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호 “사선 이후에나 가능”주장 김재성 “선정 닦지 않고도 가능”반박 한국불교에 있어 주된 수행법이 간화선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신라시대 이후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전통 수행법으로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서도 조계종과 태고종이 간화선을 주된 수행법으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남방상좌불교의 전통 수행법인 위빠사나 수행법이 국내에 보급되면서 이 같은 간화선 수행 전통은 크게 흔들리게 됐다. 갑작스런 위빠사나 수행의 확산에 위기감을 가진 간화선 수행자들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근기 수행법’, ‘소승불교의 수행법’이라고 맹공격했고, 이에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부처님 당시의 정통 수행법’이라고 반박하면서 끊임없이 논쟁을 이어나갔다.
김병곤 등 “금당 발견… 현 위치맞다” 주장 이종철 등 “불교행사 열리던 가궐 터” 반박 고려 무인정권 시기, 대몽 항쟁을 불태우기 위해 1245년 창건된 강화 선원사. 이 사찰은 순천 송광사와 더불어 고려 2대 선사(禪寺)로 불렸으며 고려 충렬왕 때는 임시 궁궐로 사용될 만큼 규모가 웅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 태조 7년(1398) 대장경판이 한양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겨진 후, 점차 사격이 급격히 쇠퇴해져 이후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은 폐사지로 전락하게 됐다. 강화 선원사가 다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1976년. 강화도의 호국 유적지를 탐사하던 동국대 강화도학술조사단이 관련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유추해 선원사지를 찾아내면서부터다. 당시
황수영, “일본서 급조해 바꿔치기 한 것”주장 남천우, “중국-신라 주조술 혼용된 한국 종”반박 국내 최고(最古)의 범종으로 알려졌으며 1929년 1월 1일 경성방송국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 제야 행사에 사용되기도 했던 조계사 범종. 이 범종은 한국 범종사에서 수작이라 꼽힐 평가될 정도로 그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임에도 비운의 문화재로 알려져 왔다. 이 범종의 수난은 19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초 이 범종이 봉안돼 있던 사찰은 경기도 양평 용문산 상원사였다. 그러나 1907년 일본군이 이 사찰에 불을 지르면서 일제는 이 종을 서울 남산의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의 경성별원으로 옮겼다. 당시 히가시혼간지는 경희궁의 건물을 뜯어다가 세운 일본 불교 진언종의 총본산지였다. 조선총독부는
中-日, “박산로와 유사… 중국서 수입” 주장 최웅천 등, “백제 독창성 보인 창작품” 반박 1993년 12월 12일 세계 고고학계는 한국을 주목했다.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세계최대, 전대 미문의 화려한 도상을 가진 대향로가 발굴됐기 때문이다. 능산리 고분군의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 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이 향로는 높이 64㎝, 무게 11.8㎏이나 되는 세계 최대의 크기로 몸체와 뚜껑, 봉황과 받침대 등 크게 4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이 향로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조각하고 있으며 향로에 표현된 조각이 매우 뛰어날 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김영태-기무라 등 “의상 이후 가택된 것”주장 해주 스님 등 “저자 언급돼 재론 여지없다”반박 한국불교 최초의 발원문으로 알려진 백화도량발원문. 고려 충숙왕대(1314∼1330) 목암(木庵) 체원(體元)이 백화도량발원문을 모아 주석을 붙인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에 수록돼 있는 이 발원문은 200여자에 불과한 비교적 짧은 글이지만 신라 관음 신앙의 관계를 알게 해 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돼 왔다. 특히 이 발원문은 체원이 백화도량발원문 약해에서 ‘신라 의상 법사제(新羅 義相 法師製)’라고 밝혀 누가 이 발원문을 지었는지를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 발원문의 저자를 의상으로 볼 수 없다는 학자들의 논문이 발표되면서 ‘백화도량발원문의 저자’ 논란이 학계에서 처
이능화-최병헌 등 “신라 하대 주류, 선종”주장 김상현-고익진 등 “상호 견제 속 공존” 반박 귀족들의 부패와 왕위 쟁탈 등 고대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모순이 표출되면서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이 거듭되던 신라하대. 이 시기 불교계에서도 일대 변화가 시도된다. 즉 새로운 불교사상으로 도입된 선종(禪宗)이 사상적 주류를 이루던 교종(敎宗)인 화엄종의 한계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이로 인해 기득권을 누리던 화엄종은 위축됐고, 존립기반 전체가 흔들려 선종이 신라 하대 주된 사상체계로 자리 매김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1920년대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를 통해 “신라 헌덕왕(憲德王, 809∼826) 이후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선종이 홀로 세력을 누렸으며 교학의 제종(諸宗)은 힘이 다함에 묻히고, 강경
日학계 “670년 전소… 담징 작품 아니다”주장 문명대 등 “호류지 재건설 재검토 필요”반박 일본 미술의 최고 정점이라는 호류지(法隆寺). 617년 쇼토쿠 태자의 발원으로 창건된 이 사찰은 1949년 1월 화재로 전소되기 이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왔다. 특히 호류지는 금당에 한국에서 건너간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12면 벽화가 있어 삼국불교 미술의 일본 전파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이 금당벽화는 그 제작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누가, 언제 그렸는지가 명확히 알려지지 못했다. 다만 『일본서기』에 “610년 일본 호류사를 찾은 고구려 화승(畵僧) 담징은 오경(五經)을 알고 있었고, 채색 및 종이와 먹을 만들고, 아울러
강우방 등 “목조전실-홍예석 철거해야”주장 성낙주 “철거주장, 맹목적 비판에 불과”반박 1960∼70년대 서울대 남천우 교수의 문제제기로 시작된 이른바 ‘석굴암 원형논쟁’은 석굴암 보수공사에 참여했던 신영훈 씨와 문명대 씨의 반론으로 이어졌고, 여기에 다시 남천우 교수의 재반박 논문이 발표되면서 당시 학계 뿐 아니라 세간에서도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미술사학자들의 반론이 이어지면서 물리학을 전공했던 남천우 교수의 주장은 다소 주춤했고, 이로 인해 석굴암 원형논쟁은 수그러드는 듯 했다. 이후 30년이 지난 1991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이었던 강우방 씨는 「석굴암 건축구조의 재검토」라는 논문을 통해 “일제와 60년대 이뤄진 두 차례의 보수공사로 석굴암의 원형은 사라졌다”고 주장하면
문명대 “고문헌 속에 목조전실 근거 있다” 남천우 “고문헌 속엔 석조 언급만 있을 뿐”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석굴암 보수공사는 개악이었다’는 물리학자 남천우 교수의 지적에 당시 보수공사에 참여했던 신영훈 씨의 반론이 이어지면서 ‘석굴암의 원형논쟁’에 대한 불씨는 학계로 번지기 시작했다. 동국대 문명대 교수는 69년 「월간중앙」(7월호)에 기고한 「석굴암 위기설에 이의있다-남 박사의 위기설에 관한 반론」이라는 논문을 통해 “남천우 교수의 ‘목조전실은 석굴암의 원형에 벗어나 있다’는 주장은 석굴암 보수공사 보고서의 내용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목조전실에 대한 고고학적인 고증절차를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문 교수는 이어 “일본인들의 보수이후 1963년 목조전실을
남천우 “보수공사는 개악…해체 복원해야” 신영훈 “중지를 모은 보수…해체복원 불가능” 세계문화유산이자 신라불교예술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경주 석굴암. 석굴암의 원형은 어떤 모습일까. 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 혜공왕 10년(774) 완성된 석굴암은 360여 개의 화강암을 이용해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하고 각종 보살상 등 수많은 조각품을 함께 만든 인위적 석굴로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찬란한 신라인의 예술품은 수천 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붕괴됐고,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점차 사라졌다. 이후 석굴암은 1910년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다시 발견됐고, 당시 일제는 석굴암의 보수공사에 착수했
마츠모토 등 “여래장-유식, 불교 아니다”주장 김성철 등 “교학 엄밀성 없는 학문적 사기”반박 비판불교는 불교 교리의 새로운 해석인가, 아니면 완전한 불교 왜곡인가. 80년대 후반 일본 고마자와 대학의 하카마야 노리야키와 마츠모토 시로 교수를 중심으로 기존불교 교리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이른바 ‘비판불교’는 일본 뿐 아니라 서양, 국내 불교학계에서도 불교학 논쟁의 중심이 됐다. 비판불교가 새로운 학문적 방법론으로 학계에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89년. 기존 불교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불교학 연구방법을 제시한 하카마야 노리야키와 마츠모토 시로 교수의 논문집 『본각사상비판』, 『연기와 공-여래장 사상비판』등이 출간되면서부터다. 또 그 이듬해 하카마야 노리야키 교수가 『비판불교』라는 저술을 발표하
허흥식 “천태종 개창조는 의천 추종세력” 주장 김상현 등 “의천, 渡宋전부터 천태교학 관심”반박 고려시대 한국 천태종을 개창한 인물은 누구일까? 그 동안 학계에서는 한국 천태종의 개창조를 대각국사 의천 스님으로 보는 것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이는 의천 스님이 입적한 후 세워진 ‘선봉사비’에 스님이 고려 천태종의 시조임을 밝히는 ‘해동천태시조대각국사(海東天台始祖大覺國師)’라 명기돼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비의 뒷면에 새겨진 음기(陰記)에 의하면 “의천 스님은 숙종 6년인 1101년 봉은사에서 최초의 천태종 스님을 뽑기 위한 시험인 대선을 실시했다”며 “이로써 고려 초부터 있던 조계종, 화엄종, 유가종의 3대 종파에 천태종이 더해짐으로써 4대 종파가 되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