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 의법출생분에 부처님께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칠보로 가득 채워서 그것으로 여래께 보시한다면 그로 인해 얻을 복덕이 많겠느냐?”라고 묻자 당연히 수보리는 많을 것이라 답한다. 수보리는 아울러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를 오가는 즉비논리에 ‘복덕’을 대입하여 언급함으로써 많다고 답한 자신의 답변이 무엇이 많다거나 적다는 유무(有無)의 상대적인 논리에 빠져있지는 않다는 것까지 말씀드린다. 그러자 부처님께선 그렇게 얻을 복덕보다 지금 당신이 일러준 가르침에서 사구게송 한 수만이라도 온전히 배워 알아서 남에게 일러줄 수 있다면
제10 장엄정토분의 마지막 문단에 부처님께서 “수미산처럼 큰 몸을 가진 사람은 그 몸이 크다 하겠느냐”고 묻자 수보리가 크다고 말씀드리며, 여래께서 몸이 아니라 말씀하셨기에 큰 몸이라 이름한다고 그 이유를 밝힌다. ‘A는 여래께서 A가 아니라 말씀하셨기에 A라 한다’라는 전형적인 즉비논리(卽非論理)의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문제는 이 구절에서 구마라집 스님은 ‘신(身)’이라 옮기고 현장 스님은 ‘자체(自體)’라 옮긴 단어에 대한 해석이다.범문은 “아뜨마바하바(ātmabhāva)는 여래께서 바하바(bhāva)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금강경’은 조계종단의 소의경전인 만큼 많은 법회에서 독송되고 또한 많은 불자들에 의해 가장 널리 독송되는 경전이다. 경전을 오랫동안 독송하다보면 독송인에 따라 획일적이진 않지만 마치 진언(眞言)처럼 유독 뇌리에 남는 문구가 있다. ‘금강경’에서 그러한 예를 찾자면 두 수의 게송을 비롯하여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 등과 더불어 ‘응무소주이생기심’을 꼽을 수 있다. 이 부분은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본을 기준할 때 그 앞에 놓인 ‘응여시청정심’과 함께 ‘금강경’의 대요를 밝힌 구절 가운데 하나로 취급된다. 해당 부분의 범어직역과 구마라집
앞서 제4묘행무주법에서 범어 와스뚜(vastu)를 언급하며 응무소주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 머무는 바가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라는 문구를 살펴보았는데, 비록 ‘응무소주행어보시’라는 여덟 글자로만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앞에 내용상 중요한 ‘어법(於法)'이 있기에 온전히는 “보살은 法에 있어서 머무는 바가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이다. 여기서 말한 ‘法’은 범어의 다르마(dharma)가 아닌 와스뚜(vastu)를 옮긴 것이다. 와스뚜는 육근(六根, 안이비설신의)의 대상인 육경(六境, 색성향미촉법)을 총칭하는 말로서, 변화
제10 장엄정토분 첫머리에 부처님께서 “여래가 옛적에 연등 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에 관해 얻은 것이 있겠느냐?”라고 물으시자 수보리는 얻은 것이 없다고 말씀드린다.‘금강경’이 총 32분으로 단락이 지어진 것은 경전이 저술될 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중국의 남북조 양나라의 소명태자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비록 내용상 32분의 단락이 경전내용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매 분(分)마다 글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할 필요는, 아니 어쩌면 그래서는 안 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제9 일상무상분에는, ‘금강경’이 반야부의
제9 일상무상분 말미에서 수보리는, 아라한이 되었어도 아라한이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은 상(相)에 집착하는 것이기에 그 어떤 아라한도 자신은 아라한이 되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고 부처님께 말씀드린다. 그리고는 그 실례로서, 여래께서 수보리 자신을 무쟁삼매를 성취한 자들 가운데 으뜸이라 말씀하셨는데 정작 자신은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기에 여래의 말씀이 참될 수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우리나라 말로 옮겨놓고 보니 수보리 자신이 자신의 일을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상(相)을 가진 것이 되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금강경’ 제9 일상무상분에 성문승(聲聞僧)을 수행계위에 따라 넷으로 분류하고 각각을 다시 향(向)과 과(果)로 나눈 사향사과(四向四果)가 언급되어 있는데, 둘씩 짝을 지어 넷이 되기 때문에 사쌍(四雙)이라 하고 통틀어 여덟 계위이기 때문에 팔배(八輩)라고 한다. 특정한 순간에 어디로 향하도록 방향을 틀게 된 것을 향(向)이라 하는데 그 마음은 오직 한 번만 일어나며, 방향이 정해져 나아가다 얻은 결과를 과(果)라 하는데 그 마음은 반복해서 일어난다. 향(向)은 범어로 마르가(mārga, 道, 길)이므로 도(道)라고도 일컫는다.우선
‘금강경’의 제8 의법출생분 말미에 “만약 어떤 이가 이 경에서 네 구절로 된 게송[四句偈頌]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에게 일러준다면 그 공덕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채워놓고 여래께 공양 올리는 것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금강경’에서 ‘사구게송'을 언급한 것은 제8분을 비롯하여 제11분 등 총 6차례이다. 경문에서 ‘사구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受持乃至四句偈等)'라고 하였으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설해져 ‘금강경’ 같은 경문이 성립되면 당연히 그 경문 전체를 수지독송(受持讀誦)하고 위타인설(爲他人說)해야 그 공덕이 엄청날
‘금강경’의 구마라집 스님 한역본에 ‘수지독송 위타인설’ 유형의 문구가 제8 의법출생분을 시작으로 마지막 32분에까지 13차례 등장한다. 해당 문장의 내용은 “최소한 ‘금강경’의 4구 게송만이라도 잘 받아 지녀 독송하였다가 다른 이를 위해 설해줄 수 있다면 그 공덕은 엄청날 것”이라는 의미다. 얼마만큼 엄청나냐면 태양계의 10억 배에 해당하는 삼천대천세계를 일곱 가지 보석으로 가득 채워놓고 여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마다 맘껏 공양을 올려서 몽땅 써버렸을 때의 공덕보다 더 크다 하였으니 중국인의 과장은 산수라면 인도인의 과장은 수학
‘A는 A가 아니기에 A라고 한다’라는 ‘금강경’의 특이한 논조는 중국의 선불교에서 혜능의 대법론과 백장의 삼구론 등을 통해 실수행에 적용되었다. 현대 일본의 선학자인 스즈끼는 불립문자를 기치로 내세우는 선(禪)을 설명하며 이 논증방식을 활용하고 그것을 ‘즉비논리’라 일컬었다. 그는 마음을 절대심(絶對心)과 상대심(相對心) 두 가지로 해석하되 결국 그 둘이 다르지 않음[不二]을 논증하고, 절대적 측면에선 ‘마음이 곧 부처지만[卽心卽佛] 상대적 측면에선 마음이랄 것도 부처랄 것도 없다[非心非佛]’하여 이 둘 또한 다르지 않다[不二]한
‘금강경’에는 거의 40군데에 이르는 곳에 반복되는 유형의 문장이 하나 있다. 제5분에도 유사형태가 등장하지만, 범어 원문을 기준으로 볼 때 온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제8 의법출생분에서 시작되니, “여래에 의해 복덕무더기라 언급된 그것은 여래에 의해 복덕무더기가 아니라 언급된 까닭에 여래께서 복덕무더기라 이름하고 계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언급된 ‘복덕무더기’를 A로 대체하면 간략하게 “A는 A가 아니기 때문에 A라 한다”라는 다소 의아한 문장구조이다.‘A’로 언급된 내용은 제5분의 신상[身相, 모습 갖춰짐] 혹은 제8분의 복덕취[
‘무위(無爲)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혹은 ‘우리의 생각’이 어디에 속해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최소한 ‘무위(無爲)'라는 개념을 공유하는 범주 안에서도 불교도인가? 유가의 사람인가? 도가의 사람인가?에 따라, 그리고 불교도 안에서도 중국의 시각에서? 아니면 인도의 시각에서? 등에 따라.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금강경’ 제7 무득무설분 말미에 설해진 “성인은 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수보리의 대답에 대해서이니, 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인도
제7 무득무설분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수보리여! 네 생각엔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다고 여기느냐?”라고 물으신다. 수보리는 당연히 “제가 알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할 만한 그런 법은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있으니, 여래께서 그럼 무엇을 증득했느니 못했느니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증득하였느니 혹은 증득하지 못하였느니 하는 상대적인 유무로 답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 무(無)인 공(空)으로 답한 셈이다.그렇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범어를 풀어보면 ‘an[否定]utt
제6 정신희유분의 후반부에서 부처님께선 말세라도 이미 많은 선근을 쌓은 중생은 ‘금강경’을 읽으면 깨끗한 믿음을 낼 것이라 말씀하시며 그 이유로 그러한 중생은 4상(四相)이 없음은 물론 법상(法相)이나 비법상(非法相)도 없기 때문이라 말씀하신다. 4상은 앞서도 언급하였기에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을 것인데, 법상과 비법상도 그에 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4상을 ‘아뜨만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기는 생각이 아상이요, 뿟갈라를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기는 생각이 인상이며…’라고 풀이하는 것처럼 법상과 비법상을 풀이해본다.어떤 이들은
제6 정신희유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수보리가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가르침을 듣고 ‘참되구나!’라는 믿음을 낼 중생이 조금이라도 있겠습니까?”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부처님께선 “그렇게 말하지 말라! 말세중생이라도 그전에 이미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심은 중생이라면 이 가르침을 듣고 ‘참되구나!’라는 깨끗한 믿음을 낼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은 가르침이란 ‘금강경’에서 설한 가르침이니, ‘금강경’을 읽으면 그 가르침이 참되다는 믿음이 샘솟는다는 말씀이다. 비록 ‘많은 생에 많은 부처님 처소에서 선근을 심은 중생
제5 여래실견분의 전반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몸의 모습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어보시자 수보리는 ‘몸의 모습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수보리의 답변에 동조하시며 후반의 가르침으로 이어지는데, 우선 ‘몸의 모습[身相]으로써 여래를 보다’라는 문장을 어떻게 풀이할지 살펴본다.해당 부분의 범어원문을 직역하면 ‘모습[lakṣaṇa]의 갖추어짐에 의해 여래께서 보여져야 한다’라는, 우리 말로는 다소 어눌한 수동문으로 되어 있다. ‘모습’이란 인도 전래에 성인이 되면 몸에 드러나는 32가지
제4 묘행무주분의 ‘응무소주행어포시(應無所住行於布施, 머무는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와 제10 장엄정토분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이란 글귀는 ‘금강경’의 유명한 문구 가운데 하나로 자주 거론된다. 이렇게 두 문장을 놓고보면 완전한 내용을 갖춘 것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머물다’라는 동사는 타동사이므로 당연히 목적어가 필요하다. 즉 ‘집에 머물다' 등으로 어디에 머무는 지에 대한 내용이 빠져있다. 그러면 한문 원문에 해당 내용이 빠져있는가? 그렇지 않다. 바
‘금강경’의 두 곳에 범어로 ‘와스뚜(vastu)’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문장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제4 묘행무주분으로 구마라집 역은 “응무소주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 머무는 바가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로 되어 있으며, 두 번째는 제14 이상적멸분으로 구마라집 역은 “심주어법이행보시(心住於法而行布施, 법에 머문 채 보시를 행한다면…)”로 되어 있다. 현장 역은 앞의 것이 “부주어사응행보시(不住於事應行布施, 일삼음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로 되어 있고 뒤의 것이 “위타어사이행보시(謂墮於事而行布施, 일삼음에 떨어져
우리가 흔히 읽는 ‘금강경’의 구마라집 스님 한문 번역본엔 아・인・중생・수자(我・人・衆生・壽者)의 4상이 언급되어 있으며, 전해지는 주요 범어판본 역시 인상(人相)의 순서만 제일 나중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4상만인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현전하는 ‘금강경’의 현장 스님 번역본은 거기에 5상이 더해져 9상으로 되어 있으며, ‘대반야경’ 등에도 9상을 언급하고 있다. 더해진 5상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사부상(士夫想, puruṣasaṁjñā)은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사람, 즉 근본인간(puruṣa)이 고정불변의 실체로 존재
아뜨만(ātman)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상정하여 그것은 영원불변하다 여기며, 우리가 절대상태인 브라흐만(brahman)에 이를 때까지 그 아뜨만이 주체가 되어 윤회를 거듭한다는 것이 브라만교의 생각[有我論]이다. 불교에선 절대상태인 브라흐만은 ‘해탈’이란 개념으로 흡수하였지만 아뜨만을 비롯한 그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無我論]고 하여 모든 것은 인연의 화합으로 생겼다 사라질 뿐이라 여긴다.브라만교가 부처님 시기를 전후하여 일어난 신흥종교들의 사상에 밀려 쇠퇴하였지만 불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상들은 그래도 ‘유아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