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선정에 여덟 단계가 있다고 하는데, 그 경지가 각각 어떠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어떠한 단계에서 깨달음을 얻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경전에 나오는 내용에 비추어 대답하겠습니다. 불교의 선정에는 마음을 하나로 몰입시키는 방법으로써의 정학과 몸과 마음의 현상을 직접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으로써의 혜학이 있다고 이미 여러 차례 말 하였습니다. 그런데 먼저 여기서 잘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방금 질문한 여덟 단계의 선정 즉 팔선정은 혜학에 의한 선정이라기보다는 정학에 의한 선정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혜학의 선정은 여덟 단계의 선정을 필요로 하지 않고 네 단계의 선정 다시 말해 사선정만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자세히 설명하려면 여덟 단계의 선정이 무엇이며 어떤 상태인지
대승 불교권인 우리나라에서는 아라한의 경지를 소승이라 하여 크게 존중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라한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습니다. 아라한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이 수행을 통해서 얻게 되는 과위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불교의 수행은 팔정도의 실천에 있습니다. 수행자가 쉬지 않고 열심히 팔정도를 닦으면 궁극적으로 깨달음과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게 됩니다. 여기서 깨달음은 중생의 근본 번뇌인 무명이 명으로 바뀐 경지를 말하고 해탈은 생노병사를 비롯한 일체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경지를 말하며 열반은 갈애의 뜨거운 불길이 모두 꺼져 지극히 평온에 이른 경지를 말 합니다. 그런데 이같은 깨달음, 해탈, 열반의 경지는 수다원의 과위에서 시작되어 사다함, 아나함을 거쳐 방금 질문한
부처님의 길을 가는 데는 자력의 길과 타력의 길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력의 길은 참선을 말하고 타력의 길은 염불을 말하는데 어떤 분들은 아무리 염불을 해도 참선을 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하고, 어떤 분들은 말세에는 어려운 참선 보다는 쉬운 염불이 오히려 빨리 깨달음에 들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방법을 택해야 좋습니까? 답변을 하기 전에 질문 하신 분께서 잘 못 알고 있는 부분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질문 하신 내용 중에 부처님의 길을 가는데 타력의 길이 있다고 하셨는데 불교에는 타력은 없습니다. 불교는 철저히 자신의 힘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중생의 모든 고통은 오직 자신만이 해결 할 수 있을 뿐 누구도 대신하여 해결 해 줄 수 없습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었다면 반드시 눈 밝은 스승을 찾아가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법사님은 인가를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부처님 당시에는 인가라는 것을 별로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인가를 하지 않아도 부처님 가르침에 맞추어 보면 자신의 수행 상태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알게 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인가는 선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풍습입니다. 특히 간화선 수행에 있어 인가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두를 타파하였으면 그 화두의 답을 얻었을 것인데 그 답의 옳고 그름은 오직 앞서 화두를 바르게 타파한 스승으로부터 판가름이 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각고의 수행 끝에 화두를 타파 하였어도 스승이 던지는 문제들에 대해 즉각적인 답을 내리지 못하여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 경지는 완전해탈이 아닙니다. 화두
법사님 그러면 그 수련원의 몸과 마음을 죽인다는 공부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지요. 그 단체에서는 마음을 죽이는 방법으로 눈앞에 지구를 상징 하는 둥근 모양의 큰 점을 그려 놓고 응시 하면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집어넣습니다. 눈앞의 점을 지구로 표현 하는 이유는 자기라고 여기는 일체의 마음은 의식의 집합체인데 이게 모두 지구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앞에 보이는 점에다 마음을 집중하고 거듭해서 일어나는 자아의식들을 집어 넣다보면 그 자아의식들이 사라지면서 본래의 근원인 신의의식이 드러나게 되고 그렇게 될 때 모든 고통과 번민은 사라지게 된다고 합니다. 자 그런데 왜 그 단체에서 가르치는 수련법이 완전하지 못한 것일까? 질문 하신 분도 말씀을 하였듯 수련을 해서 깨달음을 체험은 하였는데 그 깨달음이
저는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수행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얼마 전에는 충청도 명산에 본부를 두고 있는 모 수련 단체에서 수행을 하고 왔습니다. 그곳에서는 사람 누구나가 본래부터 신이고 부처인데 몸과 마음을 자기로 여기기 때문에 부자유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신이며 부처임을 알려면 몸을 죽이고 마음을 죽이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그 곳에서 일러주는 대로 수행을 한 결과 얼마 만에 나가 정말로 없는 거구나 하는 체험도 하였고 내가 본래 신이고 부처라는 확신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기쁨과 충만함은 어디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의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는 지속 되지 못하고 예전의 얽매이던 상태로 돌아와 버
저는 화두를 참구하는 불자입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머리가 아파오더니 이젠 두통이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해도 별반 효과가 없습니다. 지금으로써는 수행을 한 게 후회가 됩니다. 혹시 좋은 방편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번뇌의 병을 치료하고자 수행을 시작 하였는데 도리어 몸의 병을 얻었으니 거사님으로써는 수행을 한 것이 후회가 될 만도 합니다. 이 같은 경우는 비단 거사님만이 아닙니다. 거사님처럼 수행을 잘못하여 생기는 몸과 마음의 병을 흔히 선병이라고 합니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실은 많은 이들이 이 선병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생기면 잘 낫지도 않습니다. 몸에서 나타나는 선병의 종류를 보면 거사님과 같은 두통뿐만이 아닌
겨울방학 부처님과 함께올해 겨울방학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매년 여름과 겨울방학 시즌이면 ‘이번에는 무얼 해볼까’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다. 자, 이제 신나는 겨울이다. 춥다고 방안에만 웅크려 있지 말자.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사찰로 떠나자. 올해는 신나고 재미있는 이색 겨울방학 프로그램들이 많다. 편집자 하얀 입김 호호 불며 친구들과 눈싸움을 즐길 수 있는 겨울이 왔다. 신나는 겨울방학을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이들에게 뭔가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을까? 전국의 사찰과 단체들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올 겨울방학을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영어체험, 선무도 템플스테이, 철새탐조 등 다양한 겨울방학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았다. 겨울불교학교나 겨울방학 프로그램은 어린이들이 부처님 품안
현재 한국 불교의 수행법에는 간화선, 위빠싸나, 염불선 거기에 진언 염송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염불선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염불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지 답변하여 주십시오. 결론부터 말 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도 있고 깨달음을 이루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깨달음은 무조건 열심히만 한다고 하여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제가 강조 하는 바이지만 수행에 있어 염불이건 화두건 부지런히 노력 하는 것도 중요 하지만 더욱 중요 한 것은 불교 수행이 지니고 있는 전체적인 맥락을 먼저 숙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조건 앞뒤도 모르고 열심히 하기만 한다면 외도들 주문 외우는 것과 무당들 기도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수행 하는 사람이 중점을 두어
근래에 들어 불교 안팎으로 수행단체가 생겨나면서 자신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스스로 자신이 그렇다고 말 하는데 대해서 제가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나름대로 수행을 하여 어떤 체험이라도 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말을 함부로 하게 되면 대 망어 죄를 지어 미래세에 남과 자신을 큰 괴로움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능엄경에서 스스로 상인의 법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모두 바른 수행자가 아니니 결코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원각경에서 수행자의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는 자취가 있으면 이는 깨달음이 아니라 모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여러분도 잘 아시는
수행을 하다보면 마군이 시험을 한다든가 방해를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수행을 철저히 하지 못하여 저의 경험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과 선지식들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면 수행하는 중에 경우에 따라 마장이 올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처님도 보리수 아래서 성도 하실 때에 파순 이라는 천마로부터 협박과 유혹을 받으셨고 많은 선지식들도 마의 경계와 마의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능엄경에서는 마의 종류와 마에 사로잡힌 수행인들의 모습에 대해 자세하게 설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중생의 구조라 할 수 있는 색 수 상 행 식인 오온에 각각 열 가지씩 모두 오십 가지의 마가 붙는 일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근대의 고승인 용성 선사는 각해일륜
수행을 지도 하시는 선지식들의 법문을 접하다 보면 분별심을 버려라 혹은 차별심을 버려라하는 말을 흔하게 듣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모든 분별이 쉬어 지겠습니까? 그렇게 가르치시는 분의 요지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그런 말은 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저도 불교 일을 하면서 분별을 하지 말라 차별을 두지 말라 는 말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선악 분별을 끊으라느니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라느니 밉고 곱고를 두지 말라느니 하면서 수행인들에게 일체의 생각을 쉴 것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 저는 개인적으로 무조건 동의 할 수없습니다. 그 까닭은 이 말들에 중생의 인식구조와 삶의 현실을 무시한 경향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처님께서도 말과 생각으로써는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 갈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