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마차를 탄 담마딘나는 비구니 처소로 향했다. 기뻐하는 남편의 표정과 무심히 흐르는 풍경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문득 지난 며칠을 되돌아보았다. 출가를 결정한 것은 남편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담마딘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슬픔과 분노의 감정에 휩싸여 안절부절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왜 고통받아야 하는 것인지 억울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이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담마딘나는 남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비구니 처소에 도착해 황금 마차에서 내려 옷을 갈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어 남편의 얼굴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남편의 모습에, 허튼말을 들은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남편이 나를 시험하는 건 아닌지….“저에게 재물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당신의 사랑과 당신을 향한 내 사랑만 있으면 된답니다. 제 마음을 알아보겠다는 속셈이었다면 당장 거두어들이세요.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를 갖는다 해도 저는 흔들리지 않으니까요.”차분하게 말을 하는 동안 담마딘나는, 새삼 자신이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위대한 스승들이 붓다라는 분께 귀의하셨다고 하는구려. 새파랗게 젊은 모양인데 어찌된 연유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구려. 오늘밤 왕이 주관해 그분 법회를 여신다고 하는데, 내 가서 얼굴이나 보고 오겠소.”아침식사를 하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건넨 말에 담마딘나는 적잖이 놀랐다. 재물을 모으는 재주가 남달랐던 남편 위사카는 어렸을 때부터 시장바닥에 뛰어들어 돈을 긁어모으다시피 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재물은 짧은 시간 만에 남편을 나라 최고의 거부로 만들었다. 왕궁 못지않은 호화로운 집을 올리고 수백 명의 하인을 부릴 정도로 돈이 넘쳐
세 번 절을 올리고 발등에 입을 맞춘 뒤 물러나 앉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붓다의 미소는 햇살처럼 자애로웠고 꽃처럼 평화로웠다. 지금껏 번뇌해왔던 순간도 멀리 달아나 버리는 듯했다. 왕자들에게 가식적인 웃음을 지을 때마다 내 얼굴은 어땠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궜다.“고귀한 붓다시여. 부모에게 버림받고 남자에게 거짓 웃음을 팔아야 하는 삶이 고통스럽습니다. 이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노란 망고를 주렁주렁 매단 나무의 그늘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대중이 일순간 침묵했다. 붓다의 미소가 더욱
왕궁 안에 암바팔리의 거처가 마련됐다. 왕자들은 앞다투어 진귀한 장식품을 들고 찾아와 거처를 꾸몄다.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한 암바팔리의 방은 눈이 부셔 시선을 제대로 두기 힘들 지경이었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자 왕자들이 차례로 암바팔리를 방문했다. 암바팔리를 독차지하겠다며 전쟁마저 불사할 기세로 으르렁거렸던 왕자들은 어느덧 이 상황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바이살리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한편,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매일 찾아오는 다른 왕자를 남편처럼 대해야 하는 기이한 상황 속에서도 암바팔리는 꿋꿋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
“아저씨. 나는 어디서 태어났어? 엄마랑 아빠는 어디에 있는 거야?”망고가 탐스럽게 영근 여름의 어느 날, 정원사의 어깨에 매달린 암바팔리가 머뭇대며 물었다. 이제 겨우 다섯 살 된 아이의 질문이었지만 말투는 자못 진지했다. 놀란 정원사가 고개를 돌려보니 얼굴엔 아이답지 않은 슬픔이 가득했다. 언젠가 오늘 같은 날이 반드시 올 것을 알았기에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고민해오던 터였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리에 선채로 하늘만 바라보았다. 영원히 숨길 순 없는 노릇이겠지….“암바팔리야. 여기가 네가 태어난 곳이란다. 태어난 지 하
빔비사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랑하는 둘째 왕비가 붓다의 말씀을 받들어 자만심을 버리길 원해왔지만 출가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 당황하여 뒷짐을 지고 하늘만 바라보다 케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허영의 탁한 기운은 사라지고 평온함만이 가득했는데, 죽림정사에 도착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치 성자를 앞에 둔 듯해 빔비사라는 자못 경건해지기까지 했다. 붓다의 설법을 듣고 한 순간에 깨달음을 이룬 이를 많이 봤지만 케마가 그러리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그대가 여기까지 온 이상 어찌 출가를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소. 기
죽림정사의 풍경은 남편의 말 그대로였다. 케마의 부탁대로 붓다가 제자들과 탁발하러 나간 시간에 맞춰 왔기에 간간이 새들의 지저귐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시선 닿는 곳곳에 꽃이 피어 있어 향기만으로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숲 속의 오솔길로 들어가 짙푸른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산책했다. 지금껏 살아온 궁궐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이곳의 아름다움은 그것과 달랐다.처음 가져보는 느낌에 취해 느릿느릿 걸으며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케마는 저도 모르게 수행자들의 처소 인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붓다가
아침이 밝아왔다. 부스스한 얼굴로 거울 앞에 달려가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 파리조차 미끄러질 듯 반질반질한 윤기가 황금색 피부를 탐스럽게 덮었고, 잘록한 허리 위아래로 풍만한 가슴과 통통한 다리는 매끄러운 굴곡을 그렸다. 홍조를 띈 두 볼이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슬며시 지은 미소를 더욱 짙고 깊게 만들었다. 거울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이 어제와 그대로인 것을 확인하곤 만족감에 실실 웃음이 나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새하얀 목덜미에 향수를 뿌린 뒤 시녀에게 문을 열게 했다. 마가다국 빔비사라왕
첫 번째 남편은 어머니와, 두 번째 남편은 딸과 정을 통했다. 웁팔라반나는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첫 번째 남편과 엄마의 관계를 알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딸의 존재 때문이었다. 누워만 있던 아이가 옹알이를 시작하고 몸을 뒤집고 일어나 걷고 뛰는 모든 과정이 기쁨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지옥 같은 집에서 7년이라는 세월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만큼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런 딸이 지금 남편의 두 번째 부인이 되어 나타나다니. 누굴 탓해야 하나, 감도 잡히지 않았다. 차마 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어찌 나에게 이토록 더럽고 추악한 일이 들이닥쳤단 말인가. 소문이라도 난다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저 달빛에 몸을 녹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 생각할수록 기막힐 뿐이어서 차라리 집을 나가 모든 걸 망각해 버린 척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고 싶었다. 하지만 담장 너머 아득한 밤거리를 바라보던 웁팔라반나의 눈에 사랑하는 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울던 딸은 어느새 곤히 자고 있었다. 지금 집을 나가면 지옥 같은 이 집에서 딸이 홀로 남겨질 게 뻔하다. 밤거리와 딸을 번갈아
웁팔라반나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사위성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이전까지 웁팔라반나를 떠올리며 밤을 지새던 남성들이 이번엔 쓰라린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웁팔라반나는 그만큼 아름다웠고 어디서든 이목을 집중시켰다. 검디검은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깊은 눈빛은 사람을 홀리는 듯했는데, 성정까지 단아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게다가 사위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잣집의 외동딸이라니, 웁팔라반나를 아는 이라면 한 번쯤은 그녀의 남편이 되는 꿈을 그려보곤 했었다.아름답고 단아한 웁팔라반나첫눈에 반한 부호아들
밧다는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고 알듯 말듯 한 미소를 지었다. ‘유명하다는 스승들과 논쟁을 벌여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나에게 감히 도전하겠다니. 그것도 고작 아이들을 시켜 나뭇가지를 짓밟게 했단 말인가. 어쭙잖은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데 겁은 났던 모양이군.’ 밧다의 얼굴 표정에 교만함이 한가득 떠올랐다.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외쳤다.사리풋타에 질문 퍼부은 밧다차분한 그의 대답에 말문막혀붓다 만나 연기의 이치 깨달아“사리풋타라는 어리석은 자와 나와의 논쟁을 보십시오. 나를 따라오면 사리풋타라는 어리석은 자
밧다는 산과 들을 구름처럼 떠돌았다. 아침에 눈을 떠 이 마을 저 마을 둘러보다 어스름 내릴 무렵엔 아무 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청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원하는 무엇이든 거머쥐며 살았던 지난날이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지워졌다. 머릿속만이 아니라 마음에서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편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순간과 살기 위해 그런 남편을 죽였던 순간의 충격이 그간 욕망을 순식간에 뽑아 버렸다.산과 들 떠돌다 승원 입소머리깍고 음식 섭취도 줄여고통원인 찾아 세상 헤매다사위성에서 사리붓다 만나한동안 홀가분한 마음으로 유랑했다. 갑작스럽게 닥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장으로 끌려갈 때, 천신에게 기도했어. 살려주신다면 공양을 바치겠다고. 내 이렇게 살아났으니,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천신이 가만히 있겠나. 나를 위해 공양을 마련해 주시오. 준비가 끝나거든 같이 갑시다.”살기 가득한 사투카 밀치며욕망의 부질없음 깨달은 뒤하인들 보낸 후에 수행 결심사투카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밧다에게 말했다. 결혼 후, 하루 종일 바깥만을 나돌 뿐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남편 때문에 속이 바싹 타들어가던 터다. 한량 같던 남편이 처음으로 건넨 반듯한 말에 밧다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 저잣거리를 곁에 둔 거대한 저택의 가장 높은 층 창문이 빠끔히 열렸다. 한 여인이 윤기 나는 머릿결을 찰랑거리며 얼굴을 내밀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사형수를 집행장까지 이송하는 행렬과 구경하는 사람들이 엉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의 것이나 훔치고 다니는 비열한 자식!” “저 도적놈을 어서 죽여라!”사형수 보고 결혼 결심한 딸딸의 고집 꺾지 못한 부모님보석금 내고 집으로 데려 와멀리서 사형수를 지켜보던 여인의 얼굴에 홍조가 올라오더니 식은땀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울퉁불퉁한
“보이는가, 파타차라여. 그대의 가족은 세상을 떠났다. 그대 때문도, 세상 때문도 아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인연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대의 가족은 인연이 서고 지는 자리에서 태어났고 떠났다. 그러니 파타차라여. 죽은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말라. 그 대신 자신을 청정하게 하고 깨어있게 하라. 열반으로 나아가라.”모든 것은 머물지 않고 변하며 우주만물 인연따라 움직이니해가 뜨고 지듯이 해탈 이루어파타차라의 한 생애가 동쪽에서 떠올라 하늘 가운데로 올라선 뒤, 낙조가 길게 늘어진 서쪽으로 빠르게 떨어졌다
기억을 더듬는 파타차라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던 빗속에서 피를 토하며 고통스럽게 죽은 남편, 세상에 나온 지 몇 시간도 안 돼 독수리의 발톱에 찍힌 채 허공으로 사라진 둘째, 범람한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어미의 눈을 간절히 쳐다보던 첫째. 자던 중 순식간에 무너진 집에 깔려 비참한 죽음을 맞았을 부모. 모든 일이 하루 만에 일어났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보다 더 기구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허망할 수 있을까. 손 뻗으면 당장이라도 잡힐 것 같은 얼굴들을 이제
“여보, 저기 봐. 먹구름이 몰려오네. 한바탕 큰 비가 내리겠어. 오늘은 글렀으니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하늘이 개이길 기다리는 게 어떨까.”폭우 속에 고향집 돌아가다남편· 아들 모두 잃고 실의고향집선 부모가 비명횡사남편의 말처럼, 지평선 언저리의 시커먼 구름이 빠른 속도로 하늘을 물들여가고 있었다. 큰아이는 간간이 들리는 천둥번개 소리가 무서웠는지 그대로 주저앉아 울먹거리기만 했다. 파타차라가 원망 섞인 눈빛으로 먹구름과 남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궁색한 생활로 돌아갈 순 없는데, 저들은 어찌 나를 가로막는 것인가. 파타차라는 입술
파타차라의 일상은 변함없었다. 호화로운 음식과 옷이 매일 방으로 배달됐고, 파타차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순순히 먹고 입었다. 부모를 대하는 것 또한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꼭대기 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올 때마다 상냥한 미소로 맞이했다. 이따금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잠자코 들을 뿐이었다. 고분고분한 딸의 모습에 아버지는 늘 흡족히 웃으며 방을 나가곤 했다. 파타차라의 의도대로였다.아버지 원망하며 다 버리고세상과 타협 않겠다 했지만가난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주인님께서 아가씨의 남편감을 고르셨어요. 높은 계급에 재물도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