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시의 온몸은 핏기가 가신 듯 허옇게 변했다. 창백한 얼굴 위로 가냘픈 눈물 자국이 길게 늘어졌다. 부모의 전갈을 읽었던 순간, 자신을 괴롭혀 왔던 수치스러움과 분노는 모두 사라졌다. 대신에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흩어져 붙잡을 게 없다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세 번의 결혼 생활 동안 단 하나라도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것을 탓하며 그럭저럭 버틸 순 있겠는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잘못은 없었다. 이시다시는 이토록 모진 생을 스스로 마감해야겠다고 결심했다.하지만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두 번째 남편은 자신을 피할 뿐 아니라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대놓고 욕을 쏟아냈다. “형편없는 여편네 같으니라고. 짜증나는 당신의 그 얼굴을 내 앞에서 당장 치워! 꼴도 보기 싫으니까!” 첫 번째 남편도 자신을 피해 다녔지만, 그나마 험한 말을 뱉진 않았다. 이시다시는 지금의 남편이 욕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폭력을 휘두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두려웠다. 답답한 것은 이번에도 남편이 자신을 미워하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두려움에 떨다가도 용기를 내어 이유를 물어보면 남편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평소
이시다시의 부모는 근방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지만 인색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함부로 화를 내지 않았으며 사람을 위아래로 구분하지 않고 진솔하게 대했다. 빈궁한 이에게 가진 것을 나누는 일이 잦았는데, 도움을 요청받으면 언제든 음식과 재물을 광주리에 듬뿍 퍼담아 건네곤 했다. 계급 혹은 빈부 간의 경계가 송곳처럼 날카롭던 시절,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여져 나라 전체로 명성이 퍼져나갔다.이시다시는 부모의 성품을 흡수하며 성장했다. 하인을 아랫사람으로 인식하는 대신에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바라볼 줄 알았으며 재물은 움
그날 이후 푼니카는 기회 될 때마다 기원정사로 가서 붓다의 설법을 들었다. 하녀의 신분이어서 기원정사를 매일 방문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심을 더욱 북돋게 했다. 악업을 녹이고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간절함의 크기만큼 깊고 고요한 선정에 잠겨 붓다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마음에 새겼다. 열심히 정진한 결과, 푼니카는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냈다. 스스로를 옭아맸던 세 가지 번뇌를 내려놓았고 더 이상 악업에 물들지도 않았다. 미소 머금은 얼굴과 부드러운 말투, 배려 어린 행동은 누구보다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험상궂은 표정으
아버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머니에 대해선 확실히 아는 게 있었다. 자신처럼 하녀였다는 사실이다. 수닷타 장자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 푼니카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다. 일을 야무지게 하는데다가 성격도 무던해 많은 이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푼니카가 걸음마를 떼기 전에 병마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기에 어머니에 관한 기억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푼니카를 안쓰럽게 여긴 주변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주곤 했어도 부모가 없다는 사실은 늘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옛 기억을 꺼낼 때마
붓다에게 귀의한 시리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설법을 듣고 수행했다. 어느 날부터는 욕망에 젖어 흥청망청했던 지난날도, 추악한 악행을 저질렀던 순간도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붓다의 법을 알게 해 준 소중한 인연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난생 처음 찾아온 평화에 한없는 행복을 느끼며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한 가지 서원을 세웠다. 죽는 날까지 매일 8명의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겠다는 서원이었다. 시리마는 유녀로 생활하며 모은 막대한 재산을 공양을 준비하는 데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산과 바다에서 나는 진귀한 음식
뜨거운 기름을 웃타라의 얼굴에 쏟아부은 시리마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이게 바로 네 죗값이다! 얼굴이 형편없이 망가졌으니 남편은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야! 하하!”하지만 웃타라에게선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고, 오직 자신의 웃음소리만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시리마는 웃음을 멈추고 웃타라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방금 전까지 펄펄 끓고 있던 기름이 차갑게 식어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웃타라는 자신을 향해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형용하기 힘든 공포가 밀려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시리
낮은 시리마에게 항상 지루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한가로이 잠을 자거나 뜰을 산책해 보아도 지루함은 도무지 달래기 어려웠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과 활기찬 거리의 분위기 역시 따분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길고 긴 낮의 따분함은 어스름이 내릴 즈음부터 햇살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한다. 하늘을 물들인 노을처럼 빨갛게 화장을 하고, 취객의 술주정처럼 요란하게 몸을 치장하고 나면 시리마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떠오른다. 그녀는 왕사성에서 제일가는 유녀. 온갖 금은보화를 손에 쥐고 자신을 찾는 남자들을 바라볼 때마다 시리마는 짜릿한 쾌감을
황금 마차를 탄 담마딘나는 비구니 처소로 향했다. 기뻐하는 남편의 표정과 무심히 흐르는 풍경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문득 지난 며칠을 되돌아보았다. 출가를 결정한 것은 남편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담마딘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슬픔과 분노의 감정에 휩싸여 안절부절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왜 고통받아야 하는 것인지 억울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이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담마딘나는 남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비구니 처소에 도착해 황금 마차에서 내려 옷을 갈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어 남편의 얼굴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남편의 모습에, 허튼말을 들은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남편이 나를 시험하는 건 아닌지….“저에게 재물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당신의 사랑과 당신을 향한 내 사랑만 있으면 된답니다. 제 마음을 알아보겠다는 속셈이었다면 당장 거두어들이세요.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를 갖는다 해도 저는 흔들리지 않으니까요.”차분하게 말을 하는 동안 담마딘나는, 새삼 자신이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위대한 스승들이 붓다라는 분께 귀의하셨다고 하는구려. 새파랗게 젊은 모양인데 어찌된 연유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구려. 오늘밤 왕이 주관해 그분 법회를 여신다고 하는데, 내 가서 얼굴이나 보고 오겠소.”아침식사를 하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건넨 말에 담마딘나는 적잖이 놀랐다. 재물을 모으는 재주가 남달랐던 남편 위사카는 어렸을 때부터 시장바닥에 뛰어들어 돈을 긁어모으다시피 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재물은 짧은 시간 만에 남편을 나라 최고의 거부로 만들었다. 왕궁 못지않은 호화로운 집을 올리고 수백 명의 하인을 부릴 정도로 돈이 넘쳐
세 번 절을 올리고 발등에 입을 맞춘 뒤 물러나 앉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붓다의 미소는 햇살처럼 자애로웠고 꽃처럼 평화로웠다. 지금껏 번뇌해왔던 순간도 멀리 달아나 버리는 듯했다. 왕자들에게 가식적인 웃음을 지을 때마다 내 얼굴은 어땠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궜다.“고귀한 붓다시여. 부모에게 버림받고 남자에게 거짓 웃음을 팔아야 하는 삶이 고통스럽습니다. 이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노란 망고를 주렁주렁 매단 나무의 그늘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대중이 일순간 침묵했다. 붓다의 미소가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