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상림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조성한 세계 최초의 인공림이다. 물길을 트고 숲을 조성해 홍수를 막은 이 치수법은 우리 민족이 지녔던 화쟁 사상의 단면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상호텍스트성 이론은 실증주의 비평, 역사주의 비평 등 실체론에서 비롯된 비평에 사망선고를 내리고 작품과 텍스트를 읽는 새로운 지평을 펼치고 있다. 원래 관계의 사유를 하는 우리나라 학자가 이 이론을 세상에 처음 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지금까지도 한국에 이 이론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거나 적용되지 않고 있다. 문예지에 단편적으로 소개된 것이 고작이다. 지금 서양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한창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필자가 보기에 이 이론은 정점에서
눈 앞에 보이는 작품을 실체로 읽을 필요는 없다. 만다라가 아름다운 도형을 그린 것으로 보이지만 다양한 관계로 맺어진 세상의 구조를 표현하는 과정이다. 서양 사람들은 실체 중심의 사유를 하고, 동양 사람들은 관계 중심의 사유를 한다. 한 미국학자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제자들을 모아놓고 실험을 하였다. 어항을 보여주고 그것을 다시 그리라고 했더니 서양 학생 대부분은 어항 속의 물고기를 그렸다. 하지만 동양 학생 대부분은 어항과 물고기와 물풀, 책상이 어울린 그림을 제출했다. 실체 중심의 사유를 하는 서양과 관계의 사유를 하는 동양의 패러다임 차이가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서양인들은 사람을 만나면, “너는 누구냐?”고 곧잘 묻는다. 반면에 동양 사람은 “네 어머니와
작품을 읽는 것은 학자나 비평가의 견해를 읽거나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작품을 대할 때 자연의 아름다움은 비극이 되기도, 또는 희극이 되기도 한다. 그럼 아는 것을 넘어서서 불교식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교는 마음공부다. 마음이란 모든 법이 의지하는 주인이다. 원효의 말대로 “참으로 이 마음이 모든 법을 통섭하며 모든 법의 자체가 오직 이 일심(一心)이기 때문”이다. 원효가 당나라 유학길에서 처음에 바가지의 단물로 보았을 때는 그리도 달던 물이 다음 날 아침 해골에 담긴 것으로 보자 토한 것처럼,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짓는 것이다. 유상유식론(有相唯識論)에 따르면, 의식은 대상을 지각하는 주체인 견분(見分)과 견분에 의해 지각되는 대상인
석굴암이나 불국사는 경덕왕의 문화 의식의 산물이 아니다. 당대 절정을 이뤘던 신라의 문화저력과 김대성 같은 장인의 덕이었다. 예술은 작가와 표현, 대상, 미적 체험, 독자의 수용과 감상을 두루 갖추어야 가능한데 불교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한다. 그럼에도 불상은 만들어졌고 동양 예술의 정화(精華)의 위상을 점하고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불교철학 자체에서 예술로 형상화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보았다. 작가와 표현에 대해서는 인언견언론(因言遣言論)론, 대상에 대해서는 조론(肇論), 미적 체험에 대해서는 유상유식론(有相唯識論)론, 종교와 일상의 합일에 대해서는 진속불이론(眞俗不二論)론, 감상과 해석에 대해서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근거로 제시하였고, 현학이나 관념적 진술에 머무는
석굴암 본존불이 원융미의 정점이고 부처골 감실부처상이 질박미의 정수라면 선도산 마애삼존불은 신심과 예술혼의 정화다. 당시 신라에는 불교의 여러 신앙체계 가운데 기존의 고유신앙과 크게 맞서지 않고 현실에서 삶의 행복과 즐거움을 불러오며 신이함과 신령스러움을 강조하는 밀교 계통의 신주신앙(神呪信仰)이 먼저 뿌리를 내린다. 신라인이 굳게 믿었던 이 신앙의 실상은 무엇일까? 당시에 왕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지금 기독교도들에게 성경과 같은 구실을 하여 국가 의례에서 개인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삶과 행동의 준거가 된 경전을 살짝 들춰보자. “1백개의 불상, 보살상, 나한상 등과 곳곳의 대중을 청해 이 경을 즐겨 듣고 … 1백명의 법사가 높은 자리에 앉아 1백가지 향을 피우고 1백가지
마애삼존불이 조성돼 있는 선도산의 바위는 정을 대기만 하면 부서져 나간다. 이런 곳에 굳이 마애불을 조성한 신라인들의 마음을 읽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회·종교·예술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경주 중심가에서 해가 떨어지는 쪽을 바라보면 서천을 끼고 펼쳐진 탑정동 일대의 두드리 들을 지나 불쑥 솟은 산봉우리들이 보인다. 그 산들 가운데 제법 높은 산, 뾰족한 삼각형이지만 둥그런 곡선을 한 봉우리를 한 산이 있다. 그 산의 정상 바로 아래쪽을 쳐다보면 서천 건너편의 도심지에서도 마애불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바라보며 경주 시청이나 터미널에서 서천교를 건너면 바로 서악, 선도산이다. 높이는 380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 선도산 성모 사소(娑蘇)의 사당
원효는 화쟁의 사상을 통해 체와 용과 상이 끝없이 순환하는 원리를 밝혔다. 이는 불교에서 예술을 바라보는 기초가 되어준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을 주석하면서 화쟁(和諍)의 논법을 통해 이를 더욱 발전시켜 세계를 구조적, 전일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방편을 열었다. 지면관계상 인용문을 생략하고 곧 바로 풀이하면, 체를 본질, 상을 현상, 용을 실천이나 운동, 작용, 기능에 배대하는 것은 서양적 사유의 소산이다. 편의상 설명을 위해 그렇게 예를 들었을 뿐이지 나무의 속성이 체가 아니다. 우리의 얼굴의 세포는 하루에만도 수백, 수천 개가 변한다. 일 년이면 수십 만 개 세포가 변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다. 세포가 변하지만 얼굴의 근육과 주름살과 눈과 코와 입을 형성
매일 보는 변기도낯설게 보는 순간예술적 의미 창출 20세기 최고의 미술작품으로 손꼽힌 마르셀 뒤샹의 ‘샘’. 뒤샹은 예술에 대한 개념의 전환을 통해 공장서 제작해 낸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재탄생 시켰다. 필자가 오늘 시청 앞 광장에 라면 상자를 몇 개 쌓아놓고 이를 예술이라 주장하며 수십 억 원에 경매하고자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필자를 미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앤디 워홀은 부엌 세제를 넣는 브릴로 상자를 몇 개 쌓아올려 놓고 예술이라 하였다. 지금 앤디 워홀의 작품은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인 삼성가가 재산의 은닉 수단으로 그의 작품을 사들였을 정도로 고가에 경매되고 있다. 미술관서 추방당한 ‘20세기 최고 걸작’20세기 최고의 미술작품은 누구의 어느 작품
‘왕즉불’ 사상 투영한 중국 〈사진1〉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불화. 〈사진1〉은 지금은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불화이다. 서양이 돈황 석굴에서 야만적으로 떼어간 작품 가운데 하나인 모양이다. 상단을 보면 아기가 금빛 수반 위에 서 있다. 아기의 얼굴과 몸매는 중국인 형상이다. 목욕을 시키러 온 여인들도 모두 중국 궁녀들의 옷차림이다. 중국은 5세기 북위 시대에 들어 왕즉불(王卽佛) 사상에 따라 불상을 중국화한다. 아기 머리 위에 있는 아홉 마리의 황금빛 용들도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원래는 경전에서 “하늘에서는 용왕이 따뜻한 물과 찬물로 된 두 종류의 청정한 물을 석가의 몸에 뿌렸다.”는 것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인도의
석존의 탄신을 묘사한 불상이나 불화가 많다. 탄신의 이야기와 내용을 재현하고 표상한 것은 유사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직접 가보지도 않은 채, 그것도 사진과 한 두, 혹은 서너 문장에 불과한 사진설명에 필자의 알량한 지식을 보태 분석하는 것이기에 오류가 많을지도 모르겠다. 보리수-불족 으로 대신한 무불상 시대 〈사진 1〉 캘커타 박물관 소장. 기원전 1세기. 『한국불교조각의 흐름』에 수록. 팔리어 경전 『숫타니파타』에 “(태양과 같이) 영원히 잠든 그는 어느 것에도 필적할 수 없다. 어떤 관념으로도 그의 본질을 표현할 수 없다. 그와 관련짓는 어떤 관념도 허망하다. 그러므로 그에 관해서는
감실은 파들어가다 그만두기라도 한 듯 작고 투박하다. 그 속에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부처의 모습은 만일 육계가 없었더라면 우리 주변의 할머니와 다를 바 없다. 경주 남산, 감실 부처골을 따라 오른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하여 몇 미터만 더 오르면, 빈터를 끼고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를 보면 소박한 석굴이 있다. “야마모토 겐지(山本謙治)라는 일본인 학생(현재는 일본 한난국제대학 국제관광학과 교수)이 1980년대 초에 이에 매료가 되어 달밤에 침낭에 들어 불상과 함께 하룻밤을 지냈다는 그 불상이다.”(박홍국, 『신라의 마음 경주 남산』) 높이 3.2미터, 너비 4.5미터의 바위가 세모 꼴 홈을 이루고 있고 그 안에 불상이 있다. 투박하게 세모 모양의 감실을 파
종교-일상의 괴리진여해탈 추구하는예술 창조의 원동력 불교예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인도 아잔타 석굴. 지극한 신심의 결정체인 이 석굴의 제17굴 입구에는 석굴이 조성된 굽타 왕조 시대 왕족들의 호사스럽던 생활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가장 성스러운 공간으로 조성된 석굴의 입구에 그려진 이 관능적인 세속의 모습은 성과 속의 거리가 결코 먼것 만은 아님을 말해주는 듯 하다. 세계의 한 편에는 성(聖)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속(俗)이 있다. 성스런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종교라면, 속한 세계에 머물고자 하는 것은 일상이다. 세계 앞에 선 인간 또한 성과 속의 양면성을 지녔다. 성인에게도 천박하고 비루한 면이 있는가 하면, 속물에게도 고상하고 숭고한 구석은 있다. 우리는 욕망을 억제
불교는 흔히 서양에서 ‘마음의 과학’이라 일컬어진다. 물론 서양에서도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이 오래되었지만, 마음을 벗어나는 세계까지 다루는 불교와는 어느 정도 괴리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와 동양사상이 19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서양에 전래된 이래 서구심리학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서양 심리학계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리는 켄 윌버(Ken Wilber)의 ‘자아초월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 혹은 ‘초개인심리학’이라 할 것이다. 이는 용어표현 그대로 ‘나’와 ‘나를 벗어난 세계’까지 총체적인 의식체계를 전일주의(全一主義, Holistic)의 입장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이론 중에 현대인의 이해에 쉽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세 개의 눈’ 혹은 ‘세
경주를 굽어보고 있는 신선암 마애불. 남산에서 가장 먼저 햇빛과 달빛을 맞이하는 이 부처님의 모습을 ‘대상’이고 ‘허상’이라 치부해 버린다면 우리는 이 장엄한 상호에서조차 아무것도 얻는 바가 없을 것이다. 유상유식론을 예술에 대입해 보자. 우리 앞에 있는 대상은 우리의 의식이 변화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똑같은 달이라 하더라도 어떤 이는 그에서 ‘관음보살’이나 ‘해인삼매’를 읽어내고 이를 향가와 같은 예술작품으로 표현하지만, 바로 거기서 차창룡 같은 시인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를 읽고 이를 ‘목탁 16-거미’와 같은 시로 형상화한다. 경주 남산 칠불암 뒤로 깎아지른 벼랑이 있고 이 절벽을 오르면 신선암 마애불이 있다. 이 부처는 진여에 이르려는
유상유식론은 흐드러진 꽃과 꽃을 바라보는 나를 긍정하므로써 예술의 여지를 열어 놓았다. 강진 백련사=최호승 기자 봄날이다. 들에, 산에 꽃들이 흐드러졌다. 잔설 사이로 복수초가 살짝 고개를 내밀더니, 산수유가 절로, 코숭이로 가는 길에 연초록 점묘화를 그리고, 어느새 진달래가 연분홍 빛 수를 놓았다. 갈색과 초록으로 수개월을 버티던 권태의 숲에 노랑, 분홍, 하양 점들이 꽃 잔치판을 벌이며 전혀 새로운 꿈을 꾸어보라 유혹한다. 이때가 되면 아무리 무뚝뚝한 이도 꽃잔치 판에 들면 절로 콧노래가 터져 나오고 저절로 엉덩이가 들먹거리고 어깨가 들썩여 봄날의 감흥에 젖는다. 그 장면을 보며 어찌 아름답다 하지 않으리? 오온서 벗어나야 진여실체 보여 우리는 숱한 대상과 마주친다. 대
일곱부처 앞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로 회통한다 경주 남산의 칠불암은 자연을 끌어들여 작품의 일부분으로 만들고 있다. 일곱부처가 빚어내는 만다라는 신라를 불국토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바쁜 삶에 여백이 생길 때마다 눈에 어른거리는 경주 남산! 설악처럼 아름답지도, 지리처럼 웅장하지도, 한라처럼 높지도 않다. 금오봉의 높이는 468미터, 고위봉의 높이는 494미터요, 동서로 4킬로미터에 남북으로 10킬로쯤 되는 작은 산이다. 하지만 2천여년 전 그곳은 극락정토였고 도솔천이었으며 연화장이었다. 수많은 신들이 내려와 바위에, 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사람들에게 나타나 지혜의 말씀을 전하고는 다시 그곳으로 사라졌고, 불교가 들어온 이후엔 부처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삼국유사』의 감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봉은사 미륵대불의 발 아래에서도 찰나의 순간마다 회통하고 있다. 예술은 대상을 바탕으로 한다. 대상이 없으면 이에 대한 사유나 표현이 없다. 예술에서 모든 생각과 상상의 원천은 대상이다. 꽃이 없다면 꽃의 아름다움을 그린 그림은 존재하지 않으며, 별이 없다면 별을 보고 현실의 고통을 희망과 이상으로 승화시킨 시도, 그를 바탕으로 천사들이 별나라를 오고가는 상상도 존재하지 못한다. 하지만, 불교는 대상을 부정한다. 대상은 모두 자성(自性)이 없이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공(空)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 의존하며 서로 조건이 된다. 『잡아함경(雜阿含經)』의 말씀대로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일어난
이제 인언견언론에 따라 실제 불교미술을 감상해보자. 석굴암 본존불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다. 그 당시 필자에게 무슨 심미안이 있었겠는가. 사춘기의 호기심으로, 혹은 수학여행의 들뜸으로 교과서에서 본 ‘조상의 빛나는 업적’을 눈으로 확인하자는 심사 이상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막상 본존불과 마주쳤을 때, 그런 얼치기 문외한이 보더라도 그것은 왠지 모를 감동과 충격에 휩싸이게 하였다. 나도 모르게 거룩함에 압도당하여 오랜 동안 멍 하니 서 있었다. 그 감동은 세포에 간직되어 기억되다가 다시 본존불 앞에 설 때마다, 아니면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감동의 불씨를 지핀다. 어른이 되어 심미안이 깊어진 대신 불상이 멀어졌다. 다시 본존불 앞에 섰을 땐 두터운 유리벽이 막아섰다. 그 바람에 오늘 쓰는 글
형상은 실체 담은 그릇…강 건너는 뗏목과 같아 형상화된 불상은 분명 불법을 왜곡하고 은폐하지만 그 속에 담긴 창조성은 불법의 한 자락을 드러내는 방편이 된다. 불법(佛法)이란 인간의 말이나 의식으로 다다를 수 없는 진여실체(眞如實體)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는 “가히 도라고 이르는 도는 늘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며 도(道)의 ‘헤아릴 수 없고 다다를 수 없음’을 강조하는 도가(道家)의 사유를 만나면서 이 점이 더욱 심화하였다. 마침내, 선(禪)에 이르러서는 불입문자(不立文字)와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한다. 이처럼 궁극의 진리란 불가언설(不可言說)이고 이언절려(離言絶慮)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그러면 불가사의한 진여실체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
언어 밖 진여실체니 진리 담은 작품이란 당초 불가능하다? 언어는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이지만 그 자체는 아니다. 목어는 물고기처럼 생겼지만 나무일 뿐이고 그것마저 썩어버리면 나무라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속엔 분명 부처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나는 오늘 봄날의 산자락을 답청한다. 코숭이를 돌아가는 길가에 핀 산수유가 아름답다. 아직 겨울 색이 짙은 산야를 연노란 점들로 수놓아 봄의 빛과 기운으로 가슴을 채우게 하는 그 질박하면서도 당찬 모습에 흠씬 빠져 있다. 그 꽃의 이름조차 모르던 시절에도 그 꽃은 아름다웠다. 그 꽃이 몸에 좋은 지 좋지 않은 지, 그 열매를 먹으면 몸이 좋아지고 열이 내린다는 사실을 모르던 시절에도 산수유는 소년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