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대 “고문헌 속에 목조전실 근거 있다” 남천우 “고문헌 속엔 석조 언급만 있을 뿐”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석굴암 보수공사는 개악이었다’는 물리학자 남천우 교수의 지적에 당시 보수공사에 참여했던 신영훈 씨의 반론이 이어지면서 ‘석굴암의 원형논쟁’에 대한 불씨는 학계로 번지기 시작했다. 동국대 문명대 교수는 69년 「월간중앙」(7월호)에 기고한 「석굴암 위기설에 이의있다-남 박사의 위기설에 관한 반론」이라는 논문을 통해 “남천우 교수의 ‘목조전실은 석굴암의 원형에 벗어나 있다’는 주장은 석굴암 보수공사 보고서의 내용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목조전실에 대한 고고학적인 고증절차를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문 교수는 이어 “일본인들의 보수이후 1963년 목조전실을
남천우 “보수공사는 개악…해체 복원해야” 신영훈 “중지를 모은 보수…해체복원 불가능” 세계문화유산이자 신라불교예술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경주 석굴암. 석굴암의 원형은 어떤 모습일까. 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 혜공왕 10년(774) 완성된 석굴암은 360여 개의 화강암을 이용해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하고 각종 보살상 등 수많은 조각품을 함께 만든 인위적 석굴로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찬란한 신라인의 예술품은 수천 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붕괴됐고,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점차 사라졌다. 이후 석굴암은 1910년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다시 발견됐고, 당시 일제는 석굴암의 보수공사에 착수했
마츠모토 등 “여래장-유식, 불교 아니다”주장 김성철 등 “교학 엄밀성 없는 학문적 사기”반박 비판불교는 불교 교리의 새로운 해석인가, 아니면 완전한 불교 왜곡인가. 80년대 후반 일본 고마자와 대학의 하카마야 노리야키와 마츠모토 시로 교수를 중심으로 기존불교 교리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이른바 ‘비판불교’는 일본 뿐 아니라 서양, 국내 불교학계에서도 불교학 논쟁의 중심이 됐다. 비판불교가 새로운 학문적 방법론으로 학계에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89년. 기존 불교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불교학 연구방법을 제시한 하카마야 노리야키와 마츠모토 시로 교수의 논문집 『본각사상비판』, 『연기와 공-여래장 사상비판』등이 출간되면서부터다. 또 그 이듬해 하카마야 노리야키 교수가 『비판불교』라는 저술을 발표하
허흥식 “천태종 개창조는 의천 추종세력” 주장 김상현 등 “의천, 渡宋전부터 천태교학 관심”반박 고려시대 한국 천태종을 개창한 인물은 누구일까? 그 동안 학계에서는 한국 천태종의 개창조를 대각국사 의천 스님으로 보는 것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이는 의천 스님이 입적한 후 세워진 ‘선봉사비’에 스님이 고려 천태종의 시조임을 밝히는 ‘해동천태시조대각국사(海東天台始祖大覺國師)’라 명기돼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비의 뒷면에 새겨진 음기(陰記)에 의하면 “의천 스님은 숙종 6년인 1101년 봉은사에서 최초의 천태종 스님을 뽑기 위한 시험인 대선을 실시했다”며 “이로써 고려 초부터 있던 조계종, 화엄종, 유가종의 3대 종파에 천태종이 더해짐으로써 4대 종파가 되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었다. 이
황수영 등 “대왕암은 인공 수중릉” 주장 유홍준 등 “지나친 추정… 산골처” 반박 경북 경주군 양북면 붕길리 앞 바다에 떠 있는 대왕암은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인가, 아니면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인가? 1967년 신라오악탐사단에 의해 그 실체가 발견된 후 사적 158호로 지정된 대왕암은 그 동안 학계에서 문무왕의 유골을 수중에 봉안한 수중릉인지, 단지 유골 가루를 뿌린 산골처인지를 두고 이견이 분분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돼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황수영 “국난극복 위한 호국적 의미” 주장 김상현 “왕권 강화 위한 정치적 목적” 반박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은 죽은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추모했다.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東海)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을 직접 방문했다.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나무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
문명대, “석가여래-미륵보살-다보여래”주장 종범 스님, “보문품 근거한 이불봉주상”반박 강우방 교수는 태안 마애삼존불의 존명에 대한 황수영 박사의 “가운데가 관음 보살이며 좌측은 약사여래, 우측은 석가여래일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관음보살을 기준으로 왼쪽은 약사여래, 오른쪽은 아미타 여래”라고 반박하면서 새로운 논쟁을 일으켰다. 강우방 교수에 따르면 왼쪽에 새겨진 불상이 약합(藥盒)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가 분명하고 가운데 부처가 관음보살이기 때문에 오른쪽 부처는 석가여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석가여래의 자비의 화신으로 알려진 관음보살이 석가여래보다 위계가 낮기 때문에 만약 석가여래를 모시기 위해서는 가운데에 주불로 조각하고 왼쪽에 관음보살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외금강에 위치한 귀면암은 본래 귀신의 얼굴 같은 바위라는 뜻인데 그 이름과 같이 모질고 사나운 형태의 봉우리이다. 귀면암은 인근 삼선암과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석양이 질 무렵 그 전경이 뛰어나 예로부터 금강산에서 그 어떤 것과 견줄 바 없는 풍경이라고 전하고 있다. 광주지사=김경태 지사장
황수영, “약사여래-관음보살-석가여래” 주장 강우방, “약사여래-관음보살-아미타여래”반박 충남 태안군 백화산 정상 부근에 봉안된 국보 307호인 태안 마애삼존불〈사진〉은 서산 마애삼존불과 더불어 백제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백제의 미소로 불릴 정도로 온화하고 섬세한 여성미를 표현한 것이 서산 마애삼존불이라면 태안 마애삼존불은 대담한 얼굴표정과 장대한 체구 등 강인한 남성미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태안 마애삼존불은 세 분의 부처를 바위 면에 새겼는데 그 배치 수법이 독특해 발견당시부터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이는 대부분의 삼존불이 중앙에 거대한 여래상을 조각하고, 좌·우에 작은 보살상을 조각한 것에 반해 태안 마애삼존불은 중앙에 작은 보살 입상을 세우고
천혜봉 등 “유사 첫 간행은 조선시대”주장 김상현 등, “일연-무극 의해 간행” 반박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달리 야사(野史)를 기초로 기술돼 당시 역사는 물론 사회 문화와 사상 등을 꿰뚫을 수 있는 방대한 자료가 수록돼 있어 그 가치가 높은 역사서로 알려져 왔다. 그 동안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1289)이 저술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는 왕력(王曆)과 본문 5권으로 구성돼 있는 『삼국유사』의 제5권 첫머리에 ‘국존 조계종가지산하 인각사주지 원경충조대선사 일연찬(國尊 曹溪宗迦智山下 麟角寺住持 圓徑照大禪師 一然撰)’이라며 저술자의 이름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제작된 초간본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을 뿐
조성택 등, “모순 지적은 불교 왜곡” 비판 김진, “지나친 교조주의적 입장” 반박 김진 교수와 한자경 교수의 주장과 반박이 팽팽하게 진행되던 무아-윤회 논쟁은 2003년 철학잡지 「오늘의 동양사상」이 무아-윤회 논쟁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철학계 전반으로 확산됐다. 고려대 조성택 교수를 비롯해 동국대 최인숙 교수, 서울대 김종욱 박사 등이 새로운 논객으로 참가한 「오늘의 동양사상」에서 학자들은 “무아-윤회가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를 왜곡하는 것”이라며 일제히 김진 교수의 주장을 비판했다. 고려대 조성택 교수는「불교에 있어 이론과 실천수행」이라는 논문에서 “김진 교수의 문제 제기는 근본적으로 불교에 있어 ‘이론과 실천 수행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양 철학의 이성 중심주의
김진, “상호 모순…칸트 요청이론 도입해야” 주장 한자경, “기독교 중심 자아관서 출발한 발상” 반박 90년대 불교학자들간에 진행됐던 무아-윤회 논쟁은 2000년대 들어 칸트 등 서양철학을 전공한 울산대 김진 교수의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면서 철학전공자들간의 주장과 반박으로 이어졌다. 울산대 김진 교수는 서양철학자 칸트의 사상과 불교 사상을 비교한 『칸트와 불교』(2000년, 철학과 현실사)라는 책을 통해 “무아-윤회설은 모두 불교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교리로서 두 가지 모두를 내세울 경우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불교의 십이인연설은 윤회설에 기초한 것이며, 윤회적 주체의 탄생과 성장, 죽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며 “그러나 이와 같이 분명하게 태어나
호진 스님 “상호 모순… 양립 될 수 없다”주장 이중표 등 “서로 다른 차원… 모순 아니다”반박 모든 존재는 다섯 요소들의 집합에 불과하며 거기에는 고정 불변의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불교 근본 가르침 중에 하나인 무아설. 그럼에도 불교는 ‘모든 존재는 업에 대한 과보를 받고 이에 따라 윤회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음에도 윤회하는 그 주체는 무엇일까? 무아와 윤회를 동일선상에서 놓고 보면 이처럼 상호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른바 무아-윤회 모순은 오랜동안 불교계의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이는 부처님의 무아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주체가 부정되고, 윤회설을 수용할 경우 주체가 필연적으로 전제되는 사실에서 오는 두 이론체계 사이의 모순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재동 등, “정토신앙 담은 불교적 내용” 주장 이수자 등, “‘이공본풀이’ 영향 받은 것” 반박 “범마라국 임정사에서 중생을 교화하던 광유 성인이 하루는 서천국 사라수왕에게 유나(維那)로 맞이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이에 사라수왕은 크게 감복해 원앙부인과 함께 임정사로 향한다. 그러던 중 만삭이었던 부인은 불편한 몸 때문에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게 되자, 왕에게 자신을 죽림의 자현장자의 종으로 팔아 그 돈을 성인에게 올려 줄 것을 간청한다. 결국 사라수왕은 부인의 뜻에 따라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고 부인은 왕에게 왕생게를 일러주고 헤어진다. 부인은 얼마 후 아들 안락국을 낳게 되지만 장자는 수청을 강요하면서 부인을 괴롭힌다. 성장한 안락국은 부인을 통해 부친의 소재를 확인하고 임정사에서 사
김지견 박사, “‘湘’,‘想’은 선덕왕의 피휘”주장 양은용-해주스님, “납득할 논거 더 찾아야”반박 7∼8세기 해동 화엄학을 개창한 신라의 고승 의상(625∼702). 의상은 중국 화엄 2조인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귀국해 중국화엄과 다른 독창적인 한국 화엄을 완성하면서 한국불교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한 인물이다. 이런 까닭에 시대를 거치는 동안 국내·외에서는 그를 가리켜 수많은 존칭(尊稱)을 따로 책정해 추앙했다. 신라 왕실이 그에게 내렸던 ‘화엄조사(華嚴祖師)’, ‘부석존자(浮石尊者)’, 고려왕실이 내린 ‘원교국사(圓敎國師)’, 중국 유학시절 그의 스승 지엄이 내린 법호(法號) ‘의지(義持)’, 존호(尊號) ‘해동신라화엄법사(海東新羅華嚴法師)’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한국불교를 대표
“거듭된 논쟁 보다 한국 불교에 맞는 법통 마련”지적도 1994년 9월 29일 조계종은 종단 개혁과 함께 도의 국사를 종조로 하는 종헌 종법을 발표하면서 조계종 종조 논쟁은 일단락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종헌 종법의 다소 애매한 종조, 중흥조에 대한 규정으로 인해 논쟁의 불씨는 쉽게 수그러들지 못했다. 이는 조계종의 종헌 종법 제 6조에서 “조계종의 종조는 도의 국사로 중흥조는 태고 보우국사”로 규정하면서도 종명 종지를 다룬 제 1조에서 “본종은 대한불교조계종이라 칭하다.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시한 가시산문에서 기원해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重闡)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 포섭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라는 구절을 삽입해 누구를 중흥조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종헌 종법에서도 명확히
성철 등, “태고 종조설, 불변의 진리” 주장 이재열 등, 재차 반박…“무의미한 논쟁 중단” 주장도 70년대 들어 ‘조계종 종조’ 논쟁은 성철 스님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967년 해인사 초대방장으로 취임하며 현대 한국불교의 새로운 중심으로 등장한 성철 스님은 ‘보조의 선수행법’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아울러 보조를 조계종의 종조로 주장한 이재열과 이종익의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1976년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의 법맥』(해인총림)에서 “이재열, 이종익 등이 창안한 보조 법통설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으며 오직 청허·부휴 양대 문하에서 서로 전해온 임제 태고 종통만이 정당함을 알게되었다”며 “따라서 대한불교조계종은 석존을 시조로 하고 조계 혜능을 원조로 한 임제선 계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불기 2549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불자들에게 봉축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는 의장 마이클 피츠제럴드 대주교는 메시지를 통해 “불자와 불자 가정에 부처님오신날의 기쁨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며 “불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대화’를 통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세계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전했다. 다음은 축하 메시지 전문. 친애하는 불자 여러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저는 올해에도 여러분에게 진심어린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그리고 여러분 공동체에 부처님오신날의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오신날이 세계 도처에서 불자들과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기존의 상호 유대를 굳게 다질 수 있는 계기가
이능화 등, “한국 선종 개창한 인물은 보조” 주장 김영수 등, “가지산문 계승자는 태고” 반박 한국불교 장자 종단이라는 조계종의 종조(宗祖)는 누구일까? 1994년 9월 종단 개혁과 함께 마련된 현행 조계종 종헌(宗憲)에는 도의 국사를 종조로 태고 보우를 중흥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종명(宗名) 및 종지(宗旨)를 다룬 제 1장 1조에는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시한 가지 산문에서 기원해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重闡)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포섭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라고 규정하면서 종헌 내에서도 다소 상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종헌 자체에서도 누구를 종조로 하며 누구를 중흥조로 할 것인지를 명확히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누가 조계종의 종조이며 중흥조일까?
요장수, “방산석경에 지엄 저술로 기록”주장 해주 스님 등, “사상적으로 의상의 것”반박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화엄(華嚴). 화엄은 신라 의상계 스님들에 의해 한국에 정착됐으며 이후 이들의 사상은 한국 화엄의 주류가 돼 왔다. 특히 중국 화엄학과는 달리 수행을 중시하는 의상의 사상은 이후 신라 화엄학의 특징이며 한국불교의 특색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러한 의상계 화엄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로 의상의 제자들은 이 법계도에 기초하여 수행했으며 사상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일승법계도는 의상이 중국 화엄종 조사 지엄(智儼)에게 수학할 때 화엄의 진리에 대해 서술한 책을 불태운 후 타지 않고 남은 210개의 글자를 이용해 게송을 짓고 법계도를 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