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제법이 시간적으로 무량겁이 한순간이고 한순간이 무량겁이며, 삼세가 동일하고 구세 십세가 상즉함을 앞에서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로 인해 뒤섞여 어지럽지 않고 나뉘어져 따로 이룬다”고 한다. ‘법성게’ 제14구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이다.‘뒤섞여 어지럽지 않다[不雜亂]’는 것은 시간이 체가 없고 체가 없어 상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설잠 스님은 “체(體)가 있으면 곧 섞임이 있고 상(相)이 있으면 곧 어지러움이 있다. 체가 없으면 곧 상이 없는 까닭에 무용(無用)이 용(用)이 되고, 무용이 용이 되는 까닭에 그 용이 다
의상 스님이 시간[世時]을 기준으로 연기분을 설명하는 세 번째 구절이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이다. 이는 ‘법성게’ 제13구로서 “구세와 십세가 서로 상즉한다”는 것이다.의상 스님은 “구세십세호상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넷째 ‘시간[世時]을 기준으로 하여’라는 것은 이른바 구세는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 현재의 과거, 현재의 현재, 현재의 미래, 미래의 과거, 미래의 현재, 미래의 미래세이다. 삼세가 상즉하고 더불어 상입하여 그 일념을 이루니, 총과 별을 합하여 이름 붙인 까닭에 십세가 된다. 일념은
‘법성게’ 제12구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다. “일념이 곧 한량없는 먼 겁이다”라는 이 구절도 시간에 근거해서 연기존재가 상즉함을 밝힌 것이다. 순간이 곧 긴 세월인 염겁동시(念劫同時)이고 염겁평등의 무애경계이다.‘화엄경’은 전체적으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때[始成正覺]에 깨달으신 그 자리에서 깨달음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신 법문이라 할 수 있다.‘화엄경’의 설법처는 통틀어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7처를 법계에 펴셨다(不離樹下 羅七處於法界)’라고 일컬어지며 설법시는 성도하신지 얼마 안 된
‘법성게’에서 사법(事法)에 즉하여 밝히는 연기가 공간(空間)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면, 그 다음 4구는 시간[世時]을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한을 보인 것이다.티끌과 시방이 걸림 없고 겁(劫)과 순간(一念)이 다르지 않으니, 크고 작은 것[大小]과 길고 짧은 것[長短] 등이 본래 하나이고 둘이 아니다. 일체 존재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이다.이 경계는 지엄 스님이 입적하기 10일 전에 대중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내용에서도 볼 수 있다.스님: “경 가운데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시방세계를 머금는다.(一微
하나의 미세한 티끌에 시방세계가 다 들어있듯이 티끌 티끌마다 시방세계가 다 들어있다고 해서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라고 한다. “모든 티끌 가운데도 또한 그러하다”는 ‘법성게’ 제10구이다.광대한 시방세계가 미세한 티끌에 다 들어가니 아무리 좁은 공간이라도 좁지 않고 아무리 넓은 세계라도 넓지 않다. 좁고 넓음은 단지 구함에 따라 구한 것일 뿐이다. 큰 것을 구하면 곧 크고[須大卽大] 작은 것을 구하면 곧 작다.[須小卽小] 수즉수(須卽須)인 것이다. 또한 하나의 티끌만이 아니라 티끌 티끌마다 모두 다 시방세계를 머금고 있으
‘화엄경’에서 상즉과 상입의 무애 도리는 불보살과 선지식들의 마정(摩頂)이라든지 집수(執手)라든지 탄지(彈指)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보살들이 입정하고 출정할 때 같은 이름[同名同號]의 부처님들이 보살들의 정수리를 만지며 가피해주시고, 선지식들이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만지거나 손을 잡거나 손가락을 튕기는 등의 방편으로 선재동자를 칭찬하고 삼매와 공덕을 구족하게 해서 해탈경계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그 가운데 보현보살이 선재동자를 마정하는 예를 들어보자.“보현보살이 오른손을 펴서 그 정수리를 만지니 선재가 곧 일체불찰 미진수의 삼매문을
진성이 연을 따라 이루는 연기(緣起)의 뜻 가운데, 다라니의 덕용[用]을 밝힌 것이 ‘법성게’ 제8구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라는 이 구절은 하나와 일체, 이것과 저것이 상즉하는 즉문 도리를 읊은 것이다.“일즉일체다즉일”이 다라니의 용에 해당하는 점에 대하여 진수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문] 앞은 중문이기 때문에 힘이 있고 힘이 없는 문[有力無力門]이고, 이것은 즉문(卽門)이기 때문에 체가 있고 체가 없는 문[有體無體門]인데, 어째서 용(用)이라 하는가?[답]
‘옷깃만 스쳐도 500생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생겨난 것은 ‘인(因)’과 ‘연(緣)’이 만난 과보이니 인연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고, 만난 인연을 승화시키자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하겠다. 누구나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다른 사람 내지 주위 모든 것과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계한다는 인연화합의 연기도리이다.인연(因緣)과 연기(緣起)는 보통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도 있고, 그 의미가 다르기도 하다. 인연은 속제(俗諦)의 바탕이고 연기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의 바탕이니, 자성이 없는 인연법을 관함으로써 걸림 없는 연기세계에 들어갈 수 있음
‘법성게’의 제6구는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다.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라는 진성수연(眞性隨緣)을 말한다. 진성이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해서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루므로 진성이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한 것이다. 이 두 구절로 나타낸 연기의 체를 의상 스님은 곧 일승다라니법의 무장애법 법계(無障礙法法界)라 말씀하고 있다.그런데 이 진성수연은 먼저 진성이 있어서 연(緣)을 따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일승 화엄의 연기는 연(緣) 이전에는 법이 없다. 만약 성
“일체 모든 여래께서 부처님 법을 설하심이 없으니, 응하여 교화할 바를 따라서 법을 연설하신다. (一切諸如來 無有說佛法 隨其所應化 而為演說法)” (‘야마천궁보살설게품’)“부처님이 법계에 충만하시어 널리 일체 중생 앞에 나타나신다. 연을 따라 중생에게 두루 나아가시나 항상 이 보리좌에 앉아계신다. (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 隨緣赴感未不周 而恒處此菩提座)” (‘여래현상품’)부처님을 찬탄하는 ‘화엄경’ 게송이다. 여기서 설하심이 없으면 증분이고 설하심이 있으면 교분(敎分)이니, 교분은 즉 연기분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설하시는 그 자체
법성이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일체가 끊어졌다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에 “증득한 지혜로 알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고 한다. ‘법성게’의 제4구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다.의상 스님은 제자들에게 법성은 무주(無住)이므로 기준할 만한 법이 없고, 기준할 만한 법이 없기 때문에 무분별상이며, 무분별상이기 때문에 다만 증득한 자의 경계여서 아직 증득하지 못한 자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고 있다.(‘도신장’) 법성은 깨달은 지혜인 증지로 알 수 있는 부처님 경계인 것이다.설잠 스님도 ‘법성게’의 핵심이 법성이
법성이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 제법이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한 곳은 이름으로 지목할 수도 없고 모양으로 그려낼 수도 없다. 모든 것이 끊어졌다고 해서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일체가 끊어져(無名無相絶一切)”라고 한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름과 모양을 보지 않는 것이다. 미세한 티끌도 거대한 수미산도 스스로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 곧 오척에 계합하기 때문이다. 오직 오척법성이므로 무이상이라서 처음부터 모양도 이름도 없다.이 일체가 끊어진 자리에 대해서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법성게’의 두 번째 게송은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이다. 법성이 원융하여 두 모습 없음을, 다시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고 본래 고요하다.” 라고 달리 표현하여 반복하고 있다. ‘모든 법[諸法]’이란 ‘법성’을 가리키고 ‘움직이지 아니함[不動]’은 ‘원융’의 뜻이며, ‘본래 고요하다[本來寂]’는 ‘두 모습 없음[無二相]’이다.모든 법이 움직이지 아니하고 본래 고요한 것은 제법이 다 동등한 법성이기 때문이다. 부동(不動)의 제법은 여래의 성품이 일어남이 없이 일어난 성기법성(性起法性)이다. 오척(五尺)되는 나의 몸과 마
‘법성게’는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으로 시작된다. ‘법성게’의 첫 구절이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의상 스님은 30구의 게송을 해설함에 있어서 이 구절을 포함하여 처음 4구가 자리행(自利行)의 증분(證分)을 보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깨달은 지혜가 있어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증분 4구에 대한 직접적인 해설은 생략하고 제5구부터 설명을 붙여나간 후 다시 보충설명을 더하고 있다. 여기서는 게송 자체가 드러내고 있는 의미와 의상 스님의 강설 내용을 통하여 그 뜻을 이해하고 경증(經證)과 아울러 주석서 등에
의상 스님은 ‘법’자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불’자로 끝나는 ‘법성게’의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반시의 한 중앙에 같이 두었다. 이는 ‘법성가의 진실한 덕용이며, 성(性)이 중도에 있음을 나타낸 까닭’이라고 한다. 이 뜻은 이해하기 어려우나 ‘십지경론’에 보이는 세친보살의 육상설 등을 인용하면서 육상(六相)의 도리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육상이란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괴상(壞相)이다. 즉 전체인 모양, 각각인 모양, 같은 모양, 다른 모양, 이루는 모양, 무너지는 모양이다.이 육상의 명목은 ‘
‘법성게’는 ‘법계도인’과 합해서 ‘반시’라는 그림으로 그려졌다. 그래서 ‘법성게’ 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반시의 그림 모양이 상징하는 의미부터 먼저 짚어보기로 한다.경의 내용을 한눈에 쉽게 알 수 있게 그림으로 그린 것을 변상도라고 한다. ‘화엄경’ 변상도는 주로 80권 ‘화엄경’의 변상도인데 7처9회도, 80권 각권의 변상도, 사경과 목판본 앞에 그리거나 새겨진 그림 등이다.의상 스님이 60권 ‘화엄경’의 전 내용을 그려 보인 반시는 그림이기는 하나, 그 모양이 변상도와는 많이 다르다. 그것은 210자의 시(詩)인 ‘법성게’가
의상 스님은 ‘일승법계도’를 저술하고 귀국한 후 전국을 다니면서 화엄도량을 개설하고 ‘화엄경’과 ‘일승법계도’를 강설하였다. 그리하여 부석사를 비롯한 화엄십찰이 건립되고 수많은 뛰어난 화엄수행자가 길러졌다. 그리고 법손들에 의해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서가 계속 편찬되어 의상 스님의 화엄사상이 끊이지 않고 전승되었으며 사자상승의 전통이 이어졌다.의상 스님 처음 건립한 사찰관음도량인 낙산사 홍련암태백산에 부석사 창건 이후화엄십찰 건립해 후학 길러부석사 창건 관련 두가지설‘송고승전’ ‘삼국유사’ 달라화엄사·해인사 화엄십찰 확실직접적
의상 스님은 저술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으나 제자들의 교육과 교화를 중시하였다. 부석사를 근본도량으로 삼고 각처에서 주로 ‘화엄경’과 ‘일승법계도’를 강설하고 교화활동을 폈다.의상 스님 신라귀국 20년 뒤중국서 법장 스님 편지 보내‘기해동서’ 편지 천리대 소장화엄경 주석 보내 검토 부탁법장 스님 주석서 ‘탐현기’를4명의 제자에게 강의케 해진정 스님 어머니 천도 위해소백산 추동서 화엄경 강설황복사·부석사에서도 강의태백산서는 ‘행경십불’ 강설제자들, 의상 스님 강의 적어후대에 의상 화엄 등불 밝혀‘송고승전’ ‘법장화상전’ 이어‘삼국유사’
낙산의 바닷가 굴 안에서 친견한 관세음보살의 상을 금당(현 홍련암)에 모신 의상 스님의 관음신앙은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하는 ‘백화도량발원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의상 스님의 이 발원문은 우리나라 발원문의 효시로서 고려 체원 스님이 주석한 ‘백화도량발원문약해’ (1328)에 담겨 전해져왔다. 발원문의 전문을 번역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실되었다가 최근에 발견된 부분은 [ ] 속에 넣어 표시하였다.의상 스님의 백화도량발원문관음보살에 대한 귀명 담아또 다른 발원문인 일승발원문화엄수행 권장하는 내용 담겨백화도량발원문 지은 까닭이전란 지친
의상 스님이 ‘일승법계도’를 저술한 지 약 석 달 후인 총장 원년(668) 10월29일에 스승인 지엄 스님이 67세를 일기로 입적하게 된다. 지상존자 지엄 스님은 운화사(雲華寺)에서도 주석한 관계로 운화존자라고도 불리는데, 만년에 입적한 곳은 청정사(淸淨寺)이다.(‘華嚴經傳記’)급보 전하려 서둘러 귀국당 침입 물리쳐 국난극복해로로 귀국 때 선묘 낭자용으로 현신해 스님 외호선묘용 다시 부석이 돼서영주 부석사 창건을 도와일본서 선묘용 신으로 간주화엄도량 고산사서 받들어중국 용문석굴 ‘신라상감’ 굴의상 스님 조성 가능성 높아전란에 신음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