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해석서로 만났던 스님의 자애로운 일생후학의 모범 되지 못할 내 모습 자꾸 부끄러워 무수한 스님들을 만나게 되었지만 실제로 만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 지라도 결국은 몇 마디 말과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몇몇 행동만으로 그 스님을 그릴 뿐이다. 몇 분은 살아서 만났지만 지금은 피안의 나루를 건너셨고, 또 많은 분은 제법 긴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지금은 이름조차 아득하니 실로 내가 직접 만났다고 말을 하지만 이 또한 너무나 허망한 기억의 놀음에 불과한 것 같다. 직접 만나고 잊혀진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 만날 수 없는 먼 시간의 생을 머물다 가셨고, 이제는 차디찬 비석으로 남았지만 내게 더없이 따스하게 닿아 오신 분들도 계신다. 충남 보령 성주사 무념 선사를 처음 만난 것은 구산선문에 열정을 가지고 북한
병기 녹여 불상 만든 신라 불자들 이야기신심 깊었던 그 마음을 내 삶의 귀감으로 삼아 인류는 언제나 최신소재와 기술을 만들어 왔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최고의 기술은 군사용 기술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카메라가 소형화되고 특히 휴대폰으로 고해상도의 사진을 찍을 때면 흔히들 “스파이용 같다”는 말을 쉽게 하게 되는 것도 우리들 머릿속에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도구는 군사용으로 먼저 사용된다는 사실이 무의식중에 담겨져 있다. 하지만 오래전 신심이 돈독했던 신라 사람들은 청동기보다 강하고 뛰어난 최신소재인 철기를 전쟁무기의 소재로 받아들였다. 당시 불자들은 이웃국가의 철기를 녹이고 그들의 땅에서 철을 채집하여 강인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철조 부처님 상을 제작했다. 훗날
세상을 정화하듯 그림 그리는 스님고귀하고 맑은 영호 닮지 못해 부끄러워 호감형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다. 정형화된 말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우리들은 이러한 느낌에 익숙해져 있는 게 사실이다. 누구나 처음 만나는 타인에게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어느 연구에 의하면 우리들은 호감과 비호감에 대한 판단을 불과 0.3초 사이에 해버린다고 하니 정말 숙세의 인연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이미지를 타인에게 좋게 비치게 할 수 있겠는가? 한동안 우리 교단이 폭력적인 이미지로 인해 힘겨울 때가 있었다. 그 당시 얼룩진 불교의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다시 맑고 티 없는 천진한 이미지로 바꾸어 심어 준 데는 원성 스님의 그림과 글이 큰 역할을 했다. 스님을 가까이서 대하다보면 스님
복수심 놓고 깨달음 얻은 티베트 성자의 시 외우며최고 진리 향해 정진하는 수행자로서 마음 다잡아 어머님 살아계실 때 / 내 나이 어렸고 / 나 이제 나이드니 / 그분 이미 아니 계시네우리 함께 있다 해도 / 영원을 기약하지 못 할 것 / 나 불멸의 진리를 찾아 / 수행에 정진하리라아버님 살아계실 때 / 나 집 떠나 없었고 / 나 이제 돌아오니 / 그분이미 아니 계시네우리 함께 있다 해도 / 영원을 기약하진 못 할 것 / 나 불멸의 진리를 찾아 / 수행에 정진하리라 행자시절이었다. 잘린 연뿌리에 가늘게 이어지는 연실처럼 미련이 연연이 피어오를 때면 언제나 흐트러진 마음을 다지면서 늘 맘속으로 되새겨보았던 티베트의 영원한 성자, 밀라레빠의 시구절이다. 일체의 무상을 너무나 간결한 일상의 문체로 써 내려간 이
폭설 속 약속 취소도 않고날 고생케 했던 도반 보며모두가 나와 같지 않음을깨우치는 참회 계기 삼아 갑자기 생각이 났다. 칼럼의 제목이 ‘성원 스님의 기억에 남은 스님’인데 꼭 모범적인 스님과 좋은 일만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정말 기억에 남는 스님은 꼭 사회적으로 모범을 보인 스님만은 아닌 것 같다. 드러내면 해당스님께 누가 될까 염려도 되지만 사심 없이 느끼는 감정이고 추억이니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한번은 철원 심원사를 참배하기 위해 먼 길을 운전해야 했을 때가 있었다. 평소 엉뚱하지만 더없이 친한 도반 현구 스님이랑 동행하였다. 당시에 신라시대 철불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장흥 보림사 부처님을 막 참배하고 온 후라서 피로가 겹쳤다. 해인사에서 출발하여 장흥을 거처 심원사로 가는 길은 너무
가식과 꾸밈없는도반의 은사 스님무례함도 덮어주는너그러움 닮고싶어 언젠가 유럽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일상에 젖어 살아가는 우리들과 전혀 다른 시각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여행이 주는 또 다른 맛일 것이다. 그때 여행은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눈이 있음을 절감하는 여행이 되었다. 파리에서 어느 대학생을 만났는데 한국스님이라고 하자 한국과 불교에 관한 주제로 얘기가 이어졌다. 그는 내가 놀랄까봐 먼저 농담이라고 말을 꺼내며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아느냐?” 뭔가 우리나라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었지만 답을 하지 않자 한국 사람들이라고 했다. 약간 기분이 좋기도 했는데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자 질문 한 학생이 스스로 답했는데 그 이유가 당시 나의 상상을 완
타인의 푸대접을 친절 서원 경책 삼은성운 대사에게서 보살행 참 뜻 배워 외부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을 직접 만나거나 아니면 글이나 미디어를 통해 접하면서 일반 대중들이 받는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때로는 대중의 찬탄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 감동을 받아보려고 접근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아직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훗날을 기약하기도 한다. 분명 내 마음의 탓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군중심리에 휩쓸려 한사람을 직간접으로 만나고 자신도 모르게 한없이 끌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대만 불광산사를 이끄시는 성운 대사의 경우가 그랬다. 대부분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분이 이룩한 외형적 규모에 대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불광산사의 규모가 얼마나 된다든가, 국제 불광회 조직이 정말 방대하고 탄탄하
평생 화내지 않고사신 스님의 미소마음 속 사표로 남아절로 고개 숙여져 아름다운 인생을 망치게 하는 3가지 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탐내는 마음-탐(貪), 화내는 마음-진(嗔), 어리석은 마음-치(痴)이다. 이 세 가지를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독으로 표현하고 엄격하게 단속 할 것을 부처님께서는 가르치셨다. 좋은 영양으로 몸을 보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을 상하게 하는 독소가 없다면 먹는 음식이 모두 좋은 영양소가 되어 건강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을 해치는 독소만 없다면 그 자체로 우리들의 삶은 더없이 건강하고 활기차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은 오랜 세월을 두고 지혜를 증장시켜야 없어지겠지만 탐욕심과 화내는 일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한 순간에 될 것도 같지만 이것 또
신도 생각해 오신채 김치 맛있게 드시던 스님 모습 흔히들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하지만 우리들이 일상에서 늘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자비의 실체를 정확히 알기도 어려우며 어떻게 하는 것이 자비로운 행동인가를 명확히 알고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출가하여 강원에 들어가기 전에 지족암에서 일타 노스님을 시봉하였다. 노스님을 곁에서 모시면서 배우고 느낀 것이 참으로 많다. 강원에서 4년 동안 배운 것보다 노스님을 시봉하면서 참다운 승려로써의 가치관을 배운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스님께서는 늘 유쾌한 성품이셨다. 우리들의 잘잘못에 대해 크게 질타하시지 않으셨고 늘 자애롭게 이해해 주셨다. 일상생활에서도 늘 솔선수범하시고 손수 자신의 주변을 잘 정리하시는 성품이라 사실 시봉했다지만 크게 번거로울 것
우리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부처님의 이미지는 대부분 거룩하여 엄숙한 모습인 것 같다. 물론 천진불이라는 이미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천진한 동자의 모습이기 보다는 고요히 미소 짓고 계시지만 함부로 범접하지 못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가 일쑤다. 부처님이 우리 곁에 오신다면 정말 어떤 모습일까? 행자시절이었다. 대부분 스님들이 고향에서 먼 곳으로 출가하는 경향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도 고향에서 먼 제주도에서 행자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느 스님께 좋은 스승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약천사 혜인스님을 소개시켜 주시면서 ‘소개는 시켜 주겠는데 행자님이 버티어 낼 수 있을까?’하고 의문을 남겼다. 처음엔 그저 열심히 하라는 말이겠지 정도로 들었는데 정말 호락하지 않았다. 초발심 때라 타오르는 신심과 열
스님의 법명을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누구에게서나 장주 스님으로 통했고, 처음 만날 때도 스님은 자신의 법명을 말하지 않으시고 늘 직책이름인 ‘장주 스님’으로 말씀하시고 해인사의 그 누구도 스님을 장주 스님으로 부르는데 어색해하지 않는다. 해인사를 거쳐 간 스님이라면 세속말로 ‘장주 스님을 모르면 간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 기억으로 스님께서 해인사 장경각을 지키는 장주 소임을 맡으신지 30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다. 이렇게 긴 세월을 장경각 옆 2평 남짓한 조그만 방에 머무시면서 오직 장격각을 지키고 관리하는 일만 생각하신 것이다. 스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장경판전의 열쇠를 관리하면서 판전을 열 일이 있으면 직접 한다는 것을 천부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계신다. 작년에 스님께서 제주도
맑고 티없이 깨끗했던 나의 도반작은 험담에도 진언 염하며 경책 ‘기억으로 남은 스님’을 쓰다 보니 자꾸 특별한 기억만 더듬어보는 습관이 생긴 것 같다. 어쩌면 진정 기억에 남는 스님은 특별한 기억에 남은 스님이 아니라 일상에서 물같이 공기같이 내게 스며들어 늘 나의 의식과 함께하는 스님들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온통 내 기억 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 무슨 어려운 일이나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장 먼저 연락을 하게 되는 가장 친한 도반들이야 말로 진정 나의 기억으로 남는 스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기가 가득하므로 우리는 공기의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내 기억속의 영역에 나 자신처럼 편안히 머물고 있는 스님이 있다. 오래 전부터 무슨 견해를 이야기 하다보면 마치 말을 맞
험난한 인도 배낭여행 미소-여유로 함께한 도반철저한 지계-성찰…거처 없어도 은사 극진 시봉 “부처님 나라 오산입니다.”언제나 스님께 전화를 걸면 이렇게 받는다. 처음에는 전화를 걸었던 자신이 좀 어색하게 느껴져 “그 ‘부처님 나라’ 소리는 좀 빼면 좋겠다”고 말도 하지만 황소고집이라는 걸 잘 알기에 그냥 두기로 했다. 그런데 사람의 느낌은 참 묘하다. 처음에는 그토록 어색하던 것이 이제는 친근히 들리니 말이다. 부처님 나라에 사는 오산 스님을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첫 만남은 기억에도 없다.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나도 모르게 내게 스며들어와 이제는 나의 가장 소중한 도반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언제나 여유 만만한 모습은 아마 여러 전생의 수행으로 길러졌을 것만 같다. 인도는 배낭여행하기에 참으로
늘 남 위해 희생하는 유쾌한 스님의 성정경직된 승려상 바꿔준 그 모습 닮고 싶어 보스턴 문수사에서 만난 지광 스님과의 인연이 이렇게 오래 계속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지나치는 인연이었을 수도 있었는데 승려로서 스님의 모습에 내가 감동하여 스님과 인연이 계속되는 것 같다. 지금은 뉴욕에 있지만 보스턴에서 많은 활동을 하셨던 지광 스님의 첫 이미지는 휑하게 움푹 들어간 눈이었던 것 같다. 당시 스스로 ‘시주의 록을 먹고 살이 찌다니 참으로 부끄럽다’는 얘기를 하면서 과체중 상태인 몸무게에 대해 신경 쓰고 있을 때 여서 더욱 그렇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스님의 움푹 들어간 눈은 사실 사람들을 한없이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아서 한번 바라보면 다시는 빠져 나오지 못하는 신비로움이 있었다. 언제나
강원을 다닐 때 법타 스님을 처음 뵈었다. 스님은 언제나 당당한 웃음으로 대해 주셨고 후학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보여 주셨다. 항상 만나면 불자로서 수행자로서 우리들이 이 사회에 해야 할 책임과 의무에 관하여 말씀해 주셨다. 스님께서는 10·27법난으로 일시 미국에 계셨다. 당시 미국행을 선택 할 수밖에 없었던 여타 스님들과 달리 스님께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가게 된 유배지 같은 미국 생활을 알찬 재충전의 계기로 삼고 시간을 아끼어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셨다. 또한 스님께서는 미국 영주권을 취득하여 그 당시 갈 수 없는 동토의 나라 북한을 수차례 다녀오셨을 뿐만 아니라 만주 일원에서 불교를 중심으로 한 우리 역사문화유산에 관한 많은 자료사진과 비디오를 직접 찍어 소장하고 계셨다. 덕분에 자료를 보고 많은
함부로 상대방을 저울질 하던 내 모습일타 스님 법문에 경솔함 깨닫고 참회 강원시절 방학은 정말 구도의 기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책에서 읽거나 또는 도반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어떤 스님들에 관해서 이야기 들으면 직접 찾아가 봐야 직성이 풀렸다. 때로는 소문을 듣고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가지만 기대에 영 못 미치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런 성격 덕분에 나름대로 많은 스님들을 친견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칭찬 자자했던 스님을 직접 만나보면 그 당시 내게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어찌나 호기심이 많았는지 한번은 당시 화제가 되었던 비구니 스님도 직접 찾아간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스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스님들의 견해가 너무 극단적이라서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학인 신분이니 사미였지만 비구니를 찾아가보자고
엄한 행자 교육 속 버팀목 돼준 미소지금도 힘들때면 스님 모습 떠올려 모두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잔뜩 긴장했다. 긴장해야 할 정확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 모두는 군 훈련소에 처음 입소했을 때보다 훨씬 긴장되어 있었다. 인례사 스님들은 마치 우리들의 긴장미를 즐기는 듯 계속 분위기를 잡아갔다. 모두 스스로 발심하여 출가한 길이라서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군에서야 잘못하면 육체적인 괴로움을 당하면 그만이지만 행자교육 때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만일 문제가 생겨서 퇴방되는 날에는 인생의 큰 전환점으로 삼고자 했던 출가의 길을 접어야 하기 때문에 누구도 큰소리로 윽박지르는 않지만 각자 조바심에 잔뜩 긴장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처음 발심하여 출가한 예비 스님들께 좀 따스하
짧은 지면서 만난 자비 실천에 반성언젠간 스님처럼 보살행 실천하리만남은 인연으로 인하여 이루어진다. 아무리 간절한 바람이 있어도 지어놓은 인연이 없으면 만나기 어렵고 만났더라도 쉽사리 헤어지기 일쑤다. 때로는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였지만 누구보다 다정다감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많은 만남의 인연 가운데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항상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짧은 글로 처음 만났던 대만 자재공덕회의 증엄 비구니다. 언젠가 자재공덕회 같은 큰 조직을 결성하고 많은 곳에서 자비보살행을 하게 된 경위를 적은 글을 보았다. 스님께서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일로 병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한 원주민 여자가 병원 바닥에 피가 낭자한 것을 목격하였다. 다가가 보니 유산한
물욕 없는 단순한 성격의 도반 스님못 버리는 번뇌 속 내 생활 귀감 되어강원을 졸업하고 온통 선방에 갈 생각뿐이었다. 일타큰스님께서 그래도 중이 됐으면 율장이라도 한번 보라고 권하셨지만 그 간곡한 말씀은 들리지 않았다. 그동안 가졌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이 물건들이 정말 나의 것인가 의아스러운 것들이 부지기수였다. 모으고 모은 책과 버리지 못한 옷가지들,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두었던 물건들이 잡다하게만 느껴졌다. 그때는 참선할 때 필요할 옷가지 외에는 모두 버렸던 것 같다. 겨울옷은 두꺼워서 사과상자로 2상자, 여름옷은 1상자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번뇌마저 홀가분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첫 철 선원방부는 처음 출가 할 때만큼이나 설레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 주변을 돌아보면 수도 없이 많은 물건들과 책, 그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기적이 아니고는 해결 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일 수도 있지만 별다른 노력 없이 손쉬운 해결 방법으로 기적에 기대를 거는 것을 볼 수 있다. 종교계에서도 보면 기적을 강조하는 교리에 쉽게 젖어드는 것이 현실이다. 불교는 인과(因果)의 종교라고도 한다. 불교에 귀의하여 불자가되려는 사람은 절대 기적이나 우연한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 불교에 발을 들이는 순간 영원히 우연이나 요행, 기적과는 담을 쌓아야 올바르게 신행활동을 할 수 있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다. 수행은 코끼리 같이 한발 한발 실천실답 해야지 토끼가 뛰듯이 깡충 넘어 뛸 수는 없다. 그래서 실천행의 상징인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타고 있는 것이다. 처절할 정도로 인과를 믿은 분이 계셨다. 스님께 직접들은 얘기다. 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