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 또한 여러 가지 식을 갖는다는 사실은 식물의 ‘인식능력’이나 ‘판단능력’에 대해, 결국 ‘사고능력’에 대해 쉽게 부정할 수 없음을 뜻한다. 동물적인 기원 속에서 생각하는 능력이란 판단하는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판단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대상을 수용하는 눈이나 귀, 코 등의 식에 대해 적절한 반응의 방식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식물뿐일까? 아메바나 박테리아 같은 이른바 ‘원생생물’ 또한 나름의 식을 갖고 있으며 인식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게 없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자기 나름의
식은 감각기관 가진 ‘나’라는주체의 인식으로 알고 있지만감각기관 개별 활동이 곧 ‘식’감각기관이 없어도 식은 존재“오직 식이 있을 뿐 대상은 없다(唯識無境)”고 주장하는 유식학(唯識學)이 아니어도, 불교에서 식(識)이란 말은 매우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무명을 조건으로 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조건으로 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名色)이 있고…”라고 하며 이어지는 12연기의 설법에서도 일찍부터 식이 등장하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식에 대해 말할 때도 식은 등장한다
외부에서 다가왔던 것은 지나가거나 물러서면 사라진다. 그러나 내부화된 것은 그것이 지나간 뒤에도 남으며, 물러선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겪은 마음들을 자기 내부에 기억하고 기록하여 두며, 그것에 따라 자신에게 다가올 사태를 예상하고 준비한다. 기근을 겪은 태아의 유전자가 기근을 예상하여 최대치로 영양소를 흡수하고 집적하는 능력을 가동시키고, 그런 식으로 살아남으려는 마음을 신체에 담아 지속시키듯이. 빛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의 눈이 금방 사라지지는 않듯이. 이는 ‘마음’이란 말로 표현되는, 신체를 움직여 반응하며 작용을 하고
일체유심조의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내게 다가와 나를 둘러싼 것들에 속한 마음이다. 음식에 마음이 속한다는 말이나 TV에 마음이 있다는 말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의식’이 아니다. 나의 마음이라고 할 때에도, 그것은 나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고, 그 행동에 의해 내가 만난 무언가에 작용하여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양파와 감자에 작용하여 잘게 자르도록 하고 섞어서 요리를 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면, 마찬가지로 나에게 작용하여 어떤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음이라고 해야 한다
불교적 사유를 요약하는 명제 중 하나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다. 비슷한 의미로 ‘마음’이란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마음과 무관하게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은 불교적 사유가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드는 것이니 마음먹기 달렸다. 그러니 마음 하나 고쳐먹으면 지금 여기가 바로 일승법계요 극락”이라는 말은, 굳이 절 근처에 가지 않아도 종종 듣게 되는 말이다.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지만 마음의 실체를 들여다 보면마음은 내 안에 있던 게 아닌외부 조건들과 만
모든 중생들에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덜어준다는 건 얼마나 아름답고 소박한 꿈인가? 그건 모든 이들이 서로 도우며 사는 세상만큼이나 아름답지만 소박한, 불가능한 몽상 아닌가?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사는 세상은 경쟁과 적대로 가득 차 있고, 심지어 가까이 이웃한 이들과도 다투고 충돌하는 걸 피할 수 없는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웃이라도 사랑하라고, 아니 가족이라도 좀 사랑하라고 호소해야 하는 게 차라리 현실적인 곳이 바로 세상 아닌가! 거기서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말이나, 모든 중생을 부처로 응대하고 부처로서의 우
자비도 사랑도 동정이나 연민으로 쉽게 오인된다. 그것은 남들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이 남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내는 감정적 요인이 되는 것이 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나를 넘어선’ 사랑, 혹은 ‘윤리’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가령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고통 받는 얼굴을 하고 있는 타인’들을 철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누군가 옆에서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 대개는 어느새 그 고통에 연민을 느끼며 그것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기에,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이질적이고 나와 멀리 떨어진 사람까지 사랑하는 건 어려워낯선 것도 차별 않는 게 자비불교를 상징하는 단어를 하나 말해보라고 하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자비’라고 말하지 않을까? 무아와 무상, 공 같은 개념들도 있지만, 이는 체득하기는 물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말인지라, 누구나 쉽게 이해할만한 말인 ‘자비’를 선택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자비란, 친구를 뜻하는 ‘mitra’에서 파생되었으니 ‘우정’과 근친성을 갖는 ‘maitri’를 번역한 ‘자(慈)’와 연인처럼 공감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karuna’를
윤회하는 수많은 생들의 긍정, 그것은 수많은 생을 반복하여 사는 힘의 긍정이다. 그때마다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살아내는 힘을 긍정하는 것이란 점에서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사상과 매우 가까이 있다. 극락이든 구원이든, 현세를 떠나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현세적 삶 안에 있으며, 그 삶을 긍정할 만한 것으로 사는 것임을 말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무아·윤회 모순으로 보이지만윤회란 영원한 시간 반복해돌아오는 무아라는 잠재력이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과정그런데 불사의 삶은 그가 살아가는 여러 생의 삶을 관통하
알다시피 윤회의 관념은 불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도의 전통종교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카스트라는 강력한 신분제가 있는 사회에서, 많은 경우 현재의 삶을, 날 때부터 고정된 신분과 직업을 갖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그것을 참고 견디며 살게 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현재의 네 삶은 과거에 네가 살아온 삶이 만들어낸 것이고, 미래의 네 삶은 지금 네가 사는 삶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 그래야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니 말야.’ 원래 ‘의지적 활동’을 뜻하는 ‘업’이란 말이 자신
보르헤스의 소설 ‘죽지 않는 사람들’은 불사의 삶이란 무언가를 다룬다. 로마 시대의 군단장이었던 주인공 마르코 플리미니오 루포는 불사의 강 하구에 있는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걸 찾아 나선다. 갖은 고초 끝에 드디어 그는 그 강물을 마시고 불사의 인간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이집트의 불락 교외에서 ‘아라비안나이트’의 어떤 얘기를 필사했고, 사마르칸다 감옥 마당에서 수없이 장기를 두었으며,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기도 하며 수많은 생을 살게 된다(‘죽지 않는 사람들’, ‘알렙’, 민음사, 13~35).윤회하
어떤 소리도 될 수 있는 잠재성이기에 어떤 소리도 아닌 ‘소리 자체’와, 우리의 귀를 끊임없이 울리며 오는 모든 소리들 전체, 여기서 진제와 속제의 둘 아닌 세계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여기에 하나의 체(體)와 수많은 상(相)들을, 그 상들의 다종다양한 용(用)을 대응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개념에 익숙한 이라면 실체의 한 속성과 수없이 많은 양태들의 세계를 재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어떤 사물이나 사람이든무엇으로 규정되는 순간본체 아닌 일부만 드러나잠재된 가능성까지 볼 때하나의 본체 이해하게 돼그런데 공성이 모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