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국왕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정성어린 공양을 올렸다. 특히 기원정사를 환히 밝히는 고관대작들의 화려한 공양등불은 이를 지켜보는 가난한 여인 난타에겐 부러움을 넘어 안타까운 마음까지 들게 하였다. ‘나는 전생에 무슨 업보를 지었기에 부처님을 뵙고도 등 하나 공양할 수 없을까.’하루 구걸하여 하루를 먹고사는 난타는 그날 온종일 구걸한 한 푼의 돈으로 주림을 해결하는 대신 부처님께 등불공양으로 올릴 기름을 사러 갔다. 구걸하던 노파가 기름을 사러온 것을 이상하게 여긴 기름가게 주인은 그 사연을 듣고 감동하여
개항기 중국에서 미국의 국명을 한문으로 ‘미이견(美利堅)’이라 하였는데, 이는 America의 몇 가지 음역 가운데 하나로서 ‘me’ 부분에 강세가 들어간 까닭에 첫 음이 생략된 것이다. 부파불교에서 최고의 수행자로 여기는 아라한(arhat)도 이와 유사한 경우로서, 전체가 음역된 것이 아라한(阿羅漢)이요 첫 음이 생략된 것이 나한(羅漢)이다. 그런데 무턱대고 첫 음을 생략하면 의미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있으니,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ābha)의 경우 ‘아미타(amita, 가늠할 수 없는)’에서 ‘미타(mita, 가늠할
‘성문’이란 말에는 ‘연각・보살’이란 말이 항상 뒤따른다. 연각(緣覺, 스승 없이 홀로 정법을 깨달은 성인)과 보살(菩薩, 깨달음을 이룬 중생)이 대승불교를 상징하는 명칭이라면, 성문(聲聞)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출가제자를 일컫는 말로 주로 사용된다. 보살이라는 용어는 불교 이전의 여타 인도사상에선 보이지 않다가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서부터 이미 보이기 시작하지만 그 개념이 강조되고 내용이 풍부해진 것은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다. 그런데 그에 반해 ‘성문’이란 개념은 약간의 의미 차이를 지니긴 하지
때는, 당시 새로 나왔다는 ‘딱풀’이 이야기에 등장하고 삼청교육대가 언급되니 1980년대 초반에 해당한다. 이는 지방의 어느 도시에 있는 성당에서 있었다는 일로 한 가톨릭신자가 본당 주임신부님에게 입은 은혜와 관련된 이야기이다.신혼 초의 한 젊은이가 의협심에 친구를 돕다가 삼청교육대까지 한 차례 다녀온 뒤로는, 그렇잖아도 넉넉지 않은 살림에 다니던 직장에서도 쫓겨나서 동네 작은 극장에서 허드렛일이나 거들며 울분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집안 살림을 책임지게 된 그의 아내는 항상 시장 난전에서 하루를 거의 보내다시피 하였지
우빠니샤드에 언급된 윤회설로는 오화설(五火說) 외에 그것의 발전된 형태인 이도설(二道說)이 있다.사람이 죽어서 나아가는 길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뉘므로 이도설이라 한다. 조도는 ‘조상[祖]의 길[道]’이란 의미로서, 죽은 후에 오화설에서 언급되었던 경로와 유사한 길을 거쳐 결국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오화설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겪게 되는 5차례의 큰 변화를 중심으로 설명해놓은 것이라면, 조도는 죽어서 거치게 되는 장소를 중심으로 조금 더 상세히 언급해놓은 것이다. 신도는 ‘신(神)의 길[道]’이란 의미로서,
근대 이전엔 대승불교권에서 윤회가 불교 고유의 사상이라 믿었다. 사실 윤회설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사상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던 주요 개념 가운데 하나로, 브라만교에서 고정불변의 실체로 간주하는 아뜨만(ātman)설과 더불어 인도인의 뇌리에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자리하고 있다. 어떤 실체가 존재하여 그것이 생사를 넘나들며 많은 생을 쳇바퀴 돌듯 돈다고 윤회(輪迴)라 하였으니, 아뜨만이 그 윤회의 주체인 것은 당연했으리라.그런데 브라만교의 유아론(有我論)을 무아론(無我論)으로 대체하며 성립된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윤회의 주체인 아뜨만
아수라장이란 아수라왕과 제석천(인드라)이 싸운 장소를 말하는데, 싸움 등으로 시끄럽고 혼란한 곳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 되었으며, 그러한 상태를 아수라판이라 한다. 우리에겐 불교를 통해 알려진 아수라는 악신인지 선신인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경전과 설화 등에 악마로 등장하기도 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의 한 무리로 산정되어 있기도 하다. 개별적인 신이 아니라 한 무리의 신족인 아수라는 험악하게 생긴 세 얼굴에 근육질의 여섯 팔로 표현되는데, 그 가운데 두 팔은 합장을 한 모습이다.인도의 신은 선신에 해당하는 데바(deva) 무리와
인도의 고대종교인 브라만교에서 가장 궁극적인 상태로 여기는 것은 그들이 절대존재이자 절대상태로 간주하는 브라흐만(Brahman)과의 합일(合一)인데, 이는 불교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해탈 혹은 열반과 유사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도가 해탈이나 열반에 대해 가지는 현실성에 비해 브라만교도(또는 힌두교도)가 브라흐만과의 합일에 대해 갖는 현실성은 상대적으로 높다. 그것은 불교도로서 해탈이나 열반을 성취하겠다는 염원은 어느 정도 믿음이나 교리의 틀에 갇혀있는 반면, 힌두교도들이 결국엔 브라흐만과 합일을 이뤄야 된다는 생각을
누구나 어릴 적 지겹게 들었을 이 말, 공부! 정작 자기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책상머리에서 몇 시간을 끙끙거리며 그날의 숙제를 말끔하게 끝내고는 ‘엄마! 나 공부 다 했어요!’라며 칭찬이라도 받을까 싶으면 ‘공부를 그리 찔끔 해놓고는 다했다고 그러냐! 공부는 평생 하는 거야’라는 말에 속이 상하곤 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 숙제 다 했어요!’로 레퍼토리를 바꾸었더니 ‘그럼 이제부터 공부해라!’ 하셨으니, 어린 마음에 공부가 뭔가라는 화두가 다 생길 것 같았던 기억이 있다. 화두란 게 있는지도 몰랐던 때이지만.생활 속에 들어와 있
불교의 비구를 비롯한 인도 수행자의 명칭을 몇 가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바라문(婆羅門, Brāhmaṇa)은 인도의 최대종교인 힌두교의 전신인 바라문교의 성직자이자 인도 사성계급의 최고위직으로, 요즘은 원음에 따라 ‘브라만’으로 발음한다. 인도인들은 고대로부터 그들이 절대상태로 여기는 브라흐만(Brahman)과 하나 됨[合一]을 흡사 불교의 해탈처럼 여기는데, ‘브라만’이란 명칭에는 ‘브라흐만이 되고자 하는 자’란 의미가 담겨있다.사문(沙門, Śramaṇa)은 전래의 브라만교에 대항하여 새롭게 일어난 신흥종교들의 출가수행자를 ‘사문
예전 어릴 때 허름한 동네식당 미닫이문에 한문으로 ‘白飯一切’라고 써놓은 것을 두고 ‘백반일체’로 읽느냐, ‘백반일절’로 읽느냐를 동무들과 옥신각신하며 다툰 기억이 있다. 그런 기억으로 남아있던 ‘백반’이 다시 뇌리에 등장한 것은 거의 5~6년이 지난 고등학교 중반기에 우연히 부처님의 생애를 배우면서이다. 부처님의 부왕 이름은 정반이요, 숙부의 이름이 백반이라 하였으니, 처음엔 그저 발음만 같은 것일 뿐이겠지 하였다가 나중에 한문까지 맞춰보고 동일한 글자임을 알고는 자못 신기해했었다.‘정반(淨飯)’은 ‘śuddha(깨끗한)+odan
만(卍)과 유사한 나치상징의 이름은 하켄크로이츠인데, 독일어로 ‘갈고리’를 뜻하는 하켄과 ‘십자가’를 의미하는 크로이츠의 합성어이다. 하켄크로이츠의 등장은 철학이 발달한 독일이기에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생긴 일이라 여기기도 하지만, 기실은 유럽 전역에 걸쳐 중세 이전부터 만(卍)에 해당하는 문양의 사용은 널리 전개되고 있었다.고대 게르만족의 룬 문자에서 하켄크로이츠가 유래되었고, 그리스어의 감마디온과 라틴어의 크룩스감마타도 만(卐)과 유사하며, 유럽 주요 민족의 왕실문양과 근대에는 몇몇 기업의 마크에도 주로 평화와 길상의 상징으
흔히 ‘절 만’으로 훈독되는 ‘卍’은 한자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 글자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은 인도에서 활발하게 사용된 고대의 문양 가운데 하나이다. 정확한 만(卍)의 형태는 아닐지라도 그와 유사한 형태가 역사상에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로 보이기 시작하였고 그리스의 고대문명에도 보이는데, 서쪽으론 북부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 주로 인도유럽어족인 게르만족 계통을 비롯하여 동쪽으로 인도의 아리안족에 이르는 문명에 주로 나타난다.만(卍)의 가장 원시형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하나의 문양으로 기록이 남아있는데, 사람이 북쪽을
‘장광설을 늘어놓다’란 것은 쓸데없이 번잡하고 길게 늘어놓는 말을 비유적으로 이른 것이다. 이 가운데 ‘장광설’은 한문으로도 ‘길고(長) 넓은(廣) 혀(舌)’로 되어 있으니 흔히 쓰이는 그러한 의미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 같지만, 실은 부처님의 훌륭한 외모를 묘사한 32가지 가운데 하나로서 그 내용도 원래는 긍정적이란 것을 아는 불자님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장광설의 본래 의미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간[長]과 공간[廣]에 걸쳐 부족함 없이 훌륭하단 것으로서, 신체 가운데 혀[舌]의 모양에 의탁해 나타낸 것이다.부처님의 육신에
“아내가 복부인이라 땅 투기를 하는데, 요즘 사정이 좋지 않은지 며칠 잠꼬대로 횡설수설하더니 결국엔 오늘 아침에 병원에 입원했어. 그 바람에 나도 시달려 잠을 설쳤다네.”친구와 대화하는 이 사람의 말 가운데 과연 몇 개의 불교용어가 들어있을까? 어차피 천년 이상 이어진 불교문화 속에서 있다 보니 알게 모르게 우리말 가운데 많은 단어들이 불교에서 유래된 것은 당연하리라. 야단법석(野壇法席)이나 이판사판처럼 이미 누구에게나 귀에 익은 말 외에도 뜻밖의 단어들이 제법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불교용어라는 것은 불자에게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일
부처님께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한 세 가지 교법으로써 음성으로 직접 설하신 가르침인 사성제 등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 성문승(聲聞乘)과, 십이연기를 직접 관찰하여 진제의 이치를 깨닫는 연각승(緣覺乘)과, 위없는 보리를 추구하고 모든 중생을 구제할 것을 소원하여 육바라밀을 닦는 보살승(菩薩乘)이 있다. 성문이란 말은 듣는 자란 의미의 싀라와까(śrāvaka)를, 연각이란 말은 홀로 깨달았다는 의미의 쁘라뜨예까붓다(pratyeka buddha)를 뜻 옮김한 것이며, 대승불교의 상징적 존재인 보살은 보디삿뜨와(bodhisattva)를 소
사리(舍利)는 산스끄리뜨어 샤리라(śarīra)를 소리옮김한 말로서, 시신 혹은 시신을 화장한 다음 수습된 유골[정확히는 다뚜(dhātu)임]을 가리킨다. 시신이나 유골인 유체(遺體)를 숭배하는 신앙은 인도의 역사와 함께한다. 돌아가신 성현의 유체는 인도에서 가장 훌륭한 숭배대상이며, 그 외에 유품이나 심지어 단순한 상징물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도 사리탑은 물론이요, 가르침을 상징하는 법륜(法輪)이나 깨달음을 상징하는 보리수 및 심지어 발바닥 문양인 불적(佛跡) 또한 보편적인 신앙대상이었는데, 외방민족의 교화를 위
세계의 여러 민족들이 나름대로 가꿔가는 다양한 문화만큼이나 지역별로 자리 잡은 장례문화는 삶을 마감하는 지혜로써 그 지역에 맞게 발전하였으며, 아울러 문화의 이동에는 어느 정도 장례문화도 함께 하였다.중국은 다민족이란 점과 그 넓이에 어울리게, 남부는 절벽에 관을 매다는 현관장(懸棺葬), 북부는 나무 위에 안장하였다가 수년이 지난 후에 유골을 수습하여 매장 또는 화장하는 수장(樹葬), 티베트 지역은 독수리에게 먹이는 조장(鳥葬) 등이 있었고, 중원지역은 고래로 매장이 주를 이루며 불교 영향의 화장도 추가되어 지금에 이른다. 일본은
열반(涅槃, nirvāṇa)이란 글자를 풀어보면 ‘불어서(√vā) 끈(nir) 것(ṇa)’이란 의미인데, 정황상 불어서 끈 대상은 ‘열기’가 되므로 ‘열기를 불어서 꺼버린 상태’를 열반이라 한다. 열기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가리키므로,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를 열반이라 하는 말은 그렇게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꼭 열기만이 괴로움일 수는 없다. 무더운 인도라는 인연이 있었기에 그렇게 표현될 뿐이니, 만약 불교가 시베리아에서 생겼다면 열반은 분명 ‘냉기를 훈풍으로 불어 없애버린 상태’라고 정의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열반은 열기로
시공을 초월한 부처님의 통칭으로 인식되는 ‘여래(如來, tathāgata)’란 이름에는 열 가지 별칭이 존재하는데, 이를 여래십호(如來十號)라 한다. 여래는 공양을 받을 만한 덕을 갖추었기에 응공(應供)이라 하고, 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아 일체의 지혜를 지녔기에 정변지(正遍知)라 하며, 깨달음의 지혜와 그 실천을 함께 갖추신 분이기에 명행족(明行足)이라 하고, 생사윤회의 강을 건너 피안으로 온전히 건너가신 분이기에 선서(善逝)라 하며, 이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신 분이므로 세간해(世間解)라 하고, 그 분보다 더 높은 분이 없기에 무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