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함이 끝이 없음이라. 강에 달 비치고 소나무에 바람 부니, 긴긴밤 맑은 하늘 무슨 할 일이 있을손가? 불성계의 여의주는 마음의 구슬이요,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은 몸 위의 옷이로다.” 증도가의 위 구절은 깨달은 이가 부른 밝고 맑은 마음의 시원함을 읊은 것이다. 깨달은 이는 마치 마음이 여의주를 품은 것에 비유된다. 여의주는 마음대로 자신의 이익을 부르는 그런 주문을 가능케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사회사상의 핵심을 얻을 수 있다. 현대식 공부를 한 젊은이들은 불교사상의 사회적 관심을 사회 정의의 회복에 있는 것인 양 즐겨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불교는 사회정의에 몰두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 불교는 그런 측면을 강조하는
“상(相)이 있는 유위법은 어찌 무위의 실상법에 한 번 뛰어 들어 여래지(如來地)에 바로 들어감과 같으리오. 다만 근본만 얻을 뿐, 지말을 근심하지 말지니. 마치 깨끗한 유리가 보배스런 달을 머금은 것과 같도다.” 우리는 앞글에서 여러 번 유위법과 무위법의 차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 한국에서는 그간의 도가철학의 영향으로 저 유위법과 무위법을 알기 쉽게 설명하지 못하고 그냥 글자 그대로 해설하는 정도로 끝냈다. 유위법은 ‘함이 있다’라든가 무위법은 ‘함이 없다’라는 정도의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저런 글자 풀이식의 해설로는 만족이 되지 않는다. 유위법은 타동사적인 행위로서 마음의 욕망이 마치 타동사처럼 바깥의 목적어를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도덕의 당위도 이 유위법의 영역에 해당한다.
“상(相)에 머무는 보시는 하늘에 태어나는 복이나, 마치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다.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내생에 뜻과 같지 않은 과보를 부르리로다.” 불법은 우주 일심(一心)의 법을 말해주신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 우주 일심은 이 우주법계의 모든 것이 다 일심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이 다 일심의 작용이라는 것은 사사물물, 두두물물 일체가 다 마음이라는 의미를 말한다. 인간과 동물이 다 마음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식물이나 심지어 무생물까지 다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흙과 물도 다 마음이라는 것이다. 흙과 물이 마음이기에 흙과 물에 정성들여 기도를 하면 흙과 물도 기도의 응답으로 정화되고 해맑아진다. 이것은 일본의 의사가 기도 후의 흙과 물을 사진으
“깨친 즉 그만이요, 더 이상 공덕을 베풀지 않나니, 모든 유위법과 같지 않도다. 주상(住相)이 있는 보시는 천복(天福)을 생하게 하지만, 그것은 하늘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다.” 영가(永嘉)대사의 말을 음미해 보자. 영가대사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선가적인 입장에서 깨친다는 것은 사고방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즉 소유론적 입장을 떠나 홀연히 존재론적 사고방식에로 일시에 회전하는 것이 곧 부처되는 길을 밟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가의 사유에 따르면, 불교는 어떤 정신적인 것(something spiritual)을 점진적으로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mentality)을 전적으로 소유의 의식에서부터 이중부정적인 초탈의 사고방식(非∼非∼=neither∼nor∼)과 동시
“돈오(頓悟)하여 무생(無生)을 요달하고서 부터는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뻐하겠는가?” 돈오의 경지에 노니는 것은 공의 경지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의 경지는 이미 원효대사가 ‘금강삼매경론’의 서문에서 암시하였듯이, 비유비무(非有非無)라는 이중부정과 같은 초탈의 경지에서 머무는 것을 말한다. 초탈의 경지는 곧 바로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해탈의 경지는 일체의 경계를 다 벗어나 있는 상태이니, 그것은 존재와 무의 양 경계를 떠난 상태와 같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방식은 다 대대법(待對法)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다 서로 짝을 이루어 존재한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반짝거리는 새벽별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고 하는 것도 새벽별의 반짝거리는 이중적 대대법(待對法)이 우주의 진리임을 부처
“창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독약을 마셔도 한가롭고 한가롭도다.” 죽음의 공포가 불법을 깨친 이에게 한낱 어린아이 장난 같다는 것이 영가대사의 생각이겠다. 성철 큰스님은 그의 저서인 ‘신심명, 증도가 강설’에서 구마라습의 제자인 승조 스님과 또 달마대사의 일화를 각각 소개하셨다. 승조(僧肇) 스님은 당시 요진나라 임금이 그를 탐내어 재상으로 삼고자 하므로 사양하는 그를 위협하여 그 직을 맡도록 강요했다. 이에 승조 스님은 죽음을 감수하고 그 요청을 거절했다는 일화를 소개하셨고, 유명한 달마 스님은 그의 설법으로 많은 중생들이 감화를 받는 것을 보고 질투심을 느낀 이들이 그를 죽이려고 시도했으나 다 실패하고, 드디어 여섯 번째에 독약으로 그가 세상의 인연을 스스로 다했다는 것이다. 그가 죽은 뒤에
“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 스승을 찾고 도를 물었는데, 그것은 오로지 참선을 위함이라.” 영가대사는 불법을 찾고 대도를 깨칠 수 있는 방도가 있으면, 어떤 수고도 아끼지 말고 용맹정진하라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스님이나 재가불자에게 이 보다 더 급선무가 없음을 역설한다. 그런데 영가대사는 이처럼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은 참선을 위함과 같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보통 참선이라 하면 앉아서 고요히 좌선하는 것만을 생각하는데, 영가대사는 도와 진리를 찾기 위하여 전력을 다 하여 일념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다 참선이라고 말했다. 좌선(坐禪)만 선이 아니라, 동선(動禪)도 다 참선의 일종이라는 의미를 영가대사가 암시했다. 성철 큰스님은 그의 ‘심신명 증도가 강설’에서 설봉, 암두, 흠산 등
“사자후(獅子吼)의 두려움이 없는 설법이여. 뭇 짐승들 들으면 모두 뇌가 찢어짐이라. 향기 나는 코끼리(香象=성문과 연각)는 분주하게 달아나 위엄을 잃고, 천룡(天龍)은 고요히 듣고 희열을 내는 도다.” 백수의 왕 사자는 모든 짐승이 다 두려워하는 포효로서 두려움이 없는 무외(無畏)의 존재를 나타낸다. 사자후는 부처님의 법을 깨달은 무상의 정등각을 말하며 사자후를 들으면 뭇 짐승들은 이해가 안 되어서 뇌가 파열하고, 짐승 중에서 가장 육중하고 힘이 센 향기 나는 코끼리는 놀라서 도망을 간다. 말로서 부처님의 법을 들은 성문(聲聞)과 부처님이 설한 연기법을 듣지 않아도 이치로 깨달은 연각(緣覺) 등과 같은 소승(小乘) 등은 불법에 입문하였기에 향기가 나고 힘이 세지만, 아직도 땅을 떠나지 못하는 코끼리의 신
“종취도 통하고 설법도 통함이여, 선정과 지혜가 원만히 밝아 공에 얽매이지 않는도다. 나만 이제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부처님 본체는 모두 다 같도다.” 부처님 가르침에 통달하고 그 가르침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설법에도 통달하면, 그런 사람은 이미 부처님의 마음인 선정과 부처님의 말씀하신 법의 이치에도 통달하여 자유자재 그 자체가 된 사람이라 하겠다. 그런 사람은 허공처럼 자유자재하니, 그 허공이라는 것에도 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바로 부처님의 본체와 모두 하나로 상통하므로 공이나 공이라는 생각마저도 없다. 불법과 예수의 법에도 근본적 차이가 있다. 불법에는 석가모니가 창안한 생각이 없다. 석가모니는 이 세상에 이미 무시이래로 있어 온 우주의 사실을 존재하는 그대로 알려준 것에 불
“나쁜 말을 관찰함이 바로 공덕이니, 이것이 나에게는 선지식이 됨이라, 비방따라 원망과 친한 마음 일지 않으면, 무생(無生)의 자비인욕을 표현해서 무엇하리.” 도를 증득하는 마음은 남의 표폄훼예에 좌지우지 되어서 흥분하는 감정의 놀이가 아니다. 남의 표폄훼예에 좌지우지되어서 감정의 기폭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세속의 명리에 목을 매다는 결박과 다름이 없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우리가 불법을 찾는 것인데, 왜 스스로 자신을 얽어매려하는고? 자유스러워지기 위해 우리는 남의 표폄훼예에 스스로 초연해지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일시적으로 남의 칭찬과 비난에 대하여 울고 웃는 희비극의 마음가짐을 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은 대중의 기호에 따라 자기의 모든 것을 맞추려는 이른바 민주적 대중주의를 경계해
“남의 비방에 따르고. 남의 시비에 신경 쓰지 마라. 그런 일은 다 불을 잡고 하늘을 태우려 함이로다. 공연히 헛수고하면서 스스로를 피곤하게 할 뿐이로다. 도를 깨침은 마치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아서 녹아서 단박에 불가사의한 해탈 경에 들어감과 같도다.” 불도를 깨친다는 것은 자연이 스스로 갖추어 놓은 자성을 증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들의 표폄훼예(表貶毁譽)에 온 신경을 쓰는 것은 곧 불도와 합일하기 위하여 존재론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평가에 모든 것을 거는 소유론적 자세와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존재와 소유는 불법의 증득과 일반적 지식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므로 철학의 한 내부의 의견 차이로서 단순히 여겨서는 안된다. 또 존재론의 세계는 철학적 영역의 한 분야로서의 형이상학
“상근기는 한번 결단하여 일체를 깨칠뿐, 중하근기는 많이 들을수록 더욱 믿지 않도다. 스스로 마음의 때묻은 옷 벗을 뿐, 뉘라서 밖으로 정진을 자랑할건가.” 불교는 기독교처럼 열열한 신앙을 자랑하는 그런 신앙교가 아니다. 불교는 다 아시다 시피 수행의 철학이고 종교이다. 불교는 우선 수행의 철학에서 유치한 신앙을 절대로 자랑하듯이 남들 앞에서 외치지 않는다. 불교도 중에서 출가 스님이든, 재가 신도이든, 남들 앞에서 보란 듯이 유창하게 설변을 시정의 약장수가 약팔듯이 하는 사람이 있든가? 불교의 품격은 고요한 명상과 깊은 사색에서 나오지 떠들석한 기도의 소음과 쉬지 않고 뇌까리는 열변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다. 불교의 수행은 때묻은 옷을 우리가 벗듯이 그렇게 조용히 일어나는 일이지, 세상일체가 여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