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백중(百衆)이 지났다. 음력 7월 15일, 우란분절(盂蘭盆節) 혹은 우란분재(盂蘭盆齋)라고도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죽은 조상들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는 날로 인식되고 있지만, 원래 이 날은 불교도에게 있어 좀 더 특별한 날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의 종교가들은 대부분 유행(遊行)생활을 했는데, 우기만은 한 곳에 정주하며 보냈다. 그 이유는 우기에는 풀들이 새싹을 틔우는 등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시기이므로, 이 때 수행자들이 유행을 계속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풀이나 벌레들을 밟아 죽일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당시의 이런 관습을 받아들여 우안거(雨安居), 즉 우기 3개월 동안 한 곳에 정착하도록 가르치셨다. 이 우안거는 보통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이다. 스님들은 안거 기간 동안
한국 불교교단에서 육식 문제가 곧잘 논쟁거리로 떠오르는 것을 보며, 예나 지금이나 육식은 불교도들에게 있어 큰 화두거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3회에 걸쳐 살펴 본 바와 같이, 육식은 인도불교의 역사에서만도 매우 복잡한 변화 과정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육식이라는 행위가 그 만큼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면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불교도들은 육식을 해야 하는 것일까 말아야 하는 것일까. 가능하다면 육식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가축류가 어떤 환경에서 길러지고 있는지 관심 있게 들여다본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심으로 육식을 피하고 싶어질 것이다. 좁은 새장 안에서 평생 날개 한 번 제
육식에 여러 가지 제한을 가하면서도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던 부파교단과는 달리, 대승불교에서는 육식 금지를 설하는 경전들이 다수 등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열반경』, 『능가경』, 『범망경』등은 단호하게 육식 금지를 주장하는 대표 경전들이다.『열반경』에서는 탁발한 음식에 고기가 섞여 있다면 물로 씻어 고기를 제거하고 먹어야 하며, 너무 많은 고기가 들어 있을 경우에는 받지 말아야 한다고 설한다. 이는 분명 초기불교나 부파불교의 입장과 상반되는 것으로, 육식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엿볼 수 있다. 『능가경』에서도‘성스러운 자는 보통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지 않으니, 하물며 부적당한 고기나 피로 물든 음식을 먹겠느냐’고 하며, 나아가‘각각의 생존에 있어 일체중생이 친족, 권속이라는 생각을 품고 일체중생을
초기불교는 분명 육식을 허용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부파불교에 이르러 점차 육식에 대한 부분적인 제한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대승불교에서는 특히 여래장계의 경전을 중심으로 육식을 완전히 금지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인도불교의 역사에서 나타난 육식에 관한 이와 같은 입장 변화, 그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부파불교에서 나타난 육식 제한의 입장부터 보자. 현존하는 각 부파의 율장(律藏)을 보면, 육식에 대한 태도 변화가 흥미롭게 드러난다. 물론 이 시대는 초기불교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기본적으로 육식을 허용하는 입장이었다. 단, 여러 가지 면에서 조금씩 제한되어 가는 경향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불교승단이 당시 일반사회의 눈이나 평판을 의식한 결과라는 점에서 그 사회적 배경
요즈음 웰빙, 혹은 참살이라는 말의 등장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선호하고 있다. 가정의 식탁에도 신선한 야채가 풍성하게 올려지고, 곳곳에 생긴 채식 뷔페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한때는 단백질의 중요 공급원으로서 섭취가 권장되던 고기나 생선이지만, 지나친 섭취는 건강에 해롭다는, 아니 가능하면 완전히 끊고 철저한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는 것이 건강에 유익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제 육식은 일반사람들에게도 고민스러운 먹거리가 된 것 같다. 하물며 불교도의 경우에는 불살생이나 자비, 불성 등과 같은 불교 교리와 정면으로 맞물려 있어 육식에 대해 더 큰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육식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어떤 것일까? 불교는 육식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종교일까?
때로는 배우는 입장으로, 또 때로는 가르치는 입장으로 오랜 세월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다. 선생과 제자라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경험하며 양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그들의 시선 뒤에 담겨 있을 평가가 슬쩍 마음에 걸릴 때가 있다. 나의 스승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또 내 학생들의 눈에 나는 어떤 선생으로 비추어졌을까 등등, 뭐 일종의 자기반성 같은 것이다. 그런데 돌아볼 때마다 한 구석 찜찜한 것을 보면, 필자는 아마 좋은 학생도 좋은 선생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스스로는 변변치 못한 학생이자 선생이었지만, 운 좋게도 훌륭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많았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좋은 스승의 모범으로 삼고 있는 분이 있다. 바로 필자가 일본 동경대학에서 유학하던 당시
최근 우리 사회의 노사관계가 이랜드사태와 연세 세브란스 병원 노조파업으로 상징되는 비정규직문제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정부는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정규직으로 2년을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법률을 제정 시행하였다. 하지만 기업은 임금부담을 이유로 2년이 되면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통고하여 사실상 해고 하는 편법을 취했고, 이에 대해 근로자들이 파업과 집단행동으로 대항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지금처럼 취업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기업은 정규직 전환보다는 계약 해지를 통고하는 방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면 법률만으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고, 기업주와 근로자의 대립적이고 갈등적인 관계를 해소하고 상생 관계를 정착시킬 보
헤아려 보니, 그 동안‘친구’라는 이름으로 만난 이들이 두 세 자리 숫자로는 모자랄 만큼 많은 것 같다. 친구란 생각하기에 따라 정말 폭넓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나이, 성별, 신분, 국적 등 아무 상관없다. 서로 친근감 내지 호감을 느껴 마음을 트면 그것이 친구인 것이다. 예전에 어떤 선생님이 자신의 지인들에게 필자를 소개하며 ‘내 친구 이자랑 선생이야’라고 했다. 10살이 훨씬 넘는 나이 차이는 놔두고라도, 그 훌륭한 학문적 성과에 평소 존경의 마음을 갖고 우러러보는 대상이었기에 순간 몹시 당황스러웠다. 동시에, 자신의 제자를 스스럼없이 남에게 친구라는 말로 소개할 수 있는 그 분의 마음 폭에 적지 않은 감동을 느꼈던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 말은 서로 간에 존재하는 어색함과
“우리는 자식들이 태어나는 것을 기뻐하고, 또 그들의 성장을 기원했건만, 그들은 처와 짜고 우리를 돼지처럼 내모는구나. 예전에는 우리를‘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건만, 알고 보니 자식의 모습을 한 악귀였구나. 그들은 나이든 우리를 버렸다. 늙어 아무런 쓸모없이 되어버린 말이 음식을 얻지 못하듯, 우리 늙은이들은 타인의 집에서 음식을 구걸하는구나. 따르지 않는 자식들을 갖는 것 보다, 우리에게는 지팡이가 낫다. 사나운 소도 쫓아버리고, 사나운 개도 쫓아버리고, 또 어둠속에서는 우리 앞에 있어주고, 깊은 곳에서는 발 디딜 곳을 만들어 준다. 넘어져도 지팡이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는구나.” 자식으로부터 버림받은 노인의 절망어린 슬픔이 절절하게 배어나오는 시다. 이 시는 한때 부유했던 한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와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올바른 삶일까? 재가불자로서, 아니 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는 경전이 있으니, 바로「싱갈라에게 가르친 경」(SiGgAlovA da-suttanta)이다. 『디가니까야』제31경에 해당하는 이 경전에 대해, 5세기경 남방불교의 대학자인 붓다고사는“이 경전에서는 가장(家長)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모든 행위를 설하고 있다. 이 경전을 가장의 율이라 하니, 만약 이 경전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실행한다면, 번영만이 있으며 쇠퇴는 없다”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금도 남방불교국가에서는 세속인을 위한 삶의 지침을 담은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매우 중시되고 있다. 내용은 약간 다르지만, 『장아함경
산 자와 죽은 자. 인간의 삶에 있어 이 보다 더 가슴 아프고 애달픈 관계가 있을까? 더욱이 그것이 만약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혹은 그에 비유할 만한 소중한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이라면, 그 공허하고 아득한 양자 간의 거리감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특히 산 자에게 있어 죽음은 미지의 세계이다. 도대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그래서 불안하다. 혹시 고픈 배를 움켜쥐고 추위에 떨며 지천을 떠돌아다니고 있지는 않는지, 혹은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고 있지는 않은지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가슴이 저려온다. 그래서일까. 산 자는 죽은 자의 편안한 또 다른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고 싶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교의 사제들은
‘생활 습관병은 사실은 자기관리 결함병입니다.’ 현재 미국 알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의 외과 교수로 있는 신야 히로미(新谷弘實) 교수가『병에 걸리지 않는 삶』이라는 책에서 하고 있는 말이다. 위장내시경 외과의인 저자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30만 명의 위장 내시경을 통해 얻은 임상 결과에 근거해서 저술한 이 책은, 일본에서만 100만부가 넘게 팔리며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필자도 이 책, 그리고 올해 나온 ‘2 실천편’을 읽으며 인간의 심신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에‘명의란 정말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라며 감동했다. 그는, 인간은 본래 병에 걸리지 않고 천수를 누리도록 만들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잘못 길들여진 갖가지 습관에 얽매여 자신의 건강을 좀먹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