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학 개론 지금껏 만나온 스님들 가운데 불교대학 졸업 후 무얼 할거냐 물으면 대부분 “선방 가야죠”라고 대답한다. 한국 스님들에게 포교는 항상 2순위, 3순위다. 포교에 대한 절박함이 없다. 개신교계는 이미 포화상태가 된 한반도이기에 신학대학 졸업생들에게 해외포교를 적극 권장한다. 강제는 아니지만 꼭 필요한 사람만 국내에 남아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 해외에 눈을 돌리라 권장한다. 그래서인지 현재까지 수만명이 해외에 파견돼 미국에 이어 세계 제2 선교사 파견국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국내에서 선교를 하다 안 되면 개척교회를 하고, 택시운전까지도 불사하는 신학대학 졸업생들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들은 절박한 상황에 배수진을 치고 선교를 한다
▲포교학 개론 종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인생의 나침반을 선정한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인생 방향타의 선택은 얼마나 중요한가. 종교를 어머니, 아버지, 조상님들로부터 자연스레 물려받은 경우는 크게 얘깃거리가 될 게 없다. 그러나 종교가 없던 사람이 또는 타종교인이 개종을 한다거나 종교를 선택한다 할 경우 그들의 선택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종교사회학에서는 물질 만능의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탈종교적인 분위기가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고 말한다. 미국이나 유럽도 그런 분위기가 지배적이라 듣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타종교가 어려워서인지 불교가 어느 정도 안정세를 찾기 시작한 2000년대부터 개신교와의 갈등 양상이 점차 심화돼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포교학 개론' 포교를 얘기할 때 설법이라는 말도 함께 쓰게 된다. 부처님의 설법 양식을 모델로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포교 방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포교에 굳이 방법론을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얘기를 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효과적인 포교를 위해 부처님께서 즐겨 쓰신 설법의 양식을 생각해 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부처님은 찾아온 사람들만을 제도하고 포교하신 분이 아니다. 직접 중생들을 찾아 나서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신 분이다. “나도 우루벨라의 장군 마을로 가련다” 하신 포교선언대로 끝없이 걸어다니신 분이시다. 또 대상자의 근기와 능력에 따라 그에 부합한 내용을 설하셨다. ‘응병여약’이라 하듯이 스스로를
▲포교학 개론. 우리는 성불의 그날까지 얼마나 많은 지옥을 거쳐야 하는가.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악마와 싸우셨다. 하물며 미물중생인 우리들은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세월을 악도를 거치며 살아야할까. 과거 여론조사에 의하면 불자의 50.9%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절에 다닌다고 했다. 물론 고달프고 가파른 인생길에서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절에 나온다는 대답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 같은 차원을 넘어 신도들을 좀 더 용기 있고 강하게 연단해야한다. 불교를 흔히 구도의 종교라 하지 않는가. 구도자의 행로가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인가. 성불의 길, 깨달음의 길은 대단히 치열하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절에 나온다지만 우리네 삶은 본질적
▲포교학 개론 삼성의 총수가 “자칫하면 삼성도 십년 내에 구멍가게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사람들은 그 말의 참뜻을 얼마나 이해했을까. 괜히 엄살을 떠는 얘기라거나 직원들을 겁주려고 한 얘기가 아닌가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삼성을 능가하는 대기업 노키아를 잘 알 것이다. 얼마 전 보도를 보면 노키아가 시대흐름을 잘못 읽어 존망의 기로에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참으로 엄청난 얘기다. 한순간 아차하면 순간에 나락에 떨어질 수 있음을 수많은 기업의 흥망사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조그만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고민이 거대 기업 총수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커진다는 것은 그 만큼 크나큰 문제와 만나야만
▲포교학 개론 삼세제불보살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성불의 길은 무한고행의 길이다. 중도란 가르침 역시 과도하지 않은 수행과 고행의 뜻을 담고 있다. 거문고의 비유가 그를 대변한다. 결국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 고행한 자가, 수행한 자가 성불의 길을 앞당길 수 있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고행을 극복하면 할수록 부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 편안하려하지 말라. 공덕을 까먹는다. 몸과 마음을 다해 항상 갈고 닦으라하신 부처님 말씀을 명심해야한다. 생각은 명확히 물질임을 알라. 자기가 갈고 닦은 만큼의 작품이 나온다. 고행한 만큼 수행한 만큼 능력이 배양된다. 포교에 몸을 던진 자는 그래서 몸과 마음을 다해 정진해야한다. 갖가지 고행과 난행을 이겨낸 만큼의
▲포교학 개론 최근 교계신문에 조계종 종회의원 일문 스님이 재가불자들에게 사찰이나 종단에서 확실한 위치를 부여하고 그들의 능력을 십분 활용해야한다는 내용의 얘기를 해서 큰 호응을 얻었다는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다. 그 같은 주장을 펴는 스님이나 재가불자들은 과거부터 계속 있어왔으나 별반 변한 게 없는 듯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 시대, 유독 불교계만 변화에 초연한 것은 후진적 시스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많다. 최근 서구에는 새로운 트렌드로 불교인구가 늘고 있다. 심리학, 의학, 물리학 분야를 비롯해 명상 등의 분야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세계적 추세 속에서 불교계도 그에 걸맞는 변화가 있어야할 것이다.
▲포교학 개론 종교를 3차산업이라 부른 학자가 있었다. 종교가 서비스업이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종교가 서비스업이란 얘기에 반기를 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이야기도 한번쯤은 음미하고 넘어갈 대목이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종교 자체가 중생의 해탈을 위해 존재한다고 한다면 분명 그 누구도 부처님처럼 무량중생들을 위한 중생제도 정신에 유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세속의 대통령도 스스로를 국민의 심부름꾼이라 부른다. 대재벌도 결국은 무량중생들에게 잘 팔리는 물건을 만들어야 돈을 벌 것이다. 중생들을 위한 서비스를 하지 않는 개인이나 단체가 도대체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겠는가. 모두가 모두를 위한 서비스맨들이다. 종교도 예외일 수 없다. 종교
▲포교학 개론 포교는 신심을 키워 몸과 마음을 다해 보살의 삶을 살고 성불의 길을 걷자는 것이다. 성불의 길 가운데 신심의 촉발 내지는 강화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그 무엇을 해도, 그 어떤 수행을 해도 항상 거론되는 것이 강한 신심이다. 대체 신심이란 무엇이며 신심을 확고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또 신심은 과연 어떤 내용이며 어떻게 자라게 해야 할까. 신심이 강해야 법당에도 자주 나오고 부처님을 자주 찾게 된다. 신심의 중요함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신심이 중요함은 잘 알지만 어떤 경우에 신심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자. “내가 너를 믿는다”는 얘기를 한 번 음미해보자. 이 광활한 우주는 혼자서 살수는 없는 세상, 그 누군가의 도움이
▲포교학 개론 현실과 영원의 접점은 어디일까? 엘리아데의 얘기가 아니더라도 종교에서 의식(ritual)은 속(俗)에서 성(聖)의 세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통과의례다. 종교에서 의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종교자체가 의식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인들 가운데 의식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이 현실과 영원의 접점이라면 종교의식을 통한 한 생각이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는 분수령이라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 등장하는 갖가지 의식에 대한 연구는 이 같은 점에 있어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각종 의식으로 종교행위가 성립하고, 그 같은 의식이 종교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라면 의식은 얼마나 중요한
▲포교학 개론 스필버그에게 기자들이 물었다. “당신의 영화 소재는 특이하다. 어디서 영화의 소재를 찾는가?” “나는 인간의 공통적인 관심사에 대해 주목한다. 인류 공통의 관심사라면 죽음과 영혼의 문제 그리고 저 하늘에 빛나는 별들과의 상관관계 아닌가. 그들이 인간의 영혼을 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가.” 거장다운 대답이다. 그래서 쉰들러 리스트가 나왔고 ET라는 영화가 나왔다. 선방수좌들에게 참선의 궁극을 물으면 두말 할 나위 없이 생사해탈, 생사요달, 견성성불이라 대답한다. 죽음의 극복이야말로 불교의 근본과제 중 하나요. 생사요달, 생사해탈의 문제는 모든 수행자들의 공통과제다. 포교에 있어서도 죽음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선결과제다. 이 땅을
포교를 하면서 대단히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통찰이다. 불교는 마음을 바탕으로 전개되는데 마음은 보이지 않는 차원이면서 현실과 영원을 관통한다. 자연히 삶과 죽음의 문제가 함께 다뤄질 수밖에 없다. “생사일여(生死一如)”라 하신 부처님 말씀이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예에서와 같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는 하나인 것이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 함께 다룰 것인가.현실의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후세계 영가들의 문제, 중음신 내지는 귀신들로 불리는 보이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