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께서는 스님이셨다. 오늘날 내가 부처님의 길을 가게 된 동기도 순전히 할머니 명덕 스님의 공덕에 의지해서이다. 스님께서는 나를 무척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셨다. 어린 시절 방학 때면 스님이 계신 암자에서 지냈다.스님은 도를 깨치신 분은 아니었지만 부처님을 향한 신심과 정성은 극진하셨다. 신도들이 절에 올때 생선도 못 먹게 하셨고 부부간에 잠자리도 금하셨다. 부처님께 바칠 공양미를 가져올 때에는 도중에 땅에 내려놓지 못하게 했고 불공 전에 가져온 음식을 먼저 먹지 말라 하셨다.믿기 어렵겠지만 이런 스님에게는 신통력이 있으셨다
요즘 내가 강의하는 책이 ‘명추회요’다. 송나라 때 고승인 영명연수 선사가 저술한 ‘종경록’ 가운데 요체가 되는 내용들을 제자 회당조심 스님이 선별해 엮은 책이다.얼마 전 ‘명추회요’를 설명하고 있었다. 내용은 ‘과거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과 미래의 마음은 볼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 부처도 하물며 이렇게 마음을 볼 수 없고 얻을 수 없는데 어찌 사람들이 마음을 보겠는가?’라는 부처님 말씀이었다. 이 구절을 설명하는 도중 한 불자가 질문했다. “불교수행은 마음을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 하시면 혼란이 생깁니다.”
돈독한 신심과 열정으로 부처님 법을 공부했던 강단 있는 여성불자님 얘기다. 게다가 꽤 오랜 세월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했고, 시어머니 성격이 유별나 시집살이도 혹독했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보니 시어머니가 툭하면 무당들을 찾아 점을 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용한 무당이 있다며 함께 가자고 했더란다. 그 불자는 시어머니 말씀을 거역할 수도 없고 내심 호기심도 있어 함께 무당을 찾아갔다.무당은 동전들을 손에 들고 주문을 외다가 상 위에 떨어뜨린 뒤 펼쳐진 동전들의 배열을 보고 점을 쳤다. 시어머니 차례가 되었다. 시어머
망설이는 성격은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거나 이랬다저랬다 반복하는 행동을 낳는다. 예를 들어 옷을 사면 그대로 입지 않고 잘못 샀다는 생각이 들어 그 옷을 다시 바꾼다. 이런 식으로 갈까 말까, 할까 말까,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 시간을 허비한다. 망설이는 성격은 일의 능률이 떨어지고 허점을 노출시키는가 하면 때로는 큰 낭패를 보게 된다. 나도 바로 이런 망설이는 성격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어렸을 적의 일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집에서 거리가 꽤 멀었다. 어린 걸음으로 족히 40~50분은 걸어야
오래 전 일이다. 10여년을 모시고 공부하던 스승과 매끄럽지 못한 관계로 결별했다. 법에 대해 스승과의 견해가 달라 늘 갈등했고 이로 인해 마침내 스승과의 인연을 접어야 했었다. 그로 인해 나는 적잖은 심적 방황을 겪었다. 앞으로의 삶을 어느 방향에 두어야 하는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생각 끝에 나는 지금은 많은 이들의 멘토가 되어 유명해진 모스님을 만났다. 당시 그 스님은 출가 전부터 나와 교분이 깊었던 관계로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스님을 만나 스승과 헤어지게 된 동기와 과정들을 설명하고 내가 앞으로 어떻
명산에는 절도 많고 기도처도 많다. 서울의 명산인 북한산에도 많은 사찰과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명산이라고 반드시 부처님을 모신 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속인들이 세운 굿당이나 신당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아마 절 수효 못지않게 굿당과 신당이 자리를 잡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나는 어렸을 적부터 무속인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굿당이나 신당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안에 들러 굿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했다. 며칠 전에도 오랜 만에 북한산을 오르게 되었는데 꽤 규모가 큰 굿당 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
초등학교 친구 중에 목사가 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를 만날 때면 이젠 불교를 그만두고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집요하게 전도한다. 지금도 나를 위해 하나님에게 매일 기도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를 무척 사랑하시기 때문에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면서 어떻게든 설득시키려고 애쓴다.이런 친구가 불교를 믿는 사람에게 자주 사용하는 무기가 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임에 비해 불교는 사망의 종교요 허무의 종교라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으나 석가는 부처가 됐다지만 결국은
인터넷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상물들이 존재한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굳이 강의실이나 법회에 가지 않아도 각양각색의 불교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최근 한 인문학자의 불교 강의를 듣게 됐다. 주제는 무명홀기설(無明忽起說)이었다. 무명홀기설이란 진여의 부처 마음자리에서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홀연히 무명이 일어나 중생이 되었다는 이론이다. 그는 이 이론에 대해 마치 고요한 바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파도가 일어나 어지럽게 된 것처럼 중생의 마음도 그와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무명이 일어나
서울 인사동에는 행인들에게 가훈이 될 만한 글을 붓으로 써 무료로 나눠주는 분이 있다. 글 내용도 다양해서 성인이나 철인들의 말씀, 고사성어, 그밖에 삶의 귀감이 될 만한 내용들을 골라서 써준다. 그중에는 부처님 말씀도 포함되어 있다.어느 날에도 나는 그분이 글을 쓰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육십쯤 되어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그분에게 다가가 부처님 말씀 가운데에 좋아하시는 글이 있으면 한 장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분은 흔쾌히 아주머니의 부탁을 승낙하고 숙달된 솜씨로 불경 한 구절을 한자로 써내려갔다. 가만히 보니
불교 공부를 하는 도반들과 함께 전라도의 유명 산사를 찾았다. 워낙 이름난 절이다보니 일반 관광객뿐 아니라 많은 불자들로 북적였다. 순례를 목적으로 관광버스를 전세 내서 방문한 단체들도 많았다. 나는 일행과 함께 부처님이 모셔진 대웅전을 들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우리 옆을 지나가는 불자들 속에서 이런 말이 들렸다.“신도님들, 산신각에 들러 참배하세요. 절에 오면 꼭 산신님을 찾아야 합니다.”돌아보니 스님은 아니고 법복을 입은 여성불자였다. 아마도 그 절의 소임을 맡아 봉사하는 불자 같았다.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다가가 “
모선원 설립자 스님이 출가하기 전 약 4년 동안을 직접 시봉한 일이 있다.(그 후로도 6년간 모시면서 가르침을 받았고 상임법사로 재직했다) 당시 스님의 직함은 대한불교회관 원장이었고, 내 역할 중의 하나는 원장님을 친견하겠다고 찾아온 분들을 안내하는 일이었다.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겨울날 사무처에서 연락이 왔다. 스님들이 찾아오셨으니 원장님께 모시고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사무처로 내려가 보니 체구가 건장한 네 명의 스님들이 절 마당에 눈을 맞으면서 서성이고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그 스님들의 형색이었다. 보통 스님들과
서울 조계사 주변의 불교용품점에 들렀다. 오래전 출판된 불서 한권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용품점 안에는 한 여성불자와 비구니스님이 있었다. 두 사람이 용품점에 함께 온 일행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후 그 불자가 “집안에 우환을 없애려면 무슨 경전을 읽어야 좋을까요?”하고 주인에게 물었다. 그는 “나보다는 스님께 직접 여쭤보는 게 좋겠네요”하면서 스님을 바라봤다.스님은 그 불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안에 우환이 많고 평온하지 못하면 ‘조왕경’을 읽으세요. 조왕님을 모시지 않아 그럴 수 있습니다. 조왕님을 정성껏 위하면 재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