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를 켜고 사찰명과 입종년월, 서류 위치 등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등록사찰 전산화 작업을 마치니 이번에는 승려명부가 눈에 들어왔다. 종무행정이라는 게 어떤 일인지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종무행정 서류들을 전산화하는 작업은 몇 주간 계속됐다. 그 일들이 마무리될 즈음 새로운 업무가 떨어졌다. 관음종 개산조인 태허 스님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는 법석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불과 4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 결정된 것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봉행한다는 것 뿐이었다.직접 부딪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어머니로 인해 부처님을 알게 됐고, 어머니의 영향으로 불자인 아내를 만나, 아내 덕분에 관음종 총무원장 홍파 스님이 주례를 섰고, 홍파 스님의 제안으로 지금 법인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으니 인연의 끈은 분명 존재하는 듯하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던 그 인연이 또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니 어느 하나 허투루 대할 수 없는 이유다.봉원사서 뛰놀며 불연 맺어아내 덕분에 홍파스님 주례어린 시절 서울 마포에 살았던 나는 어머니를 좇아 절에 가기를 좋아했다. 너른 절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무렵 조계종은 격변기였다. 1994년 의현 총무원장 체제에서 벗어나 종단운영에 대한 새로운 틀을 마련하던 시기였다. 그동안 접하지 않았던 환경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낯설기도 했지만, 종단개혁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내가 종무원이 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왠지 숟가락 하나를 슬쩍 얹는 것 같았다. 몇 번을 고사했지만, 집까지 찾아와 함께 일하자는 류지호(불광미디어 대표)의 권유에 총무원에서 근무하기로 결정했다. 성불회에서 활동하며 훗날 불교계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
1981년 봄, 거리에 걸린 연등은 어린 날의 기억을 소환했다. 불심 깊었던 어머니 손에 이끌려 포천 왕방산 산길을 따라 보덕사에 올랐던 일, 절에서 또래들과 뛰어 놀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련한 추억을 더듬으며 성균관대 불교학생회(성불회) 방문을 두드렸다. 써클룸은 초파일 준비로 한창이었다. 선배들 틈에 끼여 연등과 장엄물 제작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사찰을 찾아 수련회를 하고 선배들과 경전을 공부하면서 불교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불교학생회 생활에 심취할수록 ‘행정고시를 통해 경제관료가 되겠
신혼에도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봉은사에서 먹고 자는 날이 더 많았다. 일요일이 가장 바쁘고, 남들 노는 날이면 더 북적이는 곳이 봉은사였다. 딸 아이 둘을 뒀지만 휴일에도 아이들과 놀러 한 번 갈 수가 없었다.한 번은 집안 어른 환갑잔치가 있어 경북 고령에 내려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그날 영암 스님 방의 보일러가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잔치는 보지도 못하고 그 길로 올라와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설날 아침 봉암사 선방에서 보일러가 고장 났다며 급히 와 줄 수 있겠냐는 연락이 왔다. 설날이니 다른
닭 한 마리 훔쳐 먹고 절로 숨어들었다. 눈만 뜨면 배가 고팠던 시절, 동네 친구들이랑 철없이 벌인 일. ‘서리’가 놀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막상 문제가 커지니 같이 놀던 친구들 가운데 누구 하나 나서는 놈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덤터기를 쓰기로 하고 가까운 해인사로 도망쳤다. 몇 달 절에 숨어있다 슬그머니 내려갈 생각이었다. 고향집이 합천이니 큰절에 있다가는 오가는 동네 사람들에게 들킬 것이 뻔했다. 더 깊은 골짜기 용탑선원으로 갔다. 나무하고, 군불 때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가 70년대
월간 ‘불광’은 1980년대 초반까지도 조계사 서점 등 일부에만 들어갔다. 나는 125cc 오토바이 뒤에 ‘불광’ 잡지 500여권을 싣고 서점과 터미널을 찾아다녔다. 용산시외버스터미널, 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 불광동시외버스터미널, 동대문고속버스터미널 등을 수시로 오가며 가판대 판매원들을 설득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가판대에 우리 ‘불광’이 꽂힐 때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당시 출판문화를 이끌었던 종로서적, 양우당, 삼일서적 등에도 ‘불광’을 납입할 수 있었다.전국 사찰·서점 수시로 왕래새로운 환경 속 홍보에 고민그 무
지난해 11월1일은 내게 뜻 깊은 날이었다. 한국잡지협회가 주관한 제51회 잡지의 날 기념식에서 한국잡지언론상 광고부문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국 주요 총판과 서점을 돌며 영업하는 등 월간 ‘불광’ 안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였다. 또 광고주 요구를 적극 수용해 디자인 초안을 작성하고 디자인팀과 논의해 광고의 격을 높였다는 칭찬도 받았다. 고마우면서도 과분하다는 생각이다. 그날 사람들에게 밝혔듯 내가 38년간 이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직장 동료들과 주변의 많은 분들 덕분이다.고교 졸업 앞두고 불광
서원노인복지관 사무국장으로 14년을 일하며 분관인 기린봉노인복지관도 개원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인연이 찾아왔다. 전주 자림원과 자림인애원에 거주하던 중증장애인들이 전원조치(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것)돼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각종 문제가 불거지며 언론에 대대적으로 노출됐던 터라 쉽게 진행될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사회복법인 송광에서 운영하는 시설은 완주 정심원 한곳뿐이어서 그들을 수용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사장 도영 스님이 사회복지법인 송광의 사회적 역량을 확대하겠다는 발원을 했고, 전주 금선암 주지 덕산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고등학생 때 친구의 소개로 부안룸비니불교학생회에 가입해 청일암(현 혜원사)에서 ‘금강경’ 강의를 듣던 중 호기심이 생겼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데, 머무르지 않는 게 무엇이고 마음을 내라는 건 또 무엇인가.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주지 혜경 스님의 자비심 또한 발심의 요인이 됐다. 청일암은 당시 부안군에서 고아원 역할을 했다. 연고를 찾지 못한 미아를 맡아줄 수 있느냐는 전화가 자주 걸려오곤 했다. 그러다 보니 혜경 스님은 많을 때는 10명 넘는
2000년 10월 영등포 보현의 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매일 밥을 해 탑골공원으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탑골공원 주변에 노인무료급식소가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계종, 조계사, 조계종사회복지재단이 연합해 시설을 수탁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계종사회복지재단의 서울노인복지센터 수탁은 우리나라 정치·문화·경제 1번지인 종로구에 복지 거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불교계 복지사업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또한 불교계에서 최초로 위탁받은 노인복지센터라는 사실도 의미가 남달랐다. 특히 한국불교의 중심지인 조계사가 운영
서울노인복지센터 내 탑골미술관은 복지센터의 허파다. 이곳에 걸려있는 어른들의 그림은 바쁜 일상 속 작은 쉼표가 된다. 그림에는 노년의 여유로움과 늘그막에 찾은 인생 즐거움에 대한 열정이 묻어난다. 복지관을 다니며 생기를 찾은 어르신들의 모습은 도리어 나를 깨어나게 하는 활력소다.어려서 교회를 다녔다. 어머니는 불자였지만 나를 절에 데리고 다니지는 않았다. 자연스레 먹을 것도 많고 놀 것도 많은 교회 주일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도 미션스쿨로 진학했다. 익숙한 정서였지만 스스로 사고하기 시작하면서 성경의 내용과 교리를
조계종에서 노동위원회를 만들겠다는 소식을 듣고 총무원을 찾은 지 얼마 후,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노동위원회를 꾸리는데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2012년 6월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하루하루 노동위원회가 모양을 갖춰가는 게 마냥 좋았다. 그렇게 2달 후인 8월, 종호 스님을 위원장으로 노동문제를 전담할 조계종 종령 기구 노동위원회가 출범했다.쌍용차 10만배 법회 첫 행보노동자위한 오체투지 등 진행4년 만에 사회노동위로 개편여러 스님 상근하는 체계되길출범식 날, 노동위원회는 무차대회를 시작으로 노동자들의 아픔을 보듬고
신심 깊은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지극한 기도정성으로 세상 빛을 보았으니 ‘모태불자’라는 말이 맞겠다. 부처님 인연으로 태어났으니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절에 다니며 불교를 접했다. 10대 때는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청년회 활동에 심취하다 1984년 동국대 불교대학원에 입학했다. 학교생활을 하며 조계종 포교원에서 몇 달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도 했다. 초중고 교과서에서 종교편향 사례를 찾고 복사를 돕는 단순 작업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적을 두고 있는 조계종 총무원과의 인연도 사실 32년 전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리고 당시 아르바이트를
‘이제 현장에서 원 없이 조사할 수 있겠구나.’사찰문화재 일제조사 사업 진행불상 엑스레이 조사기법도 도입가야 할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었지만, 막상 조계종 문화유산 발굴조사단에 합류하게 되자 고민의 흔적들은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대신 현장이 주는 설렘과 긴장감이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것을 느꼈다. 같은 탑이어도 오늘 본 것과 어제의 그것이 확연히 다르다. 현장은 늘 어제까지의 지식과 관점을 오늘의 지평으로 옮겨주곤 했다. 더군다나 부처님 말씀 깃든 문화재들을 조사하는 일인데, 환희롭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이제
“미술사 중에 어떤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데?”미술사 관심이 신심으로 승화‘이불병좌상 연구’로 석사논문유홍준 선생님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민족미술협의회가 운영하던 ‘그림마당 민’에서 선생님 강의를 들으며, 대학 4년 동안 전공했어도 몰랐던 한국미술사 공부의 재미를 알게 됐다. 이후 선생님이 이끄는 답사에 함께하고 술도 나눠 마시며 인연을 쌓았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던 차에 선생님이 영남대에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가려 마음먹었다. “불상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부처님이 너무 좋아서, 부처님을 조각한
불교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공식 업무를 종료하고 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한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당장 총무부에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정신없이 면접시험까지 치렀다. 그리고 1995년 1월4일 나는 대한불교조계종 종무원으로 정식 채용돼, 조계종 호계원 사무처로 출근했다. 이후 호계원 사무처 4년, 총무원 문화부 3년, 봉축기획단 2년, 재무부 1년, 포교원 4년, 감사국 1년, 사회부 1년, 재무부 1년을 지나 현재 호법부에서 5년째 근무하고 있다. 모든 부서에서 맡은 일들이 불심과 애종심을 기반으로 한 종무 향상과 포교 원력의 토
출근하니 사무실 책상 앞에 못 보던 상자가 하나 있다. 열어보니 봉지 사탕이 가득하다. 정릉의 한 사찰 주지스님께서 “군포교에 사용해 달라”며 놓고 가셨다고 한다. 스님, 감사합니다. 더욱더 포교에 정진하겠습니다.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 행정관이자, 동시에 현직 포교사로 활동하는 내게 스님들의 이런 후원은 큰 격려이자 힘이 된다.보문사학생회서 불자로 거듭종단개혁 땐 사표내고 동참나는 소위 말하는 ‘모태불자’다. 어린 시절부터 신심 깊은 부모님과 함께 자주 사찰을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했다. 하지만 이는 환경적 요인으로 형성된
침묵의 시간을 몇 년간 보내야 했다. 불교활동가 활동은 끝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월도 잊은 채 지내던 중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창립 초 실무를 맡았던 부산불교실업인회 소속 임원진으로부터 다시 일을 맡아보라는 제안이었다. 당시 부산불교실업인회는 회원들 뜻을 모아 부산 중심가인 서면의 한 건물을 인수해 회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관 제일 꼭대기인 4층에 부산불교실업인회 전용법당 묘광선원을 불사하고 막 개원한 시기였다. 여법하게 조성된 법당을 관리하고 건물 내 사무실을 사용하는 각 단체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실무도
손사래를 쳤다. 불교 수도 부산에서 불교계에 몸담고 있는 재가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존경하는 선배들과 실력 있는 후배들에 비하면 내세울 것 없는 삶을 뭐라고 설명해야 된단 말인가. 거듭된 요청에 곰곰이 생각했다. 잘했든 못했든 불교 활동가에 대한 기록이 필요하다는 취지에 공감이 갔다. 지난 시간을 참회하고 앞으로 더 나은 삶을 발원하며 말문을 연다.불교언론인으로 사회생활 시작 단체·불교대학 등서 역량 펼쳐경북 청도가 고향인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절을 찾았다. 당시에는 법당에서 들리던 소리가 ‘천수경’인지 ‘반야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