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화가’의 ‘진달래꽃’은 ‘미’를 상징한다. 신라인이 미를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헌화가는 사랑노래이기보다 화엄의 이상을 구현한 노래다. 사진은 불교사진연합회 조현숙 부회장의 ‘장엄’. 붉은 바위가에/잡고있는 어미소 놓으시고/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신라 성덕왕(聖德王: 702~737) 때 견우노옹이 수로에게 꽃을 바치며 부른 노래이다. 『삼국유사』, 「수로부인」 조엔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이를 풀어서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순정공, 강릉 태수 부임하러 서라벌을 떠나, 시종 데리고 동해변 따라 길을 청했는데, 진초록빛 바닷물에 넋을 빼고 혼을 앗기다가 시장기 느꼈는데, 좌우로는 천길 석벽 까마득,
참회하지 않는 한 죄는 계속 되풀이 된다. 철저한 성찰과 참회를 거듭하는 까닭은 그 죄를 다시 범하지 않는 인간으로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함이다. 절 안팎이 시끄럽다. 조계종은 더 이상 승가공동체가 아니다. 석가모니께서는 스님들에게 탁발을 하여 빌어먹을 것이요 소유할 것은 발우와 가사 세 벌이며 이 또한 다른 승려에게 넘겨주고 무소유의 삶을 살라 일렀다. 하지만 상당수의 승려들이 수백 억 원의 돈과 수만 평의 땅을 가지고도 모자라 더 많이 얻고자 같은 승려를 해하는 일이 다반사다. 미물이라도 절대 죽여서는 안 되는 불살생이 계율 중에서 가장 지엄한 계율이거늘, 공중파 방송에 나와 상대방 승려의 목을 따겠다는 말을 태연자약하게 한다. 한 티끌의 욕망마저 버리고 버려
한가한 여름의 정적을 깨는 매미 소리. 하지만 정적은 깨지는 것이 아니라 소란한 매미소리 속으로 스며들 뿐이다. 출장 일로 엿새만에 집에 오니 서재 창밖으로 불이 붙었다. 가을의 절정에 서서 무상감에 함뿍 젖었다가 지난 여름을 추억하니 매미소리가 들린다. 매미는 정녕 사라지고 없는데 귓가엔 매미소리가 더욱 시끄럽다. 한적(閑寂)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아미 소리(閑かさや岩にしみ入る蟬の聲) 일본 최고의 하이쿠 시인인 마츠오 바쇼오(松尾芭蕉: 1644∼1694)가 동북지방의 입석사(立石寺)에서 지었다는 하이쿠다. 계절마다 만나게 되는 사물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 낱말로 압축한 시어인 계어는 ‘매미’로 매미 울음소리 들리는 한적한 산사가 배경 이미지 내지 맥락을 형
모든 것이 변하여 공하지만 공을 깨닫는 그 순간, 변하는 원리만은 공하지 않음을 안다. 제법 가을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아침에 책상에 자리를 잡을라치면 소매 속으로 깃드는 기운이 차서 소름이 돋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관악은 반년이나 동색이던 초록이 부끄러웠던지 곧 고운 때깔로 새로운 채비를 할 태세다. 며칠만 지나면 저 산도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리라. 장님에게 단풍의 고운 색들을 어떻게 알려줄까. 그에게 아주 고운 빨강 빛으로 물든 단풍잎을 한 다발 가져간다 하더라도 그는 그 빛을 알지 못한다. 다시 붉은 빛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붉은 깃발과 붉은 피와 붉은 사과를 손에 쥐어준다 하더라도 그는 깃발의 보드라움과 피의 끈적끈적함, 사과의 향긋한 향내만 느낄 뿐이다.
달 스스로 아무런 본질도, 존재의 실재도 나타낼 수 없으니 공하다.(無自性) 달은 또 그대로 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차고 기울며 오늘 하루의 반달도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한다.(無常) 달은 달 스스로 달인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투사한 것이자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삼라만상을 갈라 그리 부른 것이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 달이 밝다고 노래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이 만들어 낸 생각일 뿐이다. 추석이 훌쩍 지났다. 하늘에 달이 보이지 않으니 벌써 달이 그립다. 한민족은 집단무의식적으로 달을 좋아하고 그리워한다. 님의 얼굴이 달이고 달이 님인 사람에게, 더구나 그 님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이에게 달은 더욱 그리움의 표상이다. 달을 소재
경주 남산 삼화령 연좌대. 직경 2m에 이르는 이 연좌대 위에는 커다란 미륵불상이 있었고 신라 경덕왕 24년인 765년 3월 3일 충담사는 여기서 다공양을 한 후 서라벌 시내로 향하다 반월성 귀정문 앞에서 경덕왕에게 불려가 안민가를 부르게 된다. 임금은 아비여/신하는 사랑하시는 어미여/백성은 어린 아이라 할 때/백성이 사랑을 알리라//탄식하는 뭇 창생/이를 먹여 다스릴러라/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실진대/나라를 보존할 길 아노라//아,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나라 태평하리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대에 백성들의 삶은 곤고하였다. 가뭄, 지진, 태풍, 혜성, 메뚜기 떼 출현 등 신라 역사상 가장 천재지변이 심한 시대였다. 이에도 불구하
단 1초 사이에도 인간의 얼굴을 구성하는 세포는 헤아릴 수 없는 생멸의 변화를 갖는다. 그 속에서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아주 오래 전 뒷산 관악 기슭 약수터에 갔다. 시간이 좀 허락하는 날이면, 약수터 옆 숲 속에 꽤 넓직한 바위가 있어 그에 올라 선정을 하다 가곤하였다. 그날도 여유가 있어 바위에 올라 가부좌를 틀었다. 얼핏 바람결에 모락모락 인분 냄새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냄새나는 곳을 향하니 풀 사이로 인분 앙금이 보였다. 누구인가 약수터에 왔다가 급했던 모양이다. 처음엔 머리를 돌렸다. 가만히 보니 인분에 뿌리가 닿아있는 민들레와 질경이가 다른 풀보다 키도 크고 때깔도 좋았다. 그때 느낀 것이 있어 지은 시다. 똥처럼 살 일이
사바세계를 고해라고 하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 그 지중한 인연은 험난한 삶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이자 의지처가 되어 준다. 연기론은 시간에 관련된 인과관계에서 공간, 대상과 대상 사이의 인과론으로 영역을 넓힌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 의존하며 서로 조건이 된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은 저것의 조건이 되고 저것 또한 이것의 조건이 된다. 결과가 없는 원인이 없으며 원인이 없는 결과 또한 없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저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홀로 존재하는 것도,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아주 짧은 시, ‘섬’ 전문이다. 짧지만 음미할수록
수행자와 장애인. 아무 관계도 없어보이지만 이 두사람 사이에도 특별한 인과가 존재하고 있다. 불교철학에서 한 낱말만 남기라고 한다면 아마 많은 분들이 ‘연기’라고 대답할 것이다. 『잡아함경』의 말씀대로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일어난다.” 동쪽은 스스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서쪽과 ‘관계, 차이, 구조’ 속에서 “해가 뜨는 쪽”, “기세가 상승함” 등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실체를 보려 하지만, 모두 허상일 뿐, 거기 관계만 존재한다. 원인이 없는 결과란 없다. 개미가 기어가고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그 순간에도 온 우주, 온 우주의 생명체와 사물들이 관계한다. 하루라는 오늘/오늘이라는 이 하루에//뜨는 해도 다 보고/지는 해도 다
‘킬링필드’의 주인공 폴 포트가 캄보디아 인구 4분의 1을 죽음으로 내몰게 된 이면에는 타자를 배척함으로써 소수의 동질성을 지키려는 무모한 욕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차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다른 것을 만나서 그것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킨다.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 안에서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내가 타자가 되는 것이 변동어이의 차이다. ” 나는 없는데 내가 있다고 집착하면 타인의 욕망을 점유하고 그들을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면서 나를 지키고 강화하려 한다. 하지만, 내가 없다며 나를 버리면 나는 타인을 위해 오히려 나의 욕망을 절제하며 그를 그답게 하여 거꾸로 나를 존재하게 한다. 이런 역설을 이
메마른 강에어김없이 눈은 찾아와물길 따라 물향내 따라 나래짓하는데어느 샌가 왜바람 한 줄기눈송이, 송이 이 기슭 저 펄로밀어내고 내쫓고 내동댕이치다가아예 살얼음을 얼려놓았어도눈은,강가의 미관과 이별하느라 잠깐파르르 떨었을 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한 마디 말도 없이하나 둘 떨어져 강물을 이루누나. - 임진강에서 2 눈은 온갖 경계와 구분을 무너뜨려 하나로 만든다. 사진은 중국 항주 서호의 눈 내린 겨울 풍경. 필자가 임진강에서 지은 연작시 가운데 하나, ‘임진강에서2’이다. 자비 편에서 소개한 안도현 시인의 ‘겨울 강가에서’처럼 눈이 강물로 떨어져 녹는 것을 소재로 한 것은 같다. 하지만, 안도현의 시가 서양의 이항대립적 사고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
불교는 세상을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 관계를 모색하는 이가 수행자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려다보면 내 몸이 보이고, 들여다보면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는 내가 있고, 올려다보면 꿈을 꾸는 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아는가, 뭐라 말할 수 있는가?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한 줄 시를 적어볼까./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대학 노트를 끼고/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인생은 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