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갑니다. “내 마음이야!”라며 자신이 주체적으로 마음을 움직였다고 외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정작 우리 마음은 무엇인가의 영향과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눈치를 보고 무언의 강압에 의해 마음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선택하고 결정합니다.‘돈’이 ‘권력’된 세상에서 ‘꿇으라’면 저항 한 번 없이꿇어버리는 우리 젊은이들‘안 하는 편 택한다’고 말한 보잘것 없는 필경사 바틀비1800년대 미국 자본주의서 ‘거절’ 넘은 무모한 ‘선택’그를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구치소서 생을 마감하게 돼선택하고 거절했단 이
빌리 카스퍼. 영국 요크셔 지방 작은 광산촌에 살고 있는 소년입니다. 배다른 형 쥬드와 살고 있습니다. 물론 그에게는 엄마와 아빠가 있지만, 두 사람은 현재 별거 중입니다. 엄마는 남자관계가 어지러웠고, 그 꼴을 보다 못한 아빠가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생계까지 책임지게 된 엄마는 아들의 교육 같은 건 안중에도 없습니다.결손 가정의 가난한 소년 빌리학교에서도 조롱과 멸시 대상 탄광촌 노동자가 정해진 미래유일한 친구는 야생매 ‘케스’ ‘길들지 않는 매’ 훈련시켰다는 자부심만이 찌든 현실 탈출구배다른 형과의 우연한 마찰로 케스가
사람은 사람을 어디까지 파멸시킬 수 있을까? 시대는 개인의 삶을 어디까지 망칠 수 있을까? 복수는 결국 성공할까? 정의는 정말 불의를 이길까? 누가 봐도 옳지 못한 게 분명한 사람의 승승장구를 우리는 바라만 봐야 하는 걸까? 그리고…, 그리고 이런 게 바로 인생이란 것일까?이념으로 무장한 사상가지만‘평범한 성공’ 갈망한 주인공여배우와 결혼, 가정 꾸몄지만 사소한 갈등 외부로 증폭되며‘공산주의자’ 낙인 찍히고 몰락개인 희생시킨 집단 광기와역사 오염시킨 개인 욕망 사이진정한 유토피아는 어디 있을까요즘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원자력 발전소에서 잠깐 근무하기도 했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는 글 쓰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그의 아주 짧은 시 한 편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글 쓰는 생활 결심한 시인가난한 시골 거친 삶 택해자식 배곯을까 걱정한 어머니“짜다”며 설렁탕 국물 더 얻어자식 투가리에 몰래 덜어줘그 순간 기록한 시인의 글은가난 각오한 소명의 결실숭고한 길 가는 이 있기에국물 짠 이유 비로소 알게 돼‘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배 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
2년에 걸친 법구경 강의를 마치고 기차를 타고 돌아오자니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법구경은 참 소중한 경전입니다. 초기경전 중에서도 성립시기가 이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물론이요, 동서양의 문인들이 소중하게 다뤄왔지요.프로기사 입단 실패한 청년무역회사 인턴으로 취직치열한 승부의 사회 생활바둑과 다를바 없어 보여도흑돌 쥔 신입사원에게 조차 접바둑 없는 냉정한 세계고수로 보이던 상사·선배도 때론 약자 위치서 아등바등언제쯤 ‘완생’이 될 수 있을까그런데 이 법구경을 21세기 대중들과 함께 공감하려
인도 사람인 쇼바와 슈쿠마는 부부입니다.결혼한 지 3년, 아내인 쇼바는 출판사에 다니고 있고, 남편 슈쿠마는 대학에서 박사논문을 준비 중입니다. 두 사람은 아름답게 사랑했고 그래서 결혼했는데 지금 자꾸 어긋나고 있습니다.무척 친숙하지만 애틋한 정이 오가지 않는 부부.차라리 소란스레 싸움이라도 벌인다면 나을 것도 같습니다.그저 무덤덤한 사이입니다.그래도 6개월 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아주 행복했고 매우 유쾌하게 지냈습니다. 그렇게 행복했던 이들 부부에게 6개월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출산 3주 전 아내의 사산으로서
소설가 한승원의 장편소설 ‘사람의 맨발’을 만났을 때 참 이상한 제목도 다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일대기를 소설로 쓴 거라는데 제목 어디에도, 그리고 표지 그림 어디에도 부처님을 보여주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얀 바탕에 햇볕에 그을리고 주름진 누군가의 벌거벗은 왼쪽 발 하나만 턱하니 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참 묘하기도 한 것이 “아!”하고 오는 뭔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소설은 붓다의 맨발로 시작합니다.“싯다르타의 두 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떠난 출가자의 슬픈 표상이었다. 평생 대중교화를 위
여름이 가시고 서늘한 바람에 살짝 한기를 느낄 이맘때 딱 어울리는 소설이 있습니다. 저 유명한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입니다. 5년을 한결같이 맘에 품고 있던 여인 데이지를 다시 만나 사랑을 불태우는 개츠비. 하지만 여름 석 달의 애태움도 속절없이 그는 자기 집 수영장에서 총에 맞아 숨집니다.1920년대 미국 뉴욕주. 막대한 돈이 풀리자 그 돈을 즐기며 유흥과 환락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어지럽게 얽히고, 미처 돈을 움켜쥐지는 못했어도 돈을 좇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이리저리 몰려다닙니다. 재즈가 전성기를 맞고 할리
‘책상은 책상이다’의 저자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스위스 작가 페터 빅셀. 그의 또 다른 산문집으로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38편의 칼럼이 담겨 있는데, 그 중에 한 편의 글이 오래도록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저 한 인간에 불과했던 황소’라는 제목의 글인데, 처음에는 그저 휘리릭 읽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묘한 느낌이 깔깔하게 남았습니다. 자꾸 생각났고, 그리고 자꾸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작가의 어린 시절 체험담인 이 글의 주인공은 거대한 황소입니다. 페터
올 추석에도 여전히 귀성 풍경이 텔레비전에 가득합니다. 고향이란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때가 바로 명절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납니다.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서, 타지에서 시야도 넓히고 출세도 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젊은이들은 고향 떠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금의환향까지는 아니더라도 성공한 모습을 고향에 보여주겠노라는 다짐도 합니다. 그래서 당신도, 나도 고향을 떠나서 객지에서 밥벌이를 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참
우리는 앎을 참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가끔 이 ‘앎’이 문제를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게 아니라 사실에 자기 상상을 덧칠해서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알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열세 살 소녀 브리오니가 그랬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사실과 마구 뒤섞고, 사실을 심하게 일그러뜨린 결과 타인과 자신의 삶을 망쳤습니다.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는 바로 이렇게 ‘안다’는 것의 함정을 보여주고, 자신의 망상으로 인해 추락한 사람에게 속죄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1938년, 제2차 세계대전
“저…, 부인…!” 칭얼거리는 사내아이를 데리고 지나가는 한 여인을 중절모를 쓴 사내가 불러 세웁니다. “혹시 성함이 이란느 아니신지….” 여인은 맞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자기 이름을 알고 있는 이 사내가 대체 누군지 모른다는 표정입니다. 누구시냐고 묻는 여인에게 사내가 모자를 벗어 얼굴을 보여주며 다시 묻습니다. “나 모르시겠소?” “전혀요.”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다 못해 악을 쓰는 사내 아이 때문에 여인은 서둘러 돌아섭니다. 다시 모자를 쓴 사내는 그들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봅니다. 이 사내
이 소설을 어떻게 풀어내면 좋을까요?쉽지 않네요. 제목은 ‘파이 이야기’(Life of Pi). 이안 감독의 영화로도 나와서 수많은 영화팬을 열광케 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영화보다 책을 선호하는 나는 얀 마텔의 유머 넘치고 매력적인 문체에 푹 빠졌습니다. 각설하고.자, 다시 앞에서 제기한 문제와 맞부딪칩니다.이 책을, 이 소설을 어떻게 들려드리면 좋을까요?가장 먼저, 이 책은 한 소년이 태평양에서 227일 동안 표류하다 구조된 이야기라고 말하겠습니다. 인도 폰디체리에서 사설 동물원을 운영하던 부모가 사업을 접고 캐나다로 이민가려고
좀 엉뚱합니다만, 살기 좋은 나라란 어떤 곳일까? 이런 게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열심히 불러온 노래 중에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서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다.”라는…. 나는 어렸을 때 이 지구 위에 사계절이 있는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 밖에 없는 줄 알았고, 국가에 평생 충성을 다 바쳐도 모자라며, (그럴 일은 없겠지만) 국가가 “미령아, 너 좀 죽어줘야겠다”라고 요구하면
벌써 12년 전의 일입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대단했습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제를 즐겼지요. 그 때 참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산스크리트어 공부모임에 가려고 지하철을 탔는데 평소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전동차가 한산했습니다. ‘이상하네. 이렇게 전동차가 빌 때도 있어? 아무튼 한가하니 좋네.’이런 생각만 했지 전동차가 빈 이유까지 따져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반대편 전동차가 와 섰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시청역 방향 전동차 객실은 거리응원을 하
지난 6월4일 치른 지방선거는 후보자 본인만큼이나 그 가족이 아주 흥미진진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느 서울시 교육감 후보자의 딸이 올린 글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지요. 그녀의 글에서 아주 인상적인 단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건 바로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말이었습니다.낳기만 했지 돌보지 않은 친부에 대한 원망 섞인 그 표현을 접하는 순간 중국 작가 위화(余華, 1960~ )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에 등장하는 아비와 아들이 떠올랐습니다.‘허삼관 매혈기’는 중국이 요즘처럼 개방되기 한참 전, 마오쩌둥의 어록이 큰
인도라는 나라는 성(聖)스런 경지로 들어가는 길의 초입에 마련한 톨게이트입니다. 지금도 세상의 숱한 사람들이 영혼의 정화를 위해 인도로 향하지만, 글쎄요, 인도는 성스런 만큼 딱 그만큼 속(俗)스런 땅이기도 합니다.몇 해 전 인도를 짧게 여행할 때 일입니다. 기차 안에서 간디 사진이 표지에 박힌 책을 읽고 있다가 어떤 인도 남자의 불만족스런 물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아직도 당신은 간디를 읽는가. 시대가 달라졌다. 왜 오늘날의 인도는 보지 않는가.”이 한 마디에 이국의 여행자는 책을 슬그머니 접어 배낭에 넣어야 했습니다.신앙·혈통
달달한 연애소설을 읽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몹시 피곤한 날,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금요일 늦은 오후. 세상이 나를 향해 퍼부었던 의무와 책임의 무게에서 나를 슬그머니 놓아주고 싶은 시간. 이때는 낯선 남녀의 사랑이 달달하게 녹아 있는 연애소설 한 권을 들고 침대로 가는 게 제일입니다. 연애소설 몇 페이지 넘기기도 전에 나는 곯아떨어지기 일쑤이지만, 주인공들은 독자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완성하겠지요.정부의 이주 정책만 믿고 아마존 밀림으로 향한 부부개간 실패하고 아내도 잃어홀로
찬바람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차디찬 늦가을 밤, 나와 아내는 어디선가 낮은 신음소리를 듣게 됩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듣던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행랑방 아범이 우나보네.”순하고 착하기만 한 행랑방 아범이 숨을 죽이고 비탄을 쏟아내는 이유가 대체 뭘까요? 아내가 다음 날에 그 해답을 듣고 들려준 사연은 이렇습니다.행랑방 부부는 가난하기 짝이 없어 옷이라곤 지금 입고 있는 단벌 홑옷뿐이요, 조그만 냄비가 가진 것 전부입니다. 세간도, 여벌의 옷도 심지어 이부자리도 없고 밥 담아 먹을 그릇도 없으며 밥 떠먹을 숟가락도 없습니다.
며칠 전 서울 시내를 걷던 중이었습니다. 퇴근길로 보이는 젊은 여성 둘이 뭔가 신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앞서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녀들의 몸짓은 유난히 활발해 보였고,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몸을 툭툭 치면서 유쾌하게 걷다가 갑자기 한 여자가 “꺅!” 비명을 질렀습니다. 어쩌다 그녀들 뒤를 졸졸 따라가게 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질겁을 하게 되었고, 펄쩍펄쩍 뛰는 그녀의 발아래를 보다가 그만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비둘기 한 마리가 먹이를 쪼아 먹다가 그녀의 발 근처로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심코 걷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