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까마귀 한쌍 샘물 마시던 곳중국서 3053불·16나한 모셔온의각선사 만나 가람으로 꽃펴 세월 흐르고 1516불 남았지만오롯이 담긴 구도심 변함없어 ▲향천사 극락전에 이르는 길이다. 빨갛게 타오르다 명 다해 주황색으로 빛바랜 낙엽이 객을 마중한다. 세속에서 좋든 싫든 달아오른 마음의 색 좀 빼고 들라는 법문이다. 일엽지추(一葉知秋)라 했다.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에 가을이 영근다. 곧 추운 겨울이 오리라. 단풍도 겨울 마중물이다. 추위 이겨낼 걱정이 반가움보다 앞선다. 금오산 향천사 일주문엔 붉게 저무는 가을이 시간을 붙들고 있었다. 일주문은 마음 가다듬고 한마음으로 들어서라며 한 줄로 선 기둥 2개로 버티고
544년 연기조사 가람 창건 전란 속 수차례 피고 져도 민초들 아픔 가슴에 품어 산신할매 영험함으로 유명 ▲하늘이 반쯤 눈을 떴다. 지리산의 새벽, 하늘이 잠에서 깨어났다. 영하의 푸르고 찬 기운 비켜섰다. 더 갖고 싶고 자기만 생각하며 쉬이 분노하는 검푸른 중생심도 물러갔다. 지혜는 하늘에 맞닿아있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흐르는 약 1625km의 장엄한 산줄기 백두대간. 백두산(白頭山)이 ‘지혜의 머리’이니 지리산(智異山)은 ‘세상과 다른 지혜를 얻는’ 산인 셈이다. 지리산은 백두산이 흘러내린 산이라 해서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부른다. 지리산의 본래 이름은 지리산(智利山)이란다. 혹자는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
1872년 고상진 거사 창건중부제일 독성기도 도량나반존자 영험담으로 유명대웅전, 독성각 쪽 벽 유리로 ▲삼각산 삼성암 대웅전 옆 은행나무에 노란 단풍이 들었다. 경내엔 독성기도와 관음기도가 한창이었다. 삼성암 찾는 기도객의 원력이 만개했으리라. 노란 은행 앞세운 백의 관음보살 미소가 지긋하다. 소리는 빛보다 먼저 새벽을 열었다. 향 사르는 소리가 방안을 스쳐 지나갔다. 그윽한 향내가 퍼질 무렵, 좌복 펴는 소리가 뒤를 따랐다. 한 알 한 알, 염주 돌리는 소리와 함께 나지막이 칭명염불이 흘렀다. “나반존자, 나반존자, 나반존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꿈일까 생시일까. 빛이 세상을 찾기 전, 어
‘삼족오’ 상징한 금오산 정상 현월봉 중턱에 자리한 암자의상대사 해탈한 곳에 창건 ▲금오산 약사암. 현월봉 중턱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멀리 금오지와 구미 시가지가 아련하다. 가을은 거스를 수 없는 감동이었다. 기암괴석 곳곳에서도 단풍이 피었다. 구미 금오산 초입에 들어선 의상(625~702)은 감탄했다. 울긋불긋한 나뭇잎이 산을 장엄해서다. 이를 악물고 손을 꽉 쥐었다. 단단한 바위틈에서도 나무는 태양빛을 잎에 물들이고 겨울과 이듬해 봄을 준비 중이었다. 의상은 서원했다. ‘이곳에서 자유자재한 불성을 확연히 꿰뚫어보리라.’ ‘세속에 찌들어 불성으로 향하는 길을 단단히 막아선 벽을 뚫고 연꽃을 피우리라.’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해 관음 진신 친견 뒤에 불사설악산 기암바위 속 위치김시습·만해 스님과 인연 ▲오세암 천진관음보전 처마 끝에 설악의 하늘이 내려앉았다. 청명한 하늘이 삿되지 않다. 삿됨 비우자 가벼워진 가을 하늘이 사뿐 앉은 게다. 길은 외길이었다. 그러나 넉넉했다. 반보 옆으로 살짝 틀면 설악에 오르는 이 내려오는 이 모두 너끈히 비껴갔다. “안녕하세요”라는 안부는 생면부지의 남남이 설악 품에서 인연으로 맺어지는 고마운 순간이었다. 길은 본디 외길이었으나 이쪽저쪽 모두를 품고 있었다. 몸만 돌리면 오르막이 내리막이 되기도 하고 내리막이 오르막이었다. 설악을 등진 사람이나 안은 이나 길 위에 놓인 객일
원효 스님이 창건한 사찰관음 현신 친견 뒤 조성해원효굴·원효폭포도 유명 ▲원효폭포와 원효굴. 속울음이 겨울을 삼켰다. 찬바람은 소요산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눈을 흩뿌렸고 자재암 향하는 걸음을 무겁게 했다. 속리교(俗離橋) 옆 원효폭포는 얼어붙었다. 원효굴 부처님은 얼음장 같은 미소로 중년남성의 맘을 얼렸다. 그는 108 계단을 오르며 108번 참회했다. 가족들 볼 낯이 없었다. 해탈문에 매달린 종이 차갑게 울었다. 도망치듯 자재암 품에 들었다. 그날, 이름 모를 50대 중년남성을 안은 대웅전이 울었다. 그가 흘린 눈물은 비탄을 품었다. 그의 어깨가 흐느꼈다. 이곳을 벗어나면 오갈 데가 없었다. 사채는 눈
칠갑산 자락에 위치국내 유일 대웅전 2곳약사여래 영험 유명동자 느티나무 기묘 ▲몇 백년 흘렀는지 모른다. 국보 약사여래가 가부좌 튼 상대웅전 마당에 느티나무 한 그루 뾰족하다. 그 아래 장곡사. 뿔처럼 솟은 느티나무가 중생 번뇌를 찌른다. 시간은 말이 없다. 몇 백년 흘렀는지도 모른다. 아니, 몇 천년인지도 가늠할 길 없다. 국보 약사여래가 가부좌 튼 상대웅전 마당에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 홀로섰다. 상대웅전 떠받친 언덕에 솟았다. 느티나무는 제 뿌리 상대웅전 아래로 펼쳤다. 흙에 기대 긴 세월 풍설을 견뎠으리라. 그 아래 장곡사 가만하다. 뿔처럼 솟은 느티나무가 약사여래로 향하는 객 마음 속 번뇌를 찌른다. ‘왜 그리 많
677년 의상대사가 창건해국내 유명 나한기도도량세종 형 효령 영정도 모셔 ▲빗줄기 거둔 하늘이 흰 구름과 관악산 연주대로 파란 속살을 가렸다. 깎아지른 바위 위에 응진전 하나 덩그러니 앉았다. 퍼붓던 비가 멈췄다. 폭우는 4km 남짓한 관악산 깊은 계곡을 풍요롭게 했다. 과천향교에서 연주대로 향하는 마음이 넉넉해졌다. 숲 안까지 안고 왔던 잡다한 걱정들이 사라져서다. 숲 밖으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번뇌를 삼켜 버려서다. 연주대까지 3.6km. 산은 초록으로 영글었고, 짝 찾는 풀벌레 소리가 지천이었다. 늦여름은 넉넉하게 가을을 준비 중이었다. 세상사에 치어 모나고 각진 마음까지 둥글어졌다. 나무아미타불이 새겨
굴산파 중흥조 탄연국사 개산명성황후, 문수보살상 시주해기도처로 유명한 천연 굴법당 ▲문수사는 중생이 떨구고 간 세속 때를 비로 씻어 내리고 있었다. 문수보살이 세속 때 비로 씻고 계심이리라. 사진 가운데가 문수굴. ‘몸치장하는 보석 장신구엔 관심조차 없었건만….’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라는 이도 내가 왕비답지 않게 수수하다고 했다. 공식장소가 아니면 목걸이, 팔찌도 안 하고 참석했으니….’ ‘왕권회복과 쇄국 정책을 위한 경복궁 중건으로 당백전까지 주조해 이미 국고를 악화시킨 건 시아버진데, 내가 낭비할 국고라도 있었던가.’ ‘다른 여자를 사랑한 왕을 모시기도 참 힘들었구나.’ ‘아들도 제 어미 젖 한
천년세월 고스란히 품은 도량지장·시왕 모신 명부전 유명경허선사 선풍 오롯이 깃들어 ▲향나무와 배롱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열기를 식힌다. 코끼리가 목을 축인다는 못은 ‘마음을 연다’는 개심사를 제 속에 담고도 입을 닫았다. 침묵은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일 게다. 전날 내린 비로 서산 상왕산 계곡이 목을 축였다. 가뭄에도 개심사가 품은 신심이 천년을 흘러 내려온듯 했다. 메마른 마음의 갈증을 푼다. 일주문 앞에서 생계를 위해 산나물 펼쳐 놓은 아낙네도 기대로 부푼다. 입술이 마르고 갈라졌어도 하루벌이를 바라는 눈빛이 촉촉했다. 길 양옆으로 허리 굽혀 객을 맞는 소나무는 간혹 부는 시원한 바람에 제 머리
선덕여왕 4년 회정대사 창건홍련·보리암 등 3대 기도처나반존자 영험담으로도 유명 ▲작은 몸 웅크린다. 마애불, 관세음보살은 말이 없다. 그래도 웅크린 몸 폈다 다시 웅크린다. 관음보살 품고 있는 눈썹바위 그늘에 작은 웅크림 하나, 큰 신심 하나 있다. 30대 후반 왕수경씨는 강화 낙가산 보문사를 처음 찾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강화도에 이르면 외포리 선착장서 배를 타고 석모도로, 그곳에서 보문사까지 털털 거리는 버스를 타야 했다. 편한 여정은 아니지만 꺼릴 것 없었다.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관음기도처에서 기도할 수 있는 복이 있으니. 그녀는 어린 시절 가족 걱정뿐인 우리네 어머
671년 의상대사가 관음 친견한 굴 위에 창건2005년 화마도 피해 입히지 못했던 기도도량 ▲안개가 감춘 낙산사 홍련암 속살이 드러났다. 신심은 사라지고 미움만 남았던 마음을 웃게 했다. 푸른 빛 짙은 바다는 파란 하늘과 선을 그었다. 홍련암은 오봉산 끝자락 바위 절벽 위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안개가 속살을 감췄다. 경봉 스님이 쓰신 원통보전 편액, 잔혹한 화마서 살아남은 7층 석탑이 흐릿하다. 형형색색 부처님 오심을 찬탄하는 연등도 빛을 잃어갔다. 원통보전 옆 해수관음으로 향하는 꿈이 이루어지는 길은 조고각하(照顧脚下)다. 발 밑 찬찬히 살펴 걸어야 했다. 낙산사 어디에서도 볼 수 있던 해수관
▲사시예불이 봉행되자 석불전 객들은 끊임없이 절을 올렸다. 108염주를 부여잡은 두 손은 방석과 맞댄 이마에 자리했고 입에서는 간절한 마음들이 새어 나왔다. 풍수대가 도선국사가 창건 엷은 웃음 띤 얼굴은 차라리 신심이었다. 도량은 부처님 오신 날 찬탄과 기도를 위한 간절함이 신묘하게 몸을 섞고 있었다. 찬탄과 간절함이 어우러진 신심이 서울 삼각산 도선사를 휘감았다. 우이동 시내버스 종점에서 사찰 진입로인 청담로를 약 1km 오르면 첫 번째 고개(일명 도선고개)에서 도선사(주지 선묵혜자 스님) 산문이 객을 맞는다. 산문은 자비문이다. 청담대종사 친필 휘호인 자비무적 방생도량을 조각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n
층암절벽 위 뿌리내린 도량천태각 나반존자 영험 서려 ▲ 평일이었지만 사리암 기도객은 적지 않았다. 천태각 옆 사리굴에서도 나반존자 기도전각 관음전에도 빈 자린 많지 않았다. 솜사탕이 뽀송뽀송 길을 수놓았다. 달콤했다. 운문댐 근처로 접어들어 운문호 옆 굽이굽이 난 도로를 따라 청도 호거산 운문사 사리암으로 향하는 길은 벚꽃 천지였다. 운문사 주차장에서 운문사 입구도 마찬가지였다. 4월 봄볕을 타고 꽃비를 흩뿌렸다. 나반존자 기도도량 사리암을 찾아온 마음도 분홍 꽃비처럼 봄바람에 흩날렸다. 사리암은 운문사에서 걸어 1시간 거리다. 신도로 등록한 객만 사리암에 이르는 길이 허락됐다. 이 일대 생태계를 지키고자 한
▲평일에도 갓바위 부처님을 찾은 기도객들 기도는 쉼이 없다. 팔공산 선본사 소향실에서 하루저녁을 기댔다. 때 아닌 4월 눈은 바람을 타고 팔공산을 휘감았다. 팔공산은 밤늦도록 울어대는 눈바람에 시달렸다. 다음 날, 소향실까지 ‘지심귀명례’가 바람에 실려 왔다. 객은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귀의하고 예배한다는 스님 목소리에 새벽 내내 시달렸다(?). 불법으로 돌아가 의지하며 부처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을 바치고 스스로도 그렇게 되리라는 강한 원력을 담은 ‘지심귀명례’. 갓바위 부처님을 홀로 조용히 참배하고자 아침 일찍 선본사를 나섰다. 일주문 옆 금륜교를 지나 해발 850m 팔공산 관봉(冠峰) 정상으로 향했다.
▲원효 스님이 ‘화엄경’을 읽었다는 금산 화엄봉에서 바라다 본 보리암. 스님도 깎아지른 바위 위에 걸터앉은 도량을 봤으리라. “나무관세음보살.” 겨울 보낸 나뭇가지 사이로 합장한 마음이 걸렸다. 굽어보는 해수관세음보살상 뒷모습이 그윽하다. 멀리 다도해가 일렁였다. 남해 금산 보리암이 가슴에 담긴 순간이다. 남해 보리암(주지 능원 스님)은 강화 보문사, 여수 향일암, 양양 홍련암과 더불어 대표적인 관음기도도량이다. 금산 복곡 제2주차장에서 800m 오르다 100m 아래로 난 계단을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다. 아이와 함께 온 부부와 지팡이 짚은 노보살, 연인들, 도량을 내려오는 기도객들이 마
▲ 천마봉에서 바라본 도솔천 내원궁. 굳은 신심으로 새긴 마애미륵불이 천년 비바람을 견디며 내원궁을 떠받치고 있었다. 상사화는 애처롭다. 꽃과 잎이 평생 서로를 만나지 못한다. 꽃은 가을에 핀다. 하지만 잎은 봄에 비늘줄기 끝에서 뭉쳐나고 6~7월에 마른다. 꽃이 있을 땐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땐 꽃이 없다. 서로를 생각한다고 해서 상사화(相思花)다. 상사화 꽃과 잎은 미륵불과 지장보살을 닮았다. 지장보살은 부처님 입멸 뒤 미륵불이 사바에 나투실 때까지 하늘과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 등 육도 중생의 성불 원력을 세웠다. 고통에 빠진 중생 모두가 빠짐없이 성불하기 전까진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자장, 마지막으로 사리 봉안적멸보궁 뒤 수행 토굴 있어 사자산문 선풍 중흥 이끌며 한때 2000 선객 정진하기도 ▲적멸보궁 뒤 자장율사 수행 토굴 축대 위 연꽃 초가 가지런하다. 제 키보다 높은 축대 위로 초를 공양한 뒤 합장하는 어느 보살의 마음도 가지런할 터다. 머리카락이 주뼛 섰다. 움츠린 피부는 온몸의 털들을 부여잡았다. 흰 머리에 달걀형 얼굴을 한 노파가 두 손을 잡아끌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식은땀이 흘렀고, 단잠은 달아났다. 꿈이었다.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만 참배하고 와서일까. 밑바닥까지 얼어붙은 신심 탓이리라. 2월22일 아침녘, 부리나케 산신각을 찾아
불상 대신 적멸궁 뒤 수마노탑에 사리 봉안한 겨울에도 참배객 발걸음…1년 내내 기도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수마노탑과 기도처 적멸궁이 자리한 태백산 정암사 입구. 정암사 적멸궁에서는 목탁과 염불소리만 그득했다. 태백산 숲과 골짜기는 태양만 허락했다. 멀리 세속 티끌은 끊어졌다. 정결하기 짝이 없다. 정암사(淨巖寺)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기도도량 정암사는 티끌 하나만큼 의심조차 머물지 않았다. 2월7일 오후 강원도 정선 고한읍 정암사는 영하 10도 언저리를 기웃거렸다. 속절없었다. 태백산을 휘감은 겨울바람은 외투를 파고들어 온몸을 떨게 했다. 세속 티끌은 끊기고 칼바람과 목탁 그리고 염불소리만 그득했다.
자장율사가 사리 봉안…일연 스님 “불법 번창” 극찬 중대사자암서 공양 올리며 365일 염불 끊이지 않아 ▲비구니 스님이 사시 마지불공을 위한 부처님 공양물을 메고 적멸보궁에 오르고 있다. 일타 스님은 문수성지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엄지를 제외한 오른손 네 손가락 모두 소신공양했다. 서대 염불암에 기거하며 날마다 적멸보궁에서 하루 3000배씩 절을 시작한 지 7일째 되던 날 원력을 세웠다고 한다. 스님은 영원히 번뇌를 벗고 오랜 숙세의 빚을 갚아 불법을 통해 완전한 신심을 결정짓고자 했다. 도종환 시인은 시 ‘단풍 드는 날’에서 “버려야 할 것이 /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