는 부처님의 전생 등을 표현한 것이 많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대승불교를 주제로 한 경전들이 주로 나타나고 있으며
둔황 막고굴과 함께 이 지역의 대표적인 명물 밍사산. 수많은 시안과 가객들이 이곳에 들려 밍사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바람에 모래가 버석인다. 때문일까. 시원하기보다 오히려 숨이 턱턱 막혀온다. 일주문 뒤로 서 있는 막고굴이 떠나는 우리를 천년의 시선으로 굽어보는 듯 하다. 그 척박한 실크로드가 아직도 몽환의 이미지로 남아있는 것은 어쩌면 막고굴이 갖는 신비로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에 올라 밍사산으로 향했다. 굴곡이 심한 도로에 차도 사람도 덜컹거린다. 20여 분 달렸을까. 멀리 하얀 모래산이 머리를 조금씩 내밀고 있다. 어떻게 이런 황무지에 저런 곱디고운 산이 솟아날 수 있었을까. 둔황에서 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밍사산은 50~60m 높이의 모래산이다. 남북으로 약 20km, 동서로 약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불타는 산, 후오이엔산. 산줄기가 위로 솟구치는 불길 같다. 둔황의 아침이 뿌옇게 밝아온다. 오늘 달려야 할 거리는 약 900km.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출발했다. 숙소 앞에는 두 마리 개가 이리 저리 뛰놀고 있다. 우리나라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둔황. 이곳은 불교미술에서 뿐 아니라 역경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전 지참, 구마라집, 현장과 더불어 중국 4대 역경가의 한 사람인 축법호(竺法護)는 둔황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출가해 불법을 전하겠다는 뜻을 세운 그는 스승을 따라 서역 각지를 유람하며 불교를 배우고, 또 수많은 경전을 수집해 고향 둔황으로 돌아왔다. 당시 서역의 36개국 언어에 능통했다고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