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의 민들레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여겼던 부끄러운 시절이 내게 있었습니다. 10여 년도 더 지난 서울살이 그 시절, 내 영혼이 참으로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아직 청년의 시간이었던 그때, 나는 욕망하는 것들을 향해 달려 나가고 그것을 성취하며 물질이나 지위의 실적을 채워가는 그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 관점은 나 아닌 타자를 이롭거나 해롭거나, 혹은 의미 있는 존재이거나 별 의미 없는 존재로 간주하는 처신으로 연결되었습니다.민들레 보려 옹벽에 멈추던 순간분명한 의미로 다가와 삶 변화해
인간이 자기 아닌 것들로부터 인간 스스로를 고립하고 단절해 온 역사는 문명의 가속화와 정비례합니다. 그 고립과 단절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인류는 최초 사바나 숲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스스로를 그 고향, 숲과 단절하고 고립을 택하는 방향으로 진행해 왔습니다. 인류는 끝내 자신들이 자연과 하나이자 그 일부에 불과하다는 의식을 벗어버렸습니다. 확실한 것에 대한 강박적 추구를 본능처럼 가진 과학이 인류 문명에 기폭으로 작용하면서 인류에게 숲과 자연은 그저 자원의 지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과학기술 숲과 자연 자원으로 취
정희성 시인이 ‘숲’이라는 시에서 개탄한 그 인간의 실태,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어도 숲인데, 너와 나는 왜 서로가 만나 숲이 되지 못하는가?’ 지난 편에 이어 이번 글은 이 물음을 화두로 숲을 보겠습니다.수단·목적 바뀐 삶 본질 놓쳐제 것 아닌 것 욕망치 않는 숲견제·균형 질서가 조화 이뤄내주저없는 나눔은 다음 생 위함각자로 살면서도 더불어 숲을 이루는 원리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저마다 제 주인자리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숲을 이루는 생명은 모두 제 삶의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5월이 눈부시다 하여 3월 추운 시간을 제 주
숲에 아름답지 않은 날 언제 있으랴마는 숲의 사계 중 가장 찬란한 때를 꼽아보라면 나는 단연 5월이라 주장하고 싶습니다. 추운 날과 중첩하며 피어났던 봄꽃들 자취도 없이 모두 사그라질 즈음 5월의 숲이 우연 같은 필연으로 찾아옵니다. 5월 숲의 찬란함은 먼저 소리로 오고 빛깔로 오고 바람으로 오고 어느 순간 환장할 향기를 토해내며 찾아옵니다.소리·빛·향기로 찾아오는 5월 숲철새들은 높고 고운 소리로 노래형언할 수 없는 색·향으로 가득 우리 삶 스스로 찬란한 숲 닮아야먼저 소리부터 볼까요? 들리지 않던 새들의 노래 소리가 숲 사방의
직업상 일 년 내내 길을 달리는 날이 참 많지만 사계절 중 길 위로 여행하는 기쁨이 특별히 설레고 기쁜 때가 바로 이 즈음인 듯합니다. 도처에 생기가 약동하고 사방이 꽃 잔치잖습니까? 산수유와 목련 지는 자리에 지금 버드나무가 연두로 살아나고 복사꽃, 벚꽃, 개나리, 진달래가 흐드러집니다. 나풀나풀 노랑나비 흰나비 허공에 제 삶의 궤적 제 자유로 그으며 날고, 물까치며 어치며 휘파람새며 수많은 날짐승들의 몸짓과 소리로 또한 차오르는 때 아닙니까? 그 풍광 속을 누비노라면 ‘나 지금 여기에 살고 있음’의 기쁨이 가슴 한가득 차오릅니다
봄을 마주하셨는지요? 도처에 간절한 생명들 앞 다퉈 약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봄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숲에서 봄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려 한다면 지금이 딱 좋은 시기입니다. 주말에 숲을 걸어보세요. 유심히 숲의 수직구조를 살펴보세요. 꼭대기 공간을 차지하는 교목은 아직 별다른 변화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내가 머무는 괴산 여우숲의 가장 높은 공간은 곧게 뻗은 아주 큰 키의 낙엽송(일본잎갈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며 차지하고 있는데, 누구도 푸른빛 잎 한 조각을 내
드디어 봄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남쪽 바다 근처에는 목련이, 섬진강 자락에는 매화가, 산청에는 산수유가…. 지난 주 강연으로 떠돌며 내가 마주한 풍경이 그랬습니다. 분명한 봄을 그렇게 목격하며 새삼 광화문의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새 생명을 키워낼 준비로 분주한 봄, 다시 생기와 온기로 지천이 채워지고 누구라도 삶을 향한 의지로 충만해 지는 이 봄! 그 봄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겨울을 부정하면서 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겨울을 긍정함으로써 오는 것일까요?칡등 콩과식물 질소고정 능력탁월거름돼 흙 비옥하게 만들고 소멸예고
숲과 관련한 말 중에 ‘폭목(暴木, wolf tree)’과 ‘불량목(不良木, weed tree)’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모두 산림경영 분야에서 쓰는 전문용어입니다. 쉽게 말해 ‘폭목’은 폭력배 같은 나무라는 것이고, ‘불량목’은 지질맞은 나무라는 것입니다. ‘숲 가꾸기’를 할 때 모두 숲에서 제거하거나 정리해야 할 나무들로 분류하기 위한 용어인 것이지요. 다른 생명에 대한 폭력 행사상생의 숲 원리와 크게 상반긴 숲 역사에서 칡은 일시적광포함 이긴 생명들 새 터전생명적 가치와 인문적 시선으로 숲을 바라보는 나는 이런 용어가 마뜩치 않
사람들은 종종 겨울 숲에 머무는 감흥에 대해 내게 묻습니다. 춥고 시려 서글프지 않느냐? 적막하여 너무 쓸쓸하지는 않느냐? 황량한 겨울 숲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느냐, 또 뭘 느끼면서 살아가느냐? 내려놓는 의미 알아가는 건겨울 숲 머무는 자만의 일미입춘이 지난 지 보름이 가깝지만 자연으로부터 너무 멀어진 사람들은 아직 봄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양지바른 땅의 온도와 그 땅에 뿌리를 둔 풀과 나무들에게서는 이미 미동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겨울과 봄의 경계 지점에 대한 새들의 감응은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분명
모든 것에서 드러나는 ‘지금의 모습’은 단순히 지금의 모습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오직 그가 건너온 긴 시간 위에서, 그리고 주고받은 수많은 관계의 작용 위에서만이 온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역시 내가 건너온 삶의 긴 시간 위에서 나와 마주하고 주고받은 온갖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될 때 비로소 조금 더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의 오두막, 백오산방(白烏山房) 마당한 구석에 놓인 돌덩어리며 그 옆에 살고 있는 소나무며 산수유며 앵두나무며 배롱나무 역시 그렇게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혼란한 시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그 측근이 뿌리가 되어 빚어낸 세상의 비정상적인 줄기와 잎의 단면이 그것을 하나하나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방대하고 엄청납니다. 우리 사회 곳곳이 마치 심각한 정신적 불구자들이 합종연횡하여 이룬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은 국면을 요즘 아주 길게 경험하고 있습니다.정신적 불구! 냉정하게 살펴보면 이것은 합종연횡 속에 있는 그들만의 사태는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 대부분도 실은 크고 작은 정신적 불구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정신적 불구의 증상은 스트레스 상
대설과 동지(冬至)를 지난 시간인데도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아직 찾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삼한사온(三寒四溫)의 전형이 깨진지는 벌써 오래되었고 해마다 겨울의 뉴스는 이상기후를 한두번씩 다루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들여다보면 이 이상기후 역시 연기(緣起)의 법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적도의 물 온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북극의 빙하는 계속 무너져왔습니다. 최근에는 무서운 속도로 북극을 뒤덮었던 빙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온도가 바뀌면 바람의 길도 바뀌는 법, 지구 북반구의 겨울을 흐르던 바람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