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혈사(西穴寺)는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망월산의 동쪽 중턱에 있었던 사찰이다. 문헌상의 자료가 전해지지 않아 절의 창건이나 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동국여지승람’과 ‘범우고’에 의하면, 서혈사는 풍수의 비보설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공주지역에 있는 동혈사(東穴寺), 남혈사(南穴寺), 주미사(舟尾寺)와 함께 백제시대의 4혈사(四穴寺) 중 하나였다고 한다. 1530년에 증수,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7에는 ‘서혈사는 망월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전기까지 존속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에 간행
경상북도 김천 청암사(靑巖寺)는 ‘사적비’에 의하면, 859년(신라 헌덕왕 3)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쌍계사, 수도사와 함께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수도암은 청암사의 부속암자로 합천 가야산과 맞닿아 있는 수도산에 위치해 있으며, 도선국사의 비보(裨補)사찰로 지형적 의미가 크다. 사찰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깊은 산골에 위치해 있고 스님들이 수도하는 곳이라 그런지 고즈넉하면서 사찰다운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다. 청암사 수도암 대적광전에 봉안된 석조비로자나불상은 9세기경에 경상북도 거창군 가북면 북석리에서 조성한 것이라 한다. 한 노승
경상북도 영주 비로사(毘盧寺)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활동했던 진공대사(眞空大師, 869∼940년)가 중창한 곳으로 매우 오래된 절이다. 비로사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상과 함께 아미타불상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는데 종래에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배치 형식이다.(사진 1, 2) 이 두 불상이 처음부터 함께 봉안되었는지, 아니면 각각 다른 법당에 있었던 것을 나중에 옮겨온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비로사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원래 호분이 두껍게 칠해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 위에 금이 입혀져 이전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아담한 크
석탑에 불·보살상을 비롯하여 사천왕, 인왕, 팔부중과 같은 신장상을 조각하여 장엄하는 것은 인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부처의 사리(舍利)를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탑의 부조상들과 구별되게 초층탑신의 면석에 불교의 방위불인 사방불을 조각한 것은 탑의 중심인 비로자나불을 상징적으로 포함하는 오방불의 개념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탑의 부조상이 사리 수호나 공양의 의미 보다는 예배불로서 신앙의 중심이 되었으며 동시에 신앙의 주체가 탑에서 불상으로 옮겨졌음을 상징한다.사방세계를 대표하면서 불교 수호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는 사방불은 불
정통적인 밀교의 오방불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 있는 예는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일월봉 정상 가까이에 위치한 사면불상에서 볼 수 있다. 1995년 8월7일 군사보호구역 문화재학술조사에서 발견된 것으로 현재는 바위 표면에 이끼가 많이 끼었을 뿐 아니라 풍화가 심하게 진행되어 불상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곳은 6·25 때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격전지로 지금도 민간인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DMZ 지역에 해당된다. 높이 2m 정도의 커다란 장방형 바위 네 면에 불상이 각각 1구씩 얕게 선각되어 있다. 얼굴과 몸체부분이 심하게
대구시 동구 동화사(桐華寺) 비로암 삼층석탑의 초층탑신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은 현재 4매의 금동판으로 분리된 채 전해지고 있다. 1966년 가을 불국사 석가탑 도굴사건 직후 전국 각지의 석탑에서 도굴된 유물들을 국립박물관으로 압수하였을 때 이 금동판 4매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함께 나온 납석제 사리호(舍利壺)에는 ‘863년 9월 신라 민애대왕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사촌형제인 전지대덕 심지(心智)가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있는데, 금동사리함도 이때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화사 비로암 석탑의 금동사리함은 도굴로
경상북도 경주 불국사에 있는 석조비로자나삼존불상은 1970년 6월 불국사 토량처리공사를 하는 중 무설전(無說殿) 동북쪽 석축 아래에서 발견된 것이다. 본존불과 협시보살상들은 남아 있지 않고 대좌만 전해지고 있다. 현재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불국사 경내의 종각 근처 한쪽 편에 설치된 철책 안에 삼존불상의 대좌가 완전히 분리된 채 놓여 있다. 이는 협시보살의 대좌인 사자좌(獅子座)와 코끼리좌[象座], 그리고 본존불의 대좌였을 것으로 보이는 팔각연화대좌의 중대와 하대석 등이다. 언뜻 보면, 불상의 대좌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법수사(法水寺) 석조비로자나삼존불상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에 있는 법수사 절터에서 발견된 것이다. 1965년 경북대학교박물관으로 옮겨져 지금은 박물관 앞에 전시되어 있다. 법수사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830년을 전후한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된 대규모의 사찰로 고려시대에도 법등이 이어져 오다가 17세기 전반에는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법수사 절터는 997번 도로와 접해 있고 마을 내 경작지로 개간되었으나 삼층석탑과 대형의 연화대석, 와편 등이 남아 있다. 법수사지 비로자나삼존불상은 파손상태가 매우 심한 편으로 본존불인
예부터 강원도 강릉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한송사(寒松寺)는 강릉시의 동쪽 남항진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어 인근 경포대, 한송정과 함께 관동지방 여행에 빠지지 않을 만큼 경치가 뛰어난 곳이었다. 한송사의 창건과 연혁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고, 어느 때인가 완전히 폐사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9세기 말에 해일이 일어나 모든 것을 휩쓸고 갔다’고 한다. 이 한송사 절터에서 비로자나삼존불상의 협시보살로 보이는 보살좌상 2구와 대좌가 발견되어 주목된다. 특이하게도 재료가 일반적인 화강암이 아니라 강릉지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된 석조비로자나불상 2구는 강원도 원주에 있는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1구는 일제강점기 때 원주 호저면 절터에서 발견되어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되돌아온 것이고, 또 다른 1구는 원주 태장동 영전사(令傳寺) 절터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석조비로자나불상 2구는 크기나 특징 등에서 거의 유사하다. 얼굴이 몸에 비해 작고 상체가 짧은 편이라 안정감이 있으나, 목이 짧고 어깨가 각이 져있어 약간 움츠린 듯한 모습이다. 얼굴은 통통한 편이나 코 부분의 훼손이 심하여 전체 인상을 알 수 없다. 양쪽 어깨를 덮은 통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 경내에는 2007년 11월24일에 새로 건립된 대비로전(大毘盧殿)에 똑같은 여래 형식의 목조비로자나불상 2구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사진 1, 2) 이런 쌍둥이 불상 형식은 상당히 이례적인 예로 원래 법보전과 대적광전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이 목조비로자나불상 2구는 그동안 막연하게 조선 초기의 불상일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런데 2005년 6월 법보전 비로자나불상을 개금하던 중에 내부의 등 쪽에서 묵서명과 함께 다량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묵서명에 의해 883년(중화3년) 여름에 대각간(大角干) 부부가
광주시 동구 증심사(證心寺) 비로전에 안치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원래 광주 동구 광산동 전남도청 뒤편에 위치한 대황사(大皇寺) 절터에 있었던 것이다. 대황사에 대해서는 자세한 연혁을 알 수 없으나 ‘광주시사(光州市史)’(1966년)에 의하면, 11세기경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19세기경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비로자나불상과 석조보살입상, 7층 석탑은 1934년에 증심사로 옮겨왔고 현재 도청 안에는 석탑 부재와 석등만 남아 있다.증심사는 860년경 통일신라 때 철감국사 도윤(798∼868)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
강원도 홍천군 물걸리 절터에는 통일신라 후기의 석조비로자나불상이 전해오고 있다. 원래 이곳에는 통일신라 말에 개창된 홍양사(洪陽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2003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절터를 발굴, 조사하면서 기와·막새·자기·토기·금동불상 등 다량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금당이 있었던 자리도 확인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삼층석탑(보물 제545호)과 함께 1979년에 새로 지은 전각 안에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석조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석조대좌(보물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원래 봉안되었던 전각이 확실하지 않지만 20세기 초부터 극락전에 금동아미타불좌상과 함께 나란히 모셔져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불국사가 복원되면서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비로전(毘盧殿)에, 금동아미타불좌상은 극락전(極樂殿)에 따로 봉안하였다. 비로전의 주존불로 봉안된 금동비로자나불상은 광배와 대좌가 모두 결실된 상태로 불신만 남아 있다. 전반적으로 얼굴이 다리에 비해 작고 상체가 긴 편으로 불신의 양감이 줄어들었으나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보여준다. 머리 위의 높은 육계와 근엄한 얼굴, 법의의 자연스
대구 경북대학교박물관과 앞뜰에는 어느 절에서 가져왔는지 원 소재지를 알 수 없는 석조비로자나불상 5구가 놓여 있다. 대부분 출처 알 수 없고 파손된 이 비로자나불상들은 경상북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놓은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그중 경북대학교박물관 안에 전시중인 사암제 비로자나불상은 그나마 소장경위가 알려져 있다. 전하는 자료에 의하면, 불상의 대좌는 1936년 6월 울산 동면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 고미술 수집가인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소장하고 있다가 대구시립박물관으로 옮겼으며 한국전쟁
경기도 평택 심복사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후기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오래된 사찰로 짐작된다. 1988년에 편찬된 ‘기내사원지(畿內寺院誌)’에는 고려말 경기도 파주 문산포에 살던 천씨, 박씨, 문씨 등 세 노인이 고기잡이를 하다가 바닷속에서 석불좌상을 건져내고 꿈속에서 부처가 일러준 대로 파손된 배의 재목으로 절을 지어 불상을 모셨다고 하는 설화가 전해진다.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는 불상이 현재 대적광전에 봉안된 석조비로자나불상이다. 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상은 불신과 대좌를 갖추고
경상남도 밀양 얼음골은 아무리 더워도 얼음이 녹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천황사는 이 얼음골 입구에 위치해 있는데, 근래에 중창된 사찰이며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옛 절터가 남아 있다.밀양 천황사 대광명전에 봉안된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머리와 손부분이 크게 보수되었고 석질에서도 이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좌 중대석에 11마리의 사자(獅子)가 입체감 있게 조각된 점은 불상의 대좌로는 거의 유일한 예로, 특히 눈여겨 볼만하다. 원래 두 손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리고 있었으나 1998년 정밀조사 때 팔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축서사는 신라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사적기’ 등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연혁을 알 수 없다. 현재 보광전에 봉안된 석조비로자나불상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거하여 사리를 봉안하는 원탑의 건립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내의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납석제 사리호(舍利壺)의 표면과 밑면에는 탑을 세운 발원자와 건립연대, 장인 등과 관련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사리호는 석탑에서 발견된 이후 1912년경에 이 절의 노승이 가지고 있었는데, 1929년 일본인의 손에 넘어
대구 팔공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호에 의해 간접적으로 조성시기를 알 수 있다. 비로암 앞에 세워진 삼층석탑의 초층탑신에서 발견된 납석제 사리호(舍利壺)의 명문을 통해 석조비로자나불상은 863년 9월 신라 경문왕이 민애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삼층석탑을 건립하면서 함께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리호는 1966년 도굴꾼에게 절취되는 과정에서 일부 파손되어 명문의 전체 내용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비로암의 석탑과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게 된 내력은 짐작할 수 있다. 그 내용에는
강원도 철원 도피안사(到彼岸寺)는 865년(신라 경문왕 5)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부처에게 예배하고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성불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이 유래되었다. ‘피안에 이르는 절’이라는 이름 자체가 불교적이면서도 상당히 매혹적이다. 1898년에 화재로 불탄 후 중건된 도피안사는 한국전쟁 때 다시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철조비로자나불상만 땅 속에 묻힌 채 화재를 면하였다. 땅 속에 묻힌 불상은 1959년 봄 육군 제15사단에 의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당시 제15사단장이었던 이명재 장군은 사흘 밤 동안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