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사동에는 행인들에게 가훈이 될 만한 글을 붓으로 써 무료로 나눠주는 분이 있다. 글 내용도 다양해서 성인이나 철인들의 말씀, 고사성어, 그밖에 삶의 귀감이 될 만한 내용들을 골라서 써준다. 그중에는 부처님 말씀도 포함되어 있다.어느 날에도 나는 그분이 글을 쓰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육십쯤 되어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그분에게 다가가 부처님 말씀 가운데에 좋아하시는 글이 있으면 한 장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분은 흔쾌히 아주머니의 부탁을 승낙하고 숙달된 솜씨로 불경 한 구절을 한자로 써내려갔다. 가만히 보니
불교 공부를 하는 도반들과 함께 전라도의 유명 산사를 찾았다. 워낙 이름난 절이다보니 일반 관광객뿐 아니라 많은 불자들로 북적였다. 순례를 목적으로 관광버스를 전세 내서 방문한 단체들도 많았다. 나는 일행과 함께 부처님이 모셔진 대웅전을 들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우리 옆을 지나가는 불자들 속에서 이런 말이 들렸다.“신도님들, 산신각에 들러 참배하세요. 절에 오면 꼭 산신님을 찾아야 합니다.”돌아보니 스님은 아니고 법복을 입은 여성불자였다. 아마도 그 절의 소임을 맡아 봉사하는 불자 같았다.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다가가 “
모선원 설립자 스님이 출가하기 전 약 4년 동안을 직접 시봉한 일이 있다.(그 후로도 6년간 모시면서 가르침을 받았고 상임법사로 재직했다) 당시 스님의 직함은 대한불교회관 원장이었고, 내 역할 중의 하나는 원장님을 친견하겠다고 찾아온 분들을 안내하는 일이었다.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겨울날 사무처에서 연락이 왔다. 스님들이 찾아오셨으니 원장님께 모시고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사무처로 내려가 보니 체구가 건장한 네 명의 스님들이 절 마당에 눈을 맞으면서 서성이고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그 스님들의 형색이었다. 보통 스님들과
서울 조계사 주변의 불교용품점에 들렀다. 오래전 출판된 불서 한권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용품점 안에는 한 여성불자와 비구니스님이 있었다. 두 사람이 용품점에 함께 온 일행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후 그 불자가 “집안에 우환을 없애려면 무슨 경전을 읽어야 좋을까요?”하고 주인에게 물었다. 그는 “나보다는 스님께 직접 여쭤보는 게 좋겠네요”하면서 스님을 바라봤다.스님은 그 불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안에 우환이 많고 평온하지 못하면 ‘조왕경’을 읽으세요. 조왕님을 모시지 않아 그럴 수 있습니다. 조왕님을 정성껏 위하면 재물도
대승에서는 존재의 실상을 공으로 파악한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도 공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을 과학적 잣대로만 해석하면 불교를 유견(有見)에 떨어지게 한다. 이는 불교가 매우 합리적이고 과학적 종교라는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심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교설이 안고 있는 본래적인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대승의 모든 교리들은 소승의 법성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라고 가르친다. 특히 반야경은 소승교의 가르침들을(여기서 소승교는 초기불교의 가르침들이다) 억제하는 지양교(止揚敎)로서 설법에 큰 차이를 보인다. 그
한국불교 최고의 고승 가운데 한 분으로 꼽히는 어느 스님은 다음과 같은 불교관을 피력한 적이 있다.“이것이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 알기 쉽습니다.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얼음은 질량에 비유합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이 없어졌습니까?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었을 뿐 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즉 얼음이 물이고 물이 즉 얼음입니다. 에너지와 질량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이는 현대과학 이론인 양자론에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물이 없어진 것이 아니니 불멸이요 얼음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니 불생입니다. 모양만이 바뀔 뿐 언제나 물은
“우리의 몸과 마음은 나가 아닌 무아입니다. 몸은 물질의 결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가 아니고 마음은 인식기관과 인식 대상이 서로 어울려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나가 아니라고 해서 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아를 무아라고 깨달은 그 마음은 무아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참된 나입니다. 그 참나는 나고 죽음이 없고 본래부터 있어 왔으며 텅 비었고 충만합니다. 거기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은 하나이며 본질적으로 평등합니다.”지난 호에서 ‘화가 일어날 때에 화를 화인 줄 아는 그 마음은 참나’라고 주장
척박한 현실에 불교의 위신을 살려주는 몇몇 스님들이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삶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즉문즉설의 형식으로 해답을 주는 스님, 명상을 통해 마음의 상처나 불안을 치유해 주는 스님, 사색어린 말씀으로 인생의 깊이를 깨닫도록 인도 하는 스님 등에 의해 우리 사회가 여전히 불교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부지런히 대외적인 활동을 펼치는 스님들의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간혹 법문이나 책을 읽다보면 불교 견해가 여법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모 스님의 경우도 그렇다. 그 스님이 말하는 불교지식과 수행이 실제로는 불
지방의 큰 사찰을 찾았을 때다. 종단에서 포교사 자격을 부여받고 불교활동을 한다는 분이 절에 온 사람들에게 불교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 포교사는 절 경내를 이리저리 안내하며 교리를 곁들여 전각·탑·불상·탱화 등 성물들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그분 말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더러는 질문도 하는 등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절에 사람들이야 오건말건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불교계 정서를 감안하면 신선해 보이기까지 했다.다만 아쉬운 점은 그 포교사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정체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분은 관음전
서울 인사동 길을 걷다가 두 사람이 언쟁하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사람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피켓을 손에든 기독교 전도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법복차림의 여성불자였다. 그 불자는 기독교 전도자에게 “왜 지나가는 사람 코앞에다 얼굴을 들이대고 우상숭배니 지옥 간다느니 협박하느냐?” 따져 물었다. 이에 기독교인은 연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으며 “불로 심판하리라, 그 고통에 이를 갈리라. 아멘!”이라는 말로 불자의 항의에 맞섰다. 나는 그 불자의 심경에 동조하면서도 그 같은 광경이 좋은 모양새가 아닌지라 그
부처님 탄생게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읊은 짤막한 게송이다. 부처님은 어머니 마야부인의 태중으로부터 나오자마자 동서남북으로 각각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로 이 세상에 온 목적을 밝히셨다.부처님 탄생게는 많은 불교경전에 언급되지만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디가니까야’에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높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 나는 이생을 끝으로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나와 있으며, ‘장아함경’에는 “하늘과 하늘 아래 내가 가장 홀로 존귀하다. 요컨대 나는 중생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 등 동남아불교에서 수행하고 돌아오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국불교에 식상한 불교인들이나 대승불교에서 길을 찾지 못한 이들이 그곳에서 갈증을 충족시키고 돌아온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일은 상좌부 계통의 불교를 수행한 사람들이 한국에 돌아오면 대부분 대승의 가르침을 모질게 공격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승불교의 전반적인 사상에 대해 마치 융단폭격 하듯 온갖 비판을 쏟아낸다.얼마 전 만난 불자도 그런 이들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불교에 익숙히 신행생활을 해왔으며, 내게서
아무리 소중한 사람이었더라도 죽은 이후에는 가까이 하기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살아서는 느끼지 못한 혐오와 두려움이 죽음 앞에서 일어난다. 예전에 이모님 장례를 치르면서 있었던 일이다.이모님은 아들을 다섯이나 낳고 여섯 번째에 그토록 바라던 딸을 낳았다. 늦게 얻은 귀한 딸이었던 만큼 이모님은 물론 가족들로부터 무척이나 사랑을 받았다. 어느덧 그 딸이 장성해 시집갈 나이가 됐는데 이모님이 숙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됐다. 워낙 술을 좋아했던 이모부가 어린 아이들을 남겨놓고 일찌감치 돌아가셨기에 이모님은 남편도 없이 자식들 뒷바라지를
얼마전 미얀마 상좌부불교를 지도하는 스님과 점심을 함께했다. 스님은 조계종으로 출가했으나 회의를 느껴 초기불교를 공부했다고 한다. 스님은 대화를 하던중 내게 요즘은 무슨 경을 가르치느냐고 묻기에 북송때 회당조심 스님이 편찬한 ‘명추회요’를 강의한다고 말씀드렸다. 스님은 대승의 교리를 잘 모른다며 내용이 어떤 것인지 간략히 알려달라고 했다.나는 대승의 모든 교리가 공사상과 불성사상에 입각해 펼쳐지고 있으므로 ‘명추회요’의 내용도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명추회요’의 종지에 대해 간단한 설명도 곁들였다. 그런데 스님이
“보라! 이래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 신앙심 깊은 가톨릭인들에게 재현되는 성흔(聖痕)은 분명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성흔을 신의 은총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이를 통해 신에 대한 믿음이 더욱 공고해질 수 있다.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기적’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 있다. 과연 성흔이 신의 은총에 의해 일어나는 일인지 증명하고 싶어 한다. 캘리포니아의 존F 케네디대학의 초심리학자 스코트 로고 교수는 성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수백 명에게 나타난 성흔이 기적과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스코트 로고
성당에 다니는 지인이 있었다. 가톨릭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내게 자신의 종교에 대해 자주 얘기를 했고 성흔(聖痕)이 있다는 것도 그때 들었다. 나는 본래 종교적 신비체험이나 기적현상을 잘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가톨릭의 성흔 현상이 어떤 원리에서 작동하는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연히 불교 시각에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도 고민했다.성흔은 가톨릭의 성인(聖人) 제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보통 성인이라고 하면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공자처럼 인류사에 영향을 끼친 위대한 인물을 지칭하지만 가톨릭에서 말
모 불교 시민운동 단체에서 주관한 행사에 참여했을 때 일이다. 행사 첫머리에 주제발표가 있었다. 들어보니 연기사상에 입각해 사회운동을 활발히 펼쳐야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발표자가 말하는 연기와 관련한 내용들이 너무 빈약하고 문제도 적지 않았다.우선 어떤 연기설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연기설에는 십이연기설을 비롯해 업감연기설, 육육연기설, 육대연기설, 진여연기설, 아뢰야식연기설, 법계연기설 등이 있다. 발표자는 어떤 연기설에 입각해 불교운동을 해야 하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피상적으로 “연기적 삶”이니 “연기적 관계”니 하면서
명상단체의 분원장이라는 여성 한분이 일행과 찾아왔다. 진지한 성격에 말솜씨가 좋은데다가 마음도 열려있어 상대방이 믿음을 갖게 하는 사람이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의 스승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분원장은 자신의 스승을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그는 스승을 부처님과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스승이 깨달음을 얻을 때 읊었다는 오도송을 읽어주었다. “마음이 곧 우주요 우주가 곧 신이더라. 마음과 우주와 신이 모두 하나이니 천국극락이 여기를 벗어나지 않았노라. 나를 버려 참 생명을 얻으니 모든 성인이 눈앞에 있더라.”분원장은
신중기도를 열심히 해서 가피를 받았다는 그 불자처럼 신중신앙은 기복적인 성향이 짙다. 신중을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초월적 대상으로 여기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주거나 우환을 없애주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신중기도를 열심히 하면 신중이 늘 자신을 따라다니며 지켜준다고 믿는다. 불자들의 이러한 신중 신앙이 잘못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 수많은 경전에서 신중은 삼보를 보호하고 신심이 깊은 중생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신중의 종류는 다양하다. 불법을 지키는 대표적 신중은 제석천과 범천이다. 제석천은 천계의 왕이고 범천은 세
지방의 어느 사찰에 초청을 받아 법회에 갔을 때였다. 점심 공양을 끝내고 일어서려는데 몇몇 불자가 차 한 잔 모시겠다고 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던 중에 한 여성불자가 옆에 앉은 분을 가리키며 “법사님, 이 보살은 신장님 가피를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신장 기도를 열심히 해요”하고 말했다. 나는 당사자에게 칭찬을 곁들이며 “불자님은 어떻게 기도 하시기에 신장님 가피를 받으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신중기도를 하게 된 사연을 설명해주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늘 우울했다. 그러다 시집을 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