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세상사이기에 자신의 일에서건 타인의 일에서건 ‘기다림’이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혼신의 힘을 쏟고도 뜻대로 성취되지 않을 때, 흔히 좌절과 실망을 품고 뜻하던 일을 포기하기가 쉽다. 하지만 이는 매우 성급한 판단이며, 일을 그르치는 새로운 원인이 될 뿐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옛말에 “소를 물가로 데려가는 것은 목동의 몫이나 물을 마시고 마시지 않는 것은 소의 마음이다”고 했다. 또, 엄마가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려주어도 아이들은 젓가락
그 옛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귀(富貴)를 누리는 자가 도를 닦는다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사실이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함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이다. 그 제행 가운데도서 특히 부와 권력의 덧없음을 유독 강조하는 것이 불교이다. 그러니 이른바 성공(成功)을 삶의 목표로 정하고 부귀영화를 향해 화살처럼 달려가는 자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달가울 수가 없다. 추구하는 부귀영화가 잠시 스쳐가는 것일 뿐임을 인정하는 순간, 성공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던 종아리에 힘이 쑥 빠지기 때문이다. 제법(諸法)이 무아(無我)임을 가르치는
온갖 풀끝마다 명명백백히 드러나 있는 것이 부처님과 조사의 뜻이라 했다. 이 말씀에는 불교가 말하고자 하는 진리와 깨달음의 성격에 대한 중요한 힌트가 담겨있다. 진리는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진리를 지금 보고 있는 것 또는 지금 알고 있는 것들과는 무관한 것이라 여긴다면,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떠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여긴다면, 그런 진리와 깨달음은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밝히신 진리와 깨달음은 아니다.하지만 많은 이들은 “밥 먹고 똥 누고 잠자는 일상을
선사(禪師)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하는 일이다. 따라서 사람들을 판별하고 대접하는 기준도 “그의 안목이 얼마나 밝은가” 하는 점이 그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 안목만 분명하다면 설령 그의 행실이 천박하고 비루하다 할지라도 스승들은 그를 누구보다 아끼면서 가까이 두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출신과 신분은 물론이고 학식과 나이, 심지어는 남녀의 구분마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혜(大慧)선사도 그런 분이었다.대혜선사가 노년에 경산(徑山)에 머물 때였다. 하안거 결제를 맞아 승속들이 한자리에 운집하자 대혜선사는
혼자 할 수 없는 게 스승 노릇이다.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고 조직을 이끌기 위해서는 혼자 있을 때는 필요치 않던 많은 덕목을 새로이 갖추어야 한다. 그 가운데 가장 필수적인 덕목이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할 줄 아는 태도이다.송나라 때 자보(自寶)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사창가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아냥거림 속에서 자랐지만 타고난 성품이 청렴하고 공손하였다. 그러다 장거리를 지나가는 스님들의 언행을 보고 고아한 성품과 청정한 삶을 흠모하게 되었다.“나도 저분들처럼 맑고 깨끗하게
불교는 집착을 버리는 종교이다. 마음에 드는 것이면 꼭 붙들고 놓지 못하는 게 중생의 마음이다. 그렇게 ‘내 것[我所]’이라는 이름을 붙여 차곡차곡 쌓아두려는 것이 욕심[貪]이고, 내 것이 남의 것이 되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분노[瞋]이고, 내 것이 남의 것보다 낫다싶어 우쭐거리는 짓이 교만[慢]이다. 그리고 이런 욕심과 분노와 교만의 밑바탕에는 본래 ‘나’라고 할 만한 것도 ‘나의 것’이라 할 만한 것도 없는 실상(實相)을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겼다 인연 따라 사라질 뿐이다”
유약하고 불안정한 자식이 자기 두 발로 우뚝 서도록 돕는 것이 부모가 할 노릇이다. 부모노릇은 기꺼운 일이긴 하지만 더불어 힘든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없이 은혜를 베풀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일찌감치 독립(獨立)하여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식이 있다면, 이보다 큰 효도(孝道)가 없다.세간에서의 스승노릇도 쉽지가 않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숙련된 자신만의 업적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해 전수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은 ‘시간’이라는 첨가제를 빼버리면 그야말로 앙꼬 없는 붕어빵과
어느 집안이건 막내는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대상이다. 선가라고 예외는 아니다. 오조 법연선사 역시도 늘그막에 원정(元靜)이라는 제자를 얻고는 유난히 그를 아끼며 너그럽게 대하였다.원정선사는 옥산(玉山)의 대유학자인 조약중(趙公約)의 아들이었다. 그는 열 살에 큰 병에 걸렸다. 그의 어머니가 병약한 아들을 걱정하며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였는데, 어느 날 아들을 출가시키라는 기이한 꿈을 꾸게 되었다. 그래서 부모가 그를 성도(成都)의 대자보생원(大慈寶生院)에 기숙케 하자 신기하게도 아이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 절에서 지내며 경전을 공부하
인생만사(人生萬事)라 했다. 살면서 겪는 온갖 일들을 뜻하기도 하겠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면 온갖 일들을 빠짐없이 겪어야하는 게 바로 인생살이란 생각이 든다. 예외가 없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기구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햇살 좋은 둔덕에 늘어선 무덤들을 바라볼 때마다 늘 생각한다.‘구곡양장(九曲羊腸)의 험난한 길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않은 이 누가 있고, 살고 있지 않은 이 또 누가 있고, 앞으로 살지 않을 이 또 누가 있을까?’겪어야 할 일이 오만가지이니, 그에 따라 번뇌와 괴로움도 오만가지이다. 그 숱한 일들 가운데 가장 큰
동참(同參)이란 말이 있다. 함께 수업하는 동료나 같은 목적을 가진 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같은 뜻으로 같은 자리에 앉았으니, 서로에 대한 애틋함이 어떠하겠는가? 함께했던 타인들은 곧 나의 분신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걸쭉한 농담과 짓궂은 희롱도 그들에겐 흐르는 세월에 가시지 않는 살가운 정담(情談)이다.선문(禪門)에서도 동참이라는 단어가 흔히 쓰인다. 석두 희천(石頭希遷)선사의 참동계(參同契)를 비롯해 수많은 선사들이 대중들에게 동참을 호소하였다. 어느 자리에 함께 참여하자는 것인가? 부처님과 마하가섭, 달마
대학원시절,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를 읽고 진전사지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 도의국사 부도 앞에서 느꼈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다. 분명 몇 해 전에도 다녀간 곳이었지만, 전혀 그곳이 아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스스로 심미안이 없다면 심미안을 가진 사람을 쫓아가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사람을 알아보는 안목 또한 마찬가지다. 훌륭한 사람을 곁에 두고도, 그 아름다움과 향기에 젖을 기회를 놓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럴 때, 유능한 인간해설사가 곁에 있다면 그것 역시 홍복이라 하겠다.법연
현명한 부모는 자식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친다 하였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물고기를 달라며 보채는 자식에게 스스로 낚시질을 배우라고 더욱 다그친다. 그 간절한 뜻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세월이 필요하다.선가의 스승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번민과 고난 속에서 슬기로운 생각과 현명한 행동의 지침을 찾는 이들에게 그분들은 가급적이면 말씀을 삼가셨다. 자비심이 많은 스승들일수록, 후학을 아끼는 마음이 간절한 스승일수록, 더욱 말을 삼가며 제자들을 다그쳤다. “스
불교는 필연(必然)을 말하는 종교다. 우주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상 가운데 우연한 사건이란 없다고 보는 것이 불교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는데, 하물며 긴 세월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이겠는가? 얽히고설킨 그 인연의 실타래가 아마 금생의 일만은 아니지 싶다.송나라 때 일이다. 진주(秦州)의 농성(隴城), 죽포파(竹鋪坡) 앞쪽 철장령(鐵場嶺) 아래의 작은 산골마을에 신씨(辛氏) 부부가 살고 있었다. 깊은 밤, 갑자기 눈을 뜬 아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깜짝 놀라 신씨가 따라
선지식, 훌륭한 스승을 묘사할 때 흔히 용상(龍像)의 위엄과 사자후(獅子吼)를 거론한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용상(龍像)의 위엄’이란 봄바람 같은 덕화를 갖췄기에 그분 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는 것이지, 의복과 물품 등으로 갖춘 외형이 용처럼 기운이 넘치고 코끼리처럼 위압적이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사자후(獅子吼)’란 지혜로운 말씀이 가슴을 뒤흔들기에 그분 앞에서는 어쭙잖은 지식과 말장난이 꽁지가 빠지게 달아난다는 것이지, 목소리가 크고 살벌해 찍소리도 못하게 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세 살 어린나이에 노화상
송나라 때 도령(道寧)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그는 흡주(州) 출신으로 성이 주(注)씨였다. 처음 그는 도에 독실한 뜻을 두었으나 출가는 하지 않고 수행하던 사람이었다. 깊은 산, 외진 동네를 전전하며 홀로 수행하던 그는 우연히 장산천(蔣山泉)선사를 찾아뵙게 되었다. 천 선사는 그가 법기(法器)임을 한눈에 알아보고 출가를 권하였다.“평생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출가하게나. 그 길이 편하고 쉬운 길이야. 재가자의 신분으로 불법을 공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도령은 천 선사의 따뜻한 관심과 격려에 감사드리며
그렇게 되었을 땐,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존재건 현상이건 제 홀로 이루어지는 건 세상에 없다. 또한 부처님께서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그림자[影]와 같고, 메아리[響]와 같다”고 하셨다. 그림자와 메아리는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무엇의 그림자’이고, ‘무엇의 메아리’이다. 바로 그 영향(影響)을 끼치는 ‘무엇’, 특정 현상의 전제가 되는 ‘무엇’을 불교에서는 인연(因緣)이라 한다.인연화합생(因緣和合生)의 법칙에서 사람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수많은 인연이 모여 어떤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 본래부터 그런 사
은혜(恩惠)는 사랑을 낳고, 사랑은 그리움을 낳는다. 은혜가 깊을수록 그리움의 그늘도 짙기 마련이다. ‘그’ 또는 ‘그것’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렇지 못할 일들이 수두룩하니, 곰곰이 살펴보면 감사함과 그리움의 대상도 따라서 수두룩하다.그리움의 대상은 지금 무엇을 소중히 여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욕정(欲情)을 추구하는 이들에겐 오감(五感)의 충족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다. 따라서 아름다운 그 모습, 정겨운 그 목소리, 향기로운 그 냄새, 달콤한 그 맛, 부드러운 그 느낌의 ‘누구’ 또는 ‘무엇’에 감사하고, 항상 곁에서 떠나지 않길 바
달마의 가르침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한다. 뒤죽박죽 엉클어진 세상만사가 몽땅 마음으로 지어진 것일 뿐이며, 그 마음의 실상과 성품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 속엔 ‘뒤죽박죽’도 없고 ‘엉클어짐’도 없고 이렇다 저렇다 할 ‘세상’과 ‘만사’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선(禪)이다. 이처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淸淨心]을 배우고, 터득하고, 실천하는 것이 선종(禪宗)이다.티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터득하고,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이러이러한 것이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입니다” 하고 지목할 수 있다면
황매현(黃梅縣)의 어느 여관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한 꼬마거지가 있었다. 그 아이는 한 푼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면서도 그 목소리가 비굴하지 않았고, 공손히 허리를 숙이면서도 맡겨둔 돈 되찾아가는 사람처럼 품새가 당당했다. 그래서인지 여관주인도 여관에 투숙한 손님들도 그를 각다귀라 여기며 내치지 않았다. 도리어 길거리에서 살면서도 언행이 방정한 것을 기특해하며 선뜻 동전을 내주고 귀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그 꼬마거지는 연못을 유영하는 잉어의 몸짓으로 바글바글한 손님들 틈새를 조용히 헤집고 다녔다.멀찍이서 그 꼬마를 유심히 지켜
찰라의 순간을 담은 필름들이 수없이 모여 한편의 영화를 만들듯 삶은 불연속의 단편들이 엮어내는 빛깔과 소리의 향연이다. 그 흐름 속에서 항상 지속되는 ‘무엇’은 없다. 이것이 실상(實相)이다. 하지만 이를 온전히 파악하고 진심으로 수긍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 ‘변화하는 자’를 상정하고는 ‘무엇’이 과거에는 어떠했고 현재는 어떠하며 미래에는 어떨 것이라 꿈꾸면서 살아간다.거기에 더해 인간의 기억은 결코 냉정하지도 못하다. 한편의 영화에서 가장 멋진 장면을 골라 포스터를 만들듯, 사람들은 자신을 또 타인을 특정한 장면으로 기억하고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