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행‧증’에서 ‘행‧증’은 ‘붓다’의 길(6바라밀, Ṣatpāramitā)’이다. 이전 장에서 ‘적멸심(무분별지)’은 ‘3학(계율‧선정‧지혜)을 성취하며, ‘동체대비’의 보시행이라고 설했다. 이 장에서는 ‘인욕(忍辱)’과 ‘정진(精進)’을 밝힌다. 47장은 “어떤 사람이 와서 해치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거두어야 한다. 성내서 원한을 내지 말라. ‘일념’에 ‘성내는 마음’을 생기하면 많은 장애의 문이 열린다”이다. 본문은 징관(738~839)의 ‘수소연의초’와 실차난타(Sikshananda, 652~710)가 한역한 ‘80
현재 ‘신‧해‧행‧증’에서 ‘행‧증’을 설하고 있다. 45장은 “‘3학’을 닦아서 ‘열반’을 증득하는 것은 ‘참’이 아니다. ‘심법’의 근본이 ‘적정’해야 ‘참 열반’이다. 그래서 ‘제법’은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적멸상’이다”라고 ‘법화경’에서 설한다. ‘도를 닦는 것’은 ‘3학(계‧정‧혜)’이고, ‘적멸심’은 ‘4성제(고‧집‧멸‧도)에서 ‘멸’이며 ‘열반’이다. ‘성문‧연각’은 생사는 고통이고 열반은 낙이기에, 번뇌를 끊어서 열반을 증득한다. ‘대승’은 3학과 6바라밀로 성불한다. ‘선법’은 마음이 적멸한 것이 열반이다.해석은
42장은 ‘원각경’에서 “걸림 없는 청정한 지혜는 다 ‘선정’을 인해서 생한다”고 설한 내용이다. 서산대사가 해석하시길 “‘범부’를 넘어서 ‘성인’에 들어가고, ‘좌탈입망(坐脫立亡)’하는 것은 다 ‘선정(禪定)’의 힘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길’을 구하려면 ‘선정’을 떠나서는 ‘길’이 없다”고 했다. 이것은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의 ‘도서’에서 “‘삼승(성문연각보살)’은 ‘선정’을 닦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좌탈입망’이란 ‘선원청규’에서 ‘좌탈’은 ‘앉아서 염불하며 입적하는 것’이고, ‘입망’은 ‘서서 합장하고
전장부터 ‘신해행증(信‧解‧行‧證)’ 중에 ‘행증’을 설명했다. ‘수행’과 ‘증과’를 ‘3학(계율‧선정‧지혜)’으로 요약하면서, 이 장에서는 ‘마음’에서 ‘3업(三業, 몸‧입‧생각)’이 청정한 ‘심계(心戒)’를 설한다. 39장은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 ‘3업’을 두호하지 않는다. 방일하고 게을러서 ‘타인’에게 쉽게 교만해져 ‘기량’을 겨루는 것이 ‘기본’이 된다”이다. ‘3업’이란 ‘몸’으로 살생과 도둑질과 사음을 행하거나, ‘입’으로 거짓말과 이간하는 말과 악한 말과 속이는 말을 하며, ‘생각’
이전까지 ‘돈오’와 ‘신해(信解)’를 설했고, 지금부터는 ‘조사선’의 ‘점수’와 ‘행증(行證’)을 밝힌다. 37장은 “‘이치(理)’는 비록 문득 깨달을지라도, ‘일(事)’은 문득 없어지지 않는다”로, ‘능엄경’의 내용이다.보조국사의 ‘법집별행록절요’에서 “‘점수’로 ‘악습’이 줄어서 줄어들 것이 없는 경지가 ‘성불’이다”고 한 것과 같다. ‘이치’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교법’이고, ‘선법’의 ‘〇, 진여법성’이다. ‘일’이란 ‘본성’이 연기해서 ‘무상‧무아‧고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을 순자(荀子, BCE. 298~238)
34장은 “‘허깨비(幻)’인줄 알면 ‘방편’을 짓지 않는다. ‘허깨비’를 떠난 것이 ‘깨달음’으로 ‘점차’도 없다”이다.‘원각경’에서 “‘허깨비’같은 ‘삼매방편’으로 깨닫게 한다”고 한 내용이다. ‘허깨비’란 ‘무상’해서 실체가 없는 ‘무아’이고 ‘금강경’에서 “모든 법은 ‘꿈’ ‘환’ ‘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다”고 한 것이다. ‘즉리(卽離)’란 일과 이치가 둘이 아닌 것이 ‘즉(卽)’이고, 다른 것이 ‘떠남(離)’이다. ‘근원, ○’을 깨달으면 ‘해탈’이고 ‘부처’이니 ‘돈오돈수(頓悟頓修)’다. ‘방편(方便)’이
31장 본문에서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二乘; 성문‧연각)’이다. ‘번뇌’가 ‘생하지 않는 것’을 ‘대열반(大涅槃)’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 내용은 ‘대반열반경’에서 “‘번뇌’를 ‘끊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지 않는다. ‘번뇌’가 ‘생하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고 한 것이다. 초기경전 ‘잡아함경’에서는 “‘열반’이란 탐·진·치 등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 상태이고, ‘8정도(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념‧정정진‧정정)’를 행하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해서 ‘4법인(일체개고·제행무상·제법무아
28장은 “‘미혹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은 단지 ‘무명’을 도울 뿐이다”이다. 규봉종밀(780~841)의 ‘원각경약소’ 내용이다. ‘미혹한 마음’이란 ‘법원주림’에서 “술은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데 왜 다시 술을 마시는가?”라고 한 것과 같이, 근원을 잃고 자신과 타인의 과실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당대(618~907)의 ‘돈황변문집’에서 “잘 살펴서 모든 ‘미혹’을 깨쳐라”고 했다. ‘수행(修道)’에 대해서 인광법사(印光, 1861∼1940)는 ‘목적을 향해서 몸과 마음이 변화된 상태’라고 했다.‘싯다르타’의 ‘고행’은 인도의
26장은 “옛 덕 높으신 스님이, ‘단지 너의 ‘눈 바른 것’이 귀하지 너의 ‘행리처’는 귀하지 않다’”고 한 내용이다.서산은 “옛날 앙산(仰山慧寂, 803∼887)이 위산(潙山靈祐, 771∼853)의 질문에 답하기를, ‘‘열반경’40권은 모두 마군의 말이다’고 한 것이 앙산의 바른 눈이다. 앙산이 또 행리처를 묻자 위산이 답하기를, ‘오직 그대의 눈 바른 것이 귀하다’고 한 등의 까닭은 먼저 바른 눈을 연 후에 행리처(行履處)를 설한 것이니, 만일 수행하고 싶으면 먼저 돈오(頓悟)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고 평하였다. ‘위산영우어록
이전은 ‘참선자’가 ‘호흡’ 사이에 ‘생사’가 있음을 명심하고 ‘마장’을 점검해서 ‘화두’와 하나가 되어 정진해야 한다고 설했다. 23장은 “‘말을 배우는 사람들이 말할 때는 깨친 듯해도 경계를 대하면 도리어 미혹한다’는 것은, 말과 행동이 ‘상위(相違, dvanda)’하다는 것이다”이다. 즉, ‘바른 참선’의 척도는 ‘언행’에 있다. ‘경덕전등록’에서 서룡(瑞龍幼璋, 841~927)은 “신통하고 괴이한 것으로 ‘나의 일(선법)’을 간섭 말라. 만일 말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자기를 살펴서 잘못을 알지 못하면 바로 허공 속에서 꽃을
22장은 “‘참선자’는 ‘4은(恩)’이 깊고 깊은 것을 아는가? ‘4대(지‧수‧화‧풍)’로 된 청정하지 못한 육신이 생각마다 쇠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불조’를 친견했는가? ‘위없는 법’을 듣고 ‘매우 귀한 마음’을 내었는가? ‘선원’을 떠나지 않고 ‘규칙’을 지켰는가? 친한 사람하고만 지내지 않는가? 시비하고 부채질하기를 간절하게 꺼리는가? ‘화두’가 하루 종일 분명해서 혼미하지 않는가? 사람과 말할 때 ‘화두’가 끊어지지 않는가? ‘보고 듣고 알아차릴 때’ ‘화
20장은 “저절로 생각나는 마음은 ‘천마(天魔)’이고, 현재 생각나지 않은 마음은 ‘음마(陰魔)’이며, 혹은 생각나거나 생각나지 않는 것은 ‘번뇌마(煩惱魔)’이다. 그러나 우리 정법(正法)중에는 본래 이와 같은 일이 없다”이다.‘경덕전등록’에서 지관(止觀)을 강설하는 어떤 스님이 대주혜해(大珠慧海, 9세기)에게 ‘선사께서는 마를 가려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위와 같이 답했다. ‘천마’는 ‘루탄경’에서 “‘욕계’와 ‘색계’의 중간에 ‘마궁’이 있는데 ‘성인의 길’을 가는 사람을 질투해서 돌을 갈 듯이 공덕을 무너뜨리게 한다”고 한
이전에는 화두를 참구할 때 ‘10가지 병’을 경계하고 ‘조사관’을 투과할 것을 설했다. 18장은 “공부는 마치 현악기를 조절하는 법과 같이 조이고 늦추는 가운데 너무 힘을 주어서 하면 ‘집착’에 가깝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진다. 똑똑하게 깨어있고, 또렷또렷 분명하게 이어져야 한다”고 했으며, 이는 ‘아함경’에서 ‘선정법’을 설한 내용이다. ‘무명’이란 ‘12인연’으로 작용하는 ‘한 마음’에서 ‘연기법’을 알지 못하고 ‘행업(行業)’의 고통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해석하기를 “거문고를 타는 사람이 말하기를, ‘느리고 급한
16장은 “‘화두(話頭)’는 드는 곳에서 알 수 없으며, 생각으로 알아낼 수 없고 미혹한데서 깨달을 수 없으니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생각하여 마음이 갈 곳이 없는데 나아가면, 마치 ‘늙은 쥐가 쇠뿔에 들어가서 문득 단절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계략으로 근원을 마련하는 것이 ‘식정(識情)’이고, 생사의 윤회의 밑에 떨어지는 것이 ‘식정’이며, 두렵고 두려운 것의 끝이 ‘식정’이다. 요즘 사람은 이 병을 알지 못하고, 오직 그 속에 있으면서 머리를 내밀었다 빠졌다(頭出頭沒)한다.” ‘화두’는 ‘참선자’가 ‘문제를 나타내
14장 본문은 “‘참선’은 세 가지 요지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대 신심이고, 둘째는 대 분심이며, 셋째는 대 의심이다. 만약 하나라도 없으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이 마침내 그릇이 될 수 없다”이다.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가 ‘선요’에서 ‘참선’의 요지를 밝혔다. ‘믿음’은 ‘불조’의 가르침이 자신의 인식과 감정적 행동을 ‘향상일로’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분심’은 내가 왜 미혹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가? 반드시 ‘불조’같이 깨닫겠다는 의지다. ‘논어’에서 ‘간절한 마음’과 ‘영리한 사람’만이 지도 받을
대혜종고(1063~1135)의 ‘간화’는 ‘활구’이고, 굉지정각(1091~1157)의 ‘묵조’는 ‘사구’다. 백파(白坡亘璇, 1767∼1852)의 ‘선문수경’에서 ‘활구’로 3요(청정‧광명‧무애)를 증득하면 ‘조사선’이고, ‘여래선(위앙종, 법안종, 조동종)’과 ‘의리선(교리적 분별)’은 ‘사구’라고 한다.본문에서 “‘공안’을 참구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마치 닭이 알을 품은 것과 같으며,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과 같고, 굶주릴 때 밥 생각하는 것과 같고, 목말라서 물 생각하는 것과 같고 아이가 엄마를 그리워하는
“일반적으로 ‘학자’는 ‘활구(活句)’를 참구해야 한다.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라.” ‘활구’는 말 밖의 뜻을 깊이 참구해서 깨닫는 것이다. ‘덕산연밀(10세기)’이 처음 설했다.서산대사가 해석하시길 “‘활구’에서 ‘천득(薦得)’하면 부처나 조사와 함께 스승이 되지만, ‘사구’에서 ‘천득’하면 자신도 구할 수 없다. 특별히 ‘활구’를 써서 스스로 깨닫게 한다.” ‘천득’이란 ‘추천하거나 잔치에 초대받는 의미’인데, 조사의 ‘선지’를 깨닫고 ‘불조’의 법에 부합해 들어가게 된다.원오선사가 ‘화장명수좌’에게 “만일 ‘불조’와 같
11장에서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여실하게 말로 가르치신 ‘진여’와 ‘생멸’의 두 뜻은, 마음에는 ‘본성’과 ‘형상’이 있고, ‘돈오’와 ‘점수’ 두 문이 자기 수행의 처음과 끝인 것을 확실히 판단한 후에, ‘교설’의 뜻을 놓아버리고 다만 자기 마음에 현전하는 ‘일념’으로 자세히 ‘선지’를 참구하면 반드시 증득하게 된다. 이것을 몸을 벗어나는 ‘활로’라고 한다”고 한 본문은 고봉화상(1238∼1295)의 ‘선요’ 내용으로, 마명(馬鳴, 100∼160)의 ‘기신론’에서 ‘마음’에 불변의 ‘진여’와 인연을 따르는 ‘생멸’의 두 가지
선가귀감은 마음의 근원, ‘○’을 밝히고 불조 교설의 방편과 은덕을 찬탄하며, 교와 선이 같은 점은 ‘이심전심’ ‘견성성불’이고 다른 점인 ‘불립문자’ ‘직지인심’인 것을 설하고 있다. 10장 본문에서 “제불은 활등을 설하고 조사는 활줄을 설한다. 부처님은 장애가 없는 법을 설하셔서 ‘한 맛’으로 돌아간다. 이 ‘한 맛’의 자취를 떨쳐야 비로소 조사가 보이신 ‘일심’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 화두는 용장에는 있지 않다”고 한 내용을 진정국사(1206∼1293)의 ‘선문보장록’에서는 “‘활시위처럼 설하였다’는
8장에서는 ‘관행’으로 ‘견성성불’할 것을 설했다. ‘금강삼매경론’에서 “관행에서 관은 공간적으로 경계와 지혜가 통하는 것을 말하고, 행은 시간적으로 항상 그 인과를 바라는 것이다”라고 한다. ‘관행’은 지관삼매에서 ‘마음과 몸이 일치’되어 공을 체득하고 고통에서 해탈하는 4선정으로부터 몸은 청정하지 않고, 감수는 고통이고, 마음은 무상하며, 제법은 무아를 관하는 초기불교 4념처와 부파불교의 12연기의 관법, 대승불교의 염불관법과 ‘간화선’ 수행 등이다.9장은 “그렇게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에는 먼저 모든 법을 분별해 보이시고 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