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불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불교는 무상(無常 impermanence)을 고(苦 pains)의 원인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무상한 것에 집착하는 데서 고가 생긴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무상한 것은 고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상이란 변화다. 변화는 시간을 따라 일어난다.시간은 윤회론의 바탕이다. 윤회는 시간 순서에 따라 일어난다. 악행을 하고 지옥에 태어나지, 지옥에 태어나고 악행을 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불교 인과론(因果論)에 따르면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시간은 인과론의 바탕이기도 한다. 대부분의 인과(因果)는 시간에 따
시간은 변화를 통해서 측정한다. 시계는 물의 운동, 해의 운동, 톱니의 운동을 통해서 또는 원자의 운동을 통해서 시간을 측정한다. 여기에는 같은 시간에는 같은 양의 운동이 일어난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그런데 만약 아무것도 없다면, 즉 아무 물질도 에너지도 없다면, 즉 변하는 게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시간을 측정할 수 있을까? 아차, 시간을 측정한다는 것은 측정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므로 ‘아무 것도 없다’는 말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시간을 측정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시간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많은 종교인들은 우주의 비밀이 어디엔가 숨겨져 있다고 믿는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모든 비밀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그곳에 가는 방법이 비밀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그 비밀을 풀까? 종교적 수련을 통해서이다. 물론 그곳에는 이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한 해법도 보관되어 있다.하지만 설사 그곳에 간다 해도 문제이다. 그 비밀을 보기만 하면 판독(判讀)할 수 있을까? 이는 처음 보는 언어를 해독할 수 있다는 말과 뭐가 다를까? 그 비밀은 어떤 언어로 기록되어 있을까? 설사 그 언어를 안다 해도, 그 비밀 지식에 대한 기본 지식이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각 외로 깊은 생각을 했다. 그중에 ‘테세우스의 배(Ship of Theseus)’라는 것이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괴수(怪獸) 켄타우루스를 죽인 영웅 테세우스와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탄 배에는 서른 개의 노가 달려 있었는데, 아테네인들이 이 배를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유지·보수하였다. 그런데 부식된 헌 널빤지를 뜯어내고 튼튼한 새 목재를 덧대어 붙이기를 거듭하다 결국 모든 부품을 바꿔버리자, 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배가 그대로 남아있다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다른 배
종교인들 중에 진화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창조신을 믿는 기독교인들과 회교도들이 많지만 불교인들도 있다. 진제 종정과 송담 스님이 대표적인 경우다.기독교인들은, 복잡한 눈을 예로 들며, 눈이 설계자 없이 우연하게 생길 확률은 야적장에 쌓인 보잉747 비행기 부품들이 바람에 날려 조립되어 비행기를 만들 확률처럼 낮다고 주장한다.그런데 이들이 간과하는 점은, 생물의 변화가 복리라는 점과 변화기간이 45억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이라는 점이다. 시간과 공간이 일정한 규모를 넘어가면, 백년을 넘기 힘든 인간의 짧은 수명과 좁은 시야로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사람들은 부자들이 사람들을 엄청나게 착취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에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그런데 인구가 많아질수록 착취할 필요가 없어진다. 착취를 해도 많이 할 필요가 없어진다. 1억명의 사람에게서 일인당 만 원씩 착취하면 1조원이라는 거금이 생긴다. 물론 만원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큰돈일 수 있지만, 현대인들에게는 돈도 아니다. 현대의 기업이 돈을 버는 것은 좋은 물건을 만들어 싼값에 많은 사람들에게 팔기 때문이다. 삼성은 1년에
의식과 영혼은 같은 것이 아니다. 종교인들에 의하면, 의식은 영혼의 작용이다. 왜 의식은 몸을 따라 다닐까? 몸이 방안에 있으면 왜 방밖을 볼 수 없을까? 부산에 있으면 왜 서울을 볼 수 없을까? 신라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아메리카 인디언을 본 사람은 없다.영혼은 왜 몸을 따라다닐까? 다리가 잘려나가면, 영혼은 다리를 따라가지 않는다. 몸의 어느 부분이 잘려 나가가도, 영혼은 그 부분을 따라가지 않는다. 잘려나가고 남은 부분에 남는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 머리(뇌)이다. 머리가 잘려나가면 영혼은 머리를 따라간다. 머리가 잘려
의식과 영혼은 반드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류의, 육체에만 깃들어야 할까? 심장·허파·방광·간장·위장·대장·소장·지라·핏줄·힘줄·뇌가 있어야만 의식과 영혼이 깃들 수 있는 것일까? 이들 중 일부가 없어도 의식과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걸 보면, 이들이, 의식이 깃들기 위한 필수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설사 심장을 기계로 바꿔치기 해도, 간이 기능을 못해 기계로 투석을 해도, 여전히 의식이 있는 걸 보면, 의식과 영혼은 기계에도 깃들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 과학이 발달해 기억력·이해력·판단력·언어구사력 등을
수학에는 집합이라는 개념이 있다. 집합은 대상들의 모임이다. 현대 논리학과 분석철학의 창시자 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는 수학 기초론에 천착하여 집합론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날 러셀이 물었다.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것들을 다 모아놓은 것을 S라 하면, S는 자신의 원소인가 아닌가? 만약 그렇다고 하면 (즉 S가 자신의 원소라고 하면은) S는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므로 ‘S는 S의 원소가 되지 않아’ 모순이 생기고,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즉 S가 S의 원소가 아니
수학에는 안과 밖에 대한 문제가 있다. 평면상의 연속 단순 폐곡선은, 즉 끊어지지 않고 중간에 만나지 않는 닫힌 곡선은 평면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는 정리가 있다. 한 부분은 면적이 유한하고, 다른 부분은 면적이 무한하다. 예를 들어 방바닥에 놓인 동그란 고무줄은 방바닥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소위 ‘조르단 곡선 정리’이다. 자명해 보이지만, 그 증명은 난해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평면상의 어떤 점이 주어진 폐곡선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결정하는 문제이다. 문제는 곡선이, 동그란 고무줄과 달리, 수학적 방정식으로 주어지기에 눈으
공을 평행이동과 회전이동을 이용해서 같은 크기의 공 두 개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소위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이다. 이게 역설인 이유는 이렇다. 물체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거나 회전을 시켜도 부피는 변하지 않는다. 즉 입체를 모양을 변형시키지 않고 움직이면, 입체의 부피는 유지된다. 평행이동과 회전이동을 한다고 해서 부피가 변하지 않는다. 물체를 몇 조각으로 나누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돌려서 다시 조합을 해도 부피는 변하지 않는다. 자동차를 분해했다가 조립했더니 자동차가 한 대 더 생기는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금덩어리를 몇
[1495호 / 2019년 7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