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 쯤은 자신이 가는 길이 옳은 것인지 의문과 회의가 들 때가 있는 법이다. 스님들에게는 4년이나 9년 차에 한 번씩 그런 일이 종종 생겨난다. 잠시 지나가는 바람처럼 흘러 지나가기도 하지만 심한 홍역이나 열병을 앓기도 한다. 그럼 지체 없이 길을 나서 만행을 떠나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리라.어느 해인가 내게도 그런 날이 시나브로 찾아왔었다. 아니 예정된 인연이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무릇 모든 일은 그럴만한 연유가 있게 마련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란 소설의 첫 문장인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지만, 불
집을 나서면 길이 있다. 길은 우리네 삶과 닮았다. 늘 갈림길이 나타나며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 이 길이다 싶어 갔는데 길이 막혀 아까 포기했던 다른 길로 돌아갈 때도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듯 질주할 때도 있고 비포장 길을 만나 덜컹거리며 갈 때도 있다. 인생의 봄날처럼 경치가 좋은 곳에 차를 세워 놓고 꽃구경 할 때도 있고 꽃자린 줄 알고 갔다가 진흙탕에 빠져 곤욕을 치를 때도 있다. 차가 고장이 나면 견인차를 부르듯이 삶의 간난(艱難)에 허덕일 때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옷을 흠
벗이 있어 시를 보내면 그에 답시를 보내던 시절은 실로 행복했을 것이니 어느 날 조지훈이 벗인 박목월에게 ‘완화삼(玩花衫)’이란 시를 보냈다.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 //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 꽃은 지리라 //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 달빛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박목월은 이에 흥이 일어 ‘나그네’라는 시를 지어 보내니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
“있잖아, 몹시 슬퍼지면 해 지는 모습을 좋아하게 돼.” 생 떽쥐베리가 쓴 ‘어린왕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노을’하면 어린왕자가 생각났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은 워낙 작아서 고개만 서쪽으로 돌리면 언제든지 노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외로울 때만 보던 그 노을을 어느 날 외로움이 사무쳐 하루에 마흔세 번이나 바라본다. 그렇게 외로웠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던 어린왕자, 친구라곤 장미 한 송이밖에 없는 별에서 어린 왕자가 느낀 그 외로움, 고독…. 외로움과 고독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외로움이 환경이 주
“부모님께 올립니다.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키워주고 보살펴주신 은혜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그 은혜 제대로 갚지도 못하고 저는 출가합니다.……. 부디 저를 용서하시고 못난 아들 그리울 때면 열심히 공부해서 불도 이루기를 기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소서.” 밤새 가족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쓴 나는, 부모님이 주무시는 방 앞에서 아홉 번의 절을 했다. 낳아주신 은혜에 3배를 하고 길러주신 은혜에 3배를 드리고 마지막으로 혹시 돌아가시더라도 찾아뵙지 못할 것을 생각하여, 아니 어쩌면 부모님보다 내가 먼저
매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선택과 실천의 기로에 서 있다. 두 갈래의 길에 선 채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하고 절망하며 방황하는 것이 바로 인생길이다. 그 순간 어떤 길을 선택하고 걸어왔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일생은 달라진다. 그런 까닭에 나는 매 순간, 매일 매일이 선택이자 출가(出家)가 아닌가 생각한다.대학생활 동안의 기록들을 모아 ‘석천세설(石泉世說)’이란 작은 소책자를 만들고 부제로 미당 서정주의 “길은 어느 곳에나 있지만, 길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라는 싯구를 적었다. 그리고는 통도사 지형 스님께 한권 드리니 단 한 페이지도 펼치지
그해 겨울,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방황하던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이름 모를 암자에 들었다. 주인은 어딜 갔는지 없고 토담으로 지어진 낡은 암자에는 어둠만큼이나 적막감이 돌았다. 이것저것 따질 입장이 아니었던 나는 무작정 방에 들어가 통나무처럼 쓰러져 잠을 잤다. 얼마쯤 잤을까. 밝아 오는 여명에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야말로 이슬이나 피할 정도의 토굴 수행처였다. 정신이 조금씩 들면서 벽 한 곳에 붙어있는 하얀 종이에 시선이 쏠렸다. 가까이 다가섰다. 무슨 글을 써 놓은 것이었다. 천천히 한자 한자 읽어 나갔다. “소
나는 강원도 두메산골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절골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집 뒤편에 고려시대 절이 있었다고 하고 보물도 출토된 ‘물걸리 사지’가 바로 그곳이다. 그러니 불연(佛緣)이 아주 없지는 않은가보다.우리 아버님은 둘째로, 일찍 결혼해 군대를 다녀온 후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향을 떠나 강원도 양구로 이주하셨다. 당신은 우리에게 흥부인양 말씀하시고 우리도 그리 세뇌가 되었지만 딱히 그렇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온통 사방이 산과 물로 막힌 유배지 혹은 절해고도 같은 기억뿐이다. 높은 산
사바세계 동쪽, 해 뜨는 곳 오대산에는 ‘깨달음학교’가 있다. 이 학교에는 500명의 동자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데 문수보살이 교장으로 계셨다. 학생들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선재’라는 동자가 있었다. 선재는 부유한 장자의 집에서 태어나 선재(善財)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일찍이 모든 불보살님을 공양하고 선지식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훌륭한 구도자였다. 어느 날 문수보살이 선재의 선근을 알아보고 말씀하셨다. “그대를 위해 미묘한 가르침을 설하리라. 선지식을 구하여 친근히 하고 공양을 올리며 보살의 행이란
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마다 TV로 방영되는 ‘은하철도 999’라는 만화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공상의 나래를 펴며 우주여행을 하는 상상과 함께 신비의 여인 메텔의 존재는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나중에야 이것이 바로 화엄경 ‘입법계품’을 모티브로 한 창작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놀랍고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철이와 메텔의 우주여행’으로 요약되는 이 만화영화는 죽음과 기계문명, 노동과 환경, 인간복제와 자기 정체성 등 온갖 철학적 주제들을 다루기에 어른들이 되어서 봐야 비로소 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평가가 많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첫 해외 성지순례지로 미얀마를 갔다. 도반 스님들과 함께 어머니들을 모시고 갔으니 효도순례였던 셈이다. 아들을 출가시킨 어머니들과 출가 사문이 된 아들들이 한 자리에 모여 10여일 정도 순례를 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행복한 순례였다.여러 성지를 갔는데 유독 양곤에 있는 ‘차욱타치 와불상’이 기억에 남았다. 크기도 대단했지만 사진으로만 봐왔던 와불상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워있는 부처님은 모두 열반에 드신 모습인줄 알았다. 그런데 팔을 괴고 눈을 뜨고 있으면 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불기(佛紀) 2563년은 부처님의 탄생이나 성도가 기준이 아니라 부처님의 열반, 즉 불멸(佛滅)을 기점으로 한다. 왜 탄생이나 성도가 아니라 부처님의 열반을 기점으로 한 걸까? 그리 한 것은 부처님이 선포하신 진리의 말씀이 열반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있다. 열반을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佛敎)이 시작된 것이리라.인도 불적순례를 갔을 적에 쿠시나가르의 열반당에서 처음 부처님 열반상을 마주했을 때의 감동과 환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의 끝과 같은 절
“대왕이시여, 제가 이제 아기를 낳을 때가 되었습니다. 친정인 데바다하(천비성)로 가서 그곳에서 아기를 낳고자 합니다.” 천지에 봄꽃이 만발한 어느 날, 마야왕비가 정반왕께 이야기 했다. 정반왕은 기뻐하며 마야왕비의 출궁을 허락하였다. 마야왕비는 길을 나섰다. 카필라성과 데바다하의 중간에, 마야왕비 어머니의 이름을 딴 ‘룸비니’ 동산이 있었는데 ‘무우수’ 나무로 우거져 있었다. 이 동산을 지나던 왕비는 동산의 아름다운 모습에 끌리어 이곳에서 쉬어가고 싶어졌다. 왕비는 가마를 무우수 나무 숲 속으로 옮기게 하였다. 신하들은 가마를 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여정에 가장 많이 본 것은 언제 어디에나 서 있는 자작나무의 모습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철로 변에 무수히 많은 자작나무 숲의 행렬은 처음에는 경탄하다가도 곧 심드렁해지기 일쑤였다. 어느 때에는 마치 죽음의 푸가를 연주하는 듯하고 또 어느 때에는 차라리 몽환적인 느낌이 든다.‘동양의 파리’라는 이르쿠츠크에 내려 ‘예지네 집’이라는 한국 게스트 하우스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에 전설의 바이칼 호수를 구경하기 위함이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집 앞
내겐 잊을 수 없는 양말 한 켤레가 있다. 햇수로는 거의 20여년이 넘은 양말이다. 얼마나 질긴 나일론 양말인지 신어도신어도 떨어지질 않아 버리길 포기하고 옷장 깊숙이 보관중이다. 지리산 토굴살이를 거쳐 해인사승가대학에 공부하러 갔을 때다. 어느 날 다락에서 뒤꿈치가 구멍 난 양말을 꿰매고 있는데 지나가던 도반이 나를 보고 한 마디 던졌다. “스님, 궁상맞게 요즘 누가 양말을 꿰매 신습니까? 그냥 적당히 신다가 구멍이 나면 버려야지요.” 당시 나는 아직 멀쩡한 양말을 뒤꿈치에 구멍이 났다는 것만으로 버린다는 것은 수행자로서 도저히
‘금강경’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노라(如是我聞).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있는 기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들 1250인과 함께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식사 때가 되자 가사를 수하시고 바릿대를 들고 사위성으로 들어가시어 그 성 안에서 밥을 탁발하실 적에 차례로 빌어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진지를 잡수시고 나서 가사와 바릿대를 거두신 뒤 발을 씻으시고는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이 첫 문장 만으로도 이미 ‘금강경’을 설해 마쳤다고 할 수 있으리라.부처님께서 맨발로 탁발하고 돌아와 공양을 하신
어머님께서 하늘로 돌아가신지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간다. 지난 불교신문 ‘수미산정’ 코너에 ‘사모곡(思母曲)’이란 칼럼에서 우리 어머님의 이름처럼(玉蓮) 묘지 뒤의 산목련으로 다시 살아오실 거라고 쓴 적이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향집 뒤란의 아버님과 합장(合葬)한 묘지를 찾아갔다.어느 봄날, 달 밝은 날에 묘지 뒤편에는 못 보던 산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만발한 것이 어머님께서 환한 미소를 지으시는 듯했다. 마치 봄에 내리는 흰 눈처럼 바람에 흩날려 묘지 위와 내 가슴속에 소복이 쌓여만 간다.당대의 시선인 이태백의 시 가
봄이 오는 듯하더니 꽃샘추위가 매섭다. 남도에는 이미 봄꽃이 만발해서 상춘객들로 야단이다. 아직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한 봄을 마중하러 바람도 쐴 겸 길을 나서볼까 하다가 “에이, 거기가 거기지 뭐”하는 마음으로 그만두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 방문에 써 붙여둔 게송 한 자락으로 위안을 삼았다. “심춘막수향동거 서원한매이파설(尋春莫須向東去 西園寒梅已破雪)봄을 찾아 모름지기 동쪽을 향해 가지마라. 너의 집 서쪽 뜰에 이미 눈을 뚫고 매화가 피었다.” 원효 스님이 의상 스님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길에 나섰다. 가는 길에 날이 저물어
가야산 해인사 원당암의 혜암 큰스님께서는 평소 “수좌는 좌복 위에서 공부하다가 그 위에서 죽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이번 생은 없다 치고 원 없이 공부하다가 좌복에서 죽을 생각으로 정진할 일이다.홍성 연암산 천장암(天藏庵)은 한국선불교의 중흥조이신 경허성우 대선사와 그의 세 달인 수월, 혜월, 만공선사께서 머무셨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곳 대웅전을 우측으로 돌아가면 끄트머리 작은 방이 바로 경허선사께서 정진하시던 곳이다. 사람 하나 겨우 누울 정도의 작은 방에 좌복 하나가 놓여있다. 마치 허공이 경허마냥
누각이 시끌시끌하다. 내다보니 참배 온 분들이 누각 통나무 의자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몇 년 전 설해목으로 쓰러진 아름드리 소나무를, 화목으로 쓰기엔 아까워 적당한 크기로 잘라 누각에 의자용으로 갖다 놓았었다. 절에 와도 잠시 앉아 쉴 곳이 없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참배객들에겐 딱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 제일 좋은 토막은 가운데 탁자로 놓고, 중앙의 경치 좋은 자리에는 허리 받침대까지 있는 것으로 놓고 나니 제법 그럴싸한 ‘야단법석’이 되었다. 나는 평소 산책을 즐긴다. 선방 다닐 때에도 그 도량의 산책로가 마음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