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체험은 영성의 극치 기독교인에겐 삶의 희망 불교는 진리로 보지않아 단지 무명 속의 일일 뿐 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 종교적 체험이 있다. 하다못해 바위를 섬기고 나무에게 복을 구하는 무속인들에게도 체험은 존재한다. 따라서 세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기독교와 같은 고등종교에서 어찌 체험이 없겠는가? 기독교의 종교적 체험 가운데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중생은 기독교 영성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나님을 불신하고 타락한 인간이 교회에 나가 설교를 듣고 회개를 하는 순간 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한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중생을 체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중생 체험은 기독교인들에게 삶의 의미와 미
기독교 교리의 중생은성령으로 새로 거듭남중생이 되지 않고서는결코 구원받을 수 없어 앞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여러 조건과 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소명, 중생, 회개, 믿음, 칭의, 양자, 성의, 견인, 영화 등이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은총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원의 여러 조건들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으니 곧 중생이라는 교리다. 구원의 조건 가운데 하나인 소명과 함께 중생은 기독교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중생은 살아있는 생명을 뜻하는 불교의 중생(衆生)이 아니라 거듭난다는 뜻의 중생(重生)이다. 죄로 인해 죽었던 영적 생명을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성령이 역사하여 새로운 생명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은모든 번뇌가 소멸된 해탈구원도 오직 인간이 해결신을 통한 구원은 없어 예수를 향한 믿음과 회개, 고백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철칙이다. 인간은 오직 예수라는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만 과거의 허물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 영생과 복락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인간의 구원이 철저하게 인간 스스로에 달려있다고 본다. 인간의 죄는 인간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죄로부터 벗어나는 일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죄를 소멸하기 위해 부처 앞에서 참회하지만 부처에게 자신의 죄를 없애거나 씻어 달라고 매달리지는 않는다. 또 불교의 시각에서 본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으로 인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정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8단계의 순서로 진행신의 부름은 한정적선택 받을 때만 가능 인간이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과 회개, 고백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오직 예수를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그 믿음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고 표명하는 일이다. 하지만 구원은 아무런 절차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들이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데에는 그에 따른 과정과 순서가 있다. 이른바 ‘소명, 중생, 회심, 믿음, 칭의, 성화, 견인, 영화’ 등이 그것이다. ‘소명’이란 신이 자신의 말씀인 복음을 통해 구원받을 인간들을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6절에 따르면 ‘혼인잔치를 베푸는 어떤 임금과 같으니 종을 보내어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한 내용이 있는데 이는 신이
기독교에서 인간구원은예수 믿고 죄 회개하며믿음을 고백 때만 가능불교 구원, 스스로 해결 기독교에서 구원은 인간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만약 인간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 미래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간은 구원으로 말미암아 한없는 영광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 받게 된다. 기독교에서 구원을 얻는 방법은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의 주인인 예수를 믿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은 예수 외에 다른 이를 구원자로 보낸 일이 없다”고 말한 것처럼 오직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예수는 죄인을 구하러 온 구세주요, 이 땅에 다시 재림할 재림주며 세상을 심판할 심판주이다. 따라서 예수를 하나님이 보낸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고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구원 가능하다고 믿는기독교의 구원관에서불교 이해하기란 어려워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인간구원이다. 교리는 달라도 고통과 질곡 속에 빠져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목적은 어느 종교건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인간 구원이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14장에 따르면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였다. 이렇듯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 외에 인간 구원을 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단정한다. 이 땅에 수많은 성현들이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나타났지만 그 누구도 인간 문제를 해결한 자는 없으며 정작 그들조차도 구언을 받지 못하고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에서 구원
평민 예수의 어린 시절은배우지 않고 신에만 관심귀족으로 태어난 부처님늘 배우고 생명에 큰관심 기독교 성서에는 예수의 성장과정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예수의 일생을 다룬 각 복음서들에는 30세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만 주로 이야기 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누가복음2장에 예수가 열두 살 때에 부모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의 성전에 올라간 이야기와 ‘부모에게 순종하였으며’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자랑스러워 가더라’ 정도의 이야기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성장과정에서 드물게 언급하고 있는 열두 살 때 유월절의 행동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의 성전에 오른다. 특이한 일은 유월절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예수가 일행들 중에 보이
수많은 어린생명 살상한예수 탄생은 모순투성이온 세상에 기쁨·평온 준부처의 탄생과는 대조적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예수다. 그가 신의 아들이라는 점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거니와 아버지의 정혈을 빌리지 않고 성령으로 태어났다는 점도 기독교인이 아니고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류사에서 예수는 이런 비합리적인 탄생과 관계없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임은 틀림이 없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사랑과 평화 그리고 구원의 주관자로 표현한다.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는 인간 사랑과 평화, 구원을 위해 왔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를 접하다 보면 사랑과 평화, 구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는 예수의 탄생에 있어서도 그렇다.
인간세상 구원한다며 결혼 앞둔 여인을 범해 세상에 태어난 예수는 붓다와 탄생부터 달라 여러 차례 언급했듯 예수 탄생의 목적은 인간구원에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야훼신의 갑작스런 뜻이 아니고 이미 창조 이전부터 비밀스럽고 철저하게 계획해 온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출현은 이미 구약에 예언한 바가 현실화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구약 이사야 서 7장 14절에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름을 임마뉴엘이라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는 것이다. 예수의 탄생에 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경전은 마태복음과 누가 복음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마리아라는 처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증언한다.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이미 정혼한 남자가 있었다.
예수의 속성과 신분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 신으로서의 예수와 인간으로서의 예수이다. 이에 비해 석가모니는 예수처럼 양면적 구조가 아니다. 석가모니는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무결한 부처가 되었기 때문에 단 하나의 속성과 신분만이 존재한다. 기독교에서 신과 예수를 우주 가운데에 최고의 존재로 여기지만 불교에서는 부처보다 더 높은 존재는 없다고 본다. 불교에서 부처의 속성과 신분은 세상을 창조한 신보다도 위대하며 완전하다고 주장한다. ‘불본행집경’에서는 부처가 태어날 때 스스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치자 천상의 어느 신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전해지며 ‘중아함경’에서는 부처가 천상의 신들을 향해 설법하고 그들의 공경과 귀의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화엄경’에서는 천상과 천하 가운데 부처와 같은 존재가 없
전지전능하고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다는 신이 무엇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인간을 창조해 놓고 타락이니 구원이니 하는 사건들을 펼치고 있는 걸까?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야훼신은 이미 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자신의 뜻에 따라 계획하고 작정하였다고 말한다. 신은 악마가 자신을 배반할 것도,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것도, 후에 인간들이 자신이 내린 계명을 지키지 못할 것도, 자신의 아들인 예수조차 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도 미리 알고 있었다. 일반인의 시각에서 보면 신의 이러한 행위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기독교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신의 주권과 보증 아래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인간의 타락과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교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삼위란 신 야훼인 성부와 그의 영인 성령,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를 가리킨다. 창조신 야훼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의 모습을 통해 나타난다. 그것도 하늘에서 거룩하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을 여인의 자궁 속에 보내어 자식의 형태로 온다. 예수 성령 잉태설이 그것이다. 예수는 창조신 야훼의 영이 인간화 된 존재이다. 그런데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와 같은 삼위를 말하면서 이들은 본래 명칭만 다를 뿐 동격이라고 가르친다. 이 교리에 따른다면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령도 하나님이며 성자도 하나님이다.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성부하나님, 성령하나님, 성자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쓴다. 마태복음 1장18절에서 “예수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모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