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는 불교교리에서 핵심 개념가운데 하나다. 그래서인가 대다수의 불자들에게 12연기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아주 심오한 가르침이라는 선입견을 안겨준다. 하긴 부처님께서 6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으신 연기법을 6단계, 8단계, 9단계, 10단계로 분류해서 설명을 시도하다가 최종적으로 12단계로 마무리 해 놓은 것이 12연기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들 수준에서 하루아침에 12연기를 이해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겠다. 솔직히 12연기는 왠지 모르게 선뜻 다가가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설명하려니 부담스럽다. 개인적 무지겠지만 무명에서 출발해서 생사로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가 명료하고 자연스럽게 이해되지 않고, 중요하다고 하니까 뭔가 인위적으로 억지로 끼워 맞추어서 이해되어지는 느낌을 지
올 가을, 운문사의 단풍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수목원 감들이 익어갈 무렵 한 도반이 방문했다. 그 친구는 자주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불보살의 화신에 대한 의미를 상기시키는 영혼이 아름다운 친구다. 우리는 학인스님들의 풍요롭고 여유로운 정신세계를 돕고자 수목원을 만드신 명성 스님의 자상함과 안목에 감탄하고 또 그 속에 담겨있는 수많은 졸업생, 운문사 대중 스님들의 노고에 감사하면서 맑고 투명하게 흐르는 도랑과 흰구름, 바람, 온갖 생명들의 지저귐과 더불어 감을 따먹으면서 잠시 세상을 잊었다. 친구는 떠나고 가을도 막바지에 다다른 어느 날 오후, 혼자 수목원을 산책하던 중에 참으로 아름다운 감나무 가지에 나의 시선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잎들 속에서 친구와 보냈던 느낌과 기억을 보았다. 나는 그 가지를 꺾
우리는 지난 호에서 연기를 깨닫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과 세상만물을 통해 무아(無我)와 무상을 보아야만 한다고 했다. 그런데 무아를 보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다시 말해 무아를 통해 연기를 보는 일이 현실적으로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는 의미다. 사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고 육신이 있다는 느낌과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설사 때가 되면 사라지고 없어진다고 해도 현재 살아있는 이 순간만큼은 육신과 마음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끊임없이 체험하고 확인하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는 업식(業識) 또한 지울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무아를 사유하는 일은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마음과 육신을 부정하고 현실의 삶과 존재를 부정하는 끊임없는 피드백을 알게 모르게 우리 스스로에게 심어주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을 우리도 똑같이 깨달아서 삶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열망은 모든 불자들의 로망이다. 다만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지, 얼마나 효과적이고 실용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다.불교의 모든 가르침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도 부처님처럼 깨달을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개인의 수준과 조건에 맞추어 팔만사천가지(셀수 없이 많다는 의미로)로 설명하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천백억화신불, 온 우주에 가득한 불보살님들이 다양한 인연으로 우리들의 근기에 맞추어 깨달음을 돕는다고 한다. 또 평생을 공부해도 다 공부하지 못할 정도로 무수히 많은 경전들과 논서들이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다양한 방편들이 애초에는 우리들의 수준에 맞추어 깨달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고자 시작된 친절함이고 연민이었을
우리는 지금껏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론(교학)과 실천(수행)의 두 측면에서 대충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해를 위해 다소 색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보고자 한다. 물론 앞으로 소개될 가르침들은 이미 앞에서 다루었던 내용들도 있을 것이고, 또 전혀 다루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들도 있을 것이다. 흔히 팔만사천 법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마음 심(心)자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들어왔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는 마음 심(心)자에 못지않게 중요한 핵심단어가 있으니 그게 연기(緣起)다. 마음이 내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라면 연기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느낌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부처님께서는 고타마 시타르타 태자로 계시던 어느 날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는 앞에서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근본 바탕이 되는 37가지 실천수행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서 대략적이라는 말은 37조도법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수행 항목이기 때문에 말로서 장황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37 조도법은 초기불교 수행법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다소 생소하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수행법이 행해졌던 시기만으로 초기불교, 대승불교, 또는 여타의 불교전통을 구분짓는 것이 마음을 닦고 깨달음을 얻는 일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각각의 수행법을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목적과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점이다. 깨달음을 돕는 37조도법을 수행할 때, 이들 수행법들을 개인
칠각지(七覺支)는 삼십칠 조도법 가운데 여섯 번째 실천수행법이다. 앞에서 네 번째와 다섯 번째에서 닦은 오근과 오력을 통해 수행의 뿌리와 그 뿌리의 힘이 커지면서 무엇이 깨달음에 유익하고 유익하지 않는지를 살펴 옳은 것을 선택함으로서 지혜가 더욱 더 자라나는 7가지 수행법이다. 첫째는 택법각지(擇法覺支)다. 이는 수행함에 있어 건강한 심리상태와 불건강한 심리상태를 유발하는 경우를 잘 알아차리고, 올바른 것을 선택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비단 수행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일상에서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선택에 부딪치게 된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들은 우리의 정신건강과 현실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수행에 있어서는 영적성장을 돕고 지혜를 증장시키기도 하고 반대로 퇴보시키기도 한다. 둘째는 정진각지(精進覺支)
37조도품(三十七助道法)은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선한 심리상태를 일으키는 37가지 실천행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내면에 탐욕, 화, 어리석음, 분별심, 자아에 대한 집착의 5가지 기본적인 불건강한 심리상태가 지나치게 많아 37가지 건강한 심리상태를 일으키고 유지하기가 힘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경우에는 37조도품을 닦기에 앞서 오정심관의 실천수행을 통해 먼저 그러한 마음의 독성들을 어느 정도 해독하고 정화해야 한다. 우리는 앞서 이미 37조도법의 첫 번째 실천수행법인 사념처와 두 번째 실천수행법인 사정근에 대해 공부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을 살리고 서로 연결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 간단하게 언급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깨달음을 얻는 길을 출발하는 우리들은 4가지 알아차림(사념처)의 방법을 통
지난 호에서 다루었던 오정심관(五停心觀)이 불건강한 심리상태를 치유하고 멈추게 하는 다섯 가지 수행법이라면 사념처관은 건강한 심리상태를 유발하는 네 가지 수행법이다.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출발점은 사념처관이다. 몸의 존재,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고(신념처관·身念處觀),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고(수·受), 변화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심·心), 현상의 공(空)함, 즉 모든 현상들이 상호의존적이고 조건에 의해 발생하고 사라진다는 사실(법·法)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신념처관을 할 때는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는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즉 우리 몸이 행동할 때는 행동하는 줄을 알아차리고, 머물러 있을 때는 머물러 있는 줄을 알아차리고, 누워있을 때는 누
오정심관은 불건강한 심리상태를 제거하는 5가지 수행법이다. 오정심관에서 관(觀)은 지관(止觀)의 지혜를 의미하는 관(觀,vipaśyanā)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고, 어지럽고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멈추게 한다는 기능적 의미에서 사마타(sāmatha, 止) 명상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우리들의 내적인 마음의 평화와 원만한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불건강한 심리상태는 탐욕, 화, 어리석음의 3가지 독성과 자아에 대한 집착(我執), 그리고 분별하는 산란한 마음이다. 이들 5가지 불건강한 마음을 정화하고 해독하는 방법이 오정심관이다. 탐욕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부정관(不淨觀·몸의 더러움을 떠올림)을 하고, 분노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자비관(慈悲觀·모든 생명들의 행복을 염원
사정근(四正勤)은 깨달음을 돕는 37가지 수행 가운데 선(善)한 마음은 더욱 자라게 하고 악(惡)한 마음은 없애려고 애쓰는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이다. 첫째는 이미 생긴 악은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둘째, 아직 생기지 않은 잠재적인 악은 미리 방지하려고 노력한다. 셋째,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자라나게 하고 넷째, 아직 잠재된 선은 생겨나도록 노력한다. 사정근은 고통의 근본원인을 멸하는 8가지 올바른 방법인 팔정도(八正道)나 악을 그치게 하고 선을 따르게 하는 수행의 도덕규범인 지계(持戒)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계율을 지키는 일이나 팔정도를 닦는 일과 마찬가지로 네 가지 올바른 노력에서도 우리가 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한
우리는 그동안 10회에 걸쳐서 십바라밀의 각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십바라밀의 핵심은 보시다. 보시는 물질, 깨달음, 그리고 편안한 마음을 서로 더불어 나누고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누구나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물질을 탐하고, 진리에 어둡고, 그래서 서로 갈등한다.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과 미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게 된다. 보시를 가장 온전하게, 즉 가장 합당한 것을 가장 합당한 시간, 합당한 대상에게 주기 위해서는 절도가 필요하다. 그것이 지계바라밀이다. 팔정도수행은 대표적인 지계바라밀의 하나다. 주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주거나 필요이상으로 주게 되면 상대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장을
십바라밀의 마지막 단계는 지(智)바라밀이다. 그런데 육바라밀의 여섯 번째도 지혜바라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섯 번째 바라밀의 지혜와 열 번째 바라밀의 지혜가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섯 번째 바라밀의 지혜는 주객의 이원성이 통합되고 초월된 최초의 깨달음이다. 반면에 열 번째 바라밀의 지혜는 그렇게 깨달아진 지혜가 방편, 원, 역 바라밀의 과정을 거치면서 주객의 이원성이 실제 삶속에서 실현되고 통합되어서 감각, 느낌, 정서, 인지, 기억 등 마음의 전 영역을 통해서 내재화된 지혜다. 그러므로 유식5위 수행에서 본다면 전자는 3번째 단계인 견도(見道) 수준이고 후자는 마지막 단계인 궁극적 경지, 법신불의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또 여섯 번째 지혜는 무분별의 지혜에 해당하고 열 번째
십바라밀에서 여섯 번째 바라밀수행까지는 비록 보살이 타자를 향해 이타심을 배양하고는 있으나 그 행위의 중심축은 어디까지나 자아에게 있다. 왜냐하면 그 수행의 근본 동기나 과정, 목적은 보살이 자신의 신구의 삼업을 닦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곱 번째인 방편바라밀과 여덟 번째인 원바라밀에 이르면 보살수행의 중심축이 자아에게서 타자에게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하여 보살의 일체 행위, 신구의 삼업은 그야말로 타자를 위한, 타자에 의한, 타자중심의 바라밀행이 이루어진다. 처음 여섯 번째 바라밀행을 통해 보살은 자아와 타자, 사회, 환경, 자연, 우주와 더불어 연기적이고 유기적 관계, 머무름을 실천하는데 장애가 되는 자신의 숙업을 정화시킨다. 그런 다음 7·8바라밀에서 타자와 보다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관계를 맺
육바라밀 수행을 통해서 보살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연기적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깨달음은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너’를 위하는 것이 또한 ‘나’를 위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인식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곧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타자중심적 사고로 이동하게 만들고, 보살은 다양한 방편으로 보시바라밀을 행하게 된다. 일곱 번째 방편 바라밀을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서, 개인의 조건과 상황에 맞는 보시를 하려는 보살의 노력이 깊어지면서 아울러 개개인에 대한 이해와 연민심도 커져간다. 그리하여 보살은 자신과 인연한 중생들도 하루속히 부처님의 법을 깨닫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발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방편 바라밀을 수행하는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바라밀은 육바라밀수행에서 얻은 지혜, 즉 너와 내가 독립적이고 절대적으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연기적으로 존재하며 상호의존적이고 차별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수단·방법을 터득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수단·방법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위로하고 돕는 행위를 통해 몸으로 체득해 가는 과정이지 머리나 이론, 관념으로 알아가는 것이 아님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유식적 관점에서 보면 방편바라밀을 행하는 자들은 일단 진리를 보는(유식5위의 세 번째 단계인 견도) 단계에 도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대승보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들은 자아를 타자와 차별화하면서 타자보다 잘나고 싶고, 튀고 싶어서 애쓰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해 사실은 자아와
우리는 앞에서 육바라밀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물론 차례대로라고는 했지만 각각의 바라밀을 실제로 실천하는 상황에서 순서가 있다기보다는 서로 연기적이고 역동적 관계로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제 십바라밀을 살펴보기로 하자. 십바라밀은 육바라밀에 더해서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의 네 가지 바라밀이 더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들 각각에 대해 언급하기 전 십바라밀의 필요성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왜 육바라밀로 충분치 않고, 이들 4바라밀이 더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우리가 부처님의 궁극적 가르침을 깨달아 가는데 육바라밀 수행에 더해 4바라밀이 더 필요한 이유를 찾기 위해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떤 한 수행자가 진지하게 깨달음을 열망
육바라밀의 마지막 여섯 번째는 지혜바라밀이다. 지혜는 연기, 즉 무아, 무상에 대한 자각,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들에 대한 자각과 깨달음의 기능은 우리들이 하는 일상의 삶과 인간관계속에서 집착하지 않는 구체적 행위로 드러난다. 적어도 한번쯤 마음공부를 치열하게 해 본 사람이라면, 인간의 마음작용 가운데 최대의 특징이 “자아”를 창조하는 기능이라는 사실을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온갖 사람들, 갖가지 외부적 원인과 사건들에 부딪쳐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하지만 결국 마음의 마지막 지점에서 만나지는 것은 우리 자신, 바로 ‘자아’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타인이나 사건,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창조한 ‘자아’를 통해서 그들을 판단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육바라밀의 다섯 번째는 선정바라밀이다. 선정(禪定)은 잡념이 제거되어 산란한 마음이 사라지고 한곳에 집중되어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다. 선정바라밀은 앞의 세 바라밀, 즉 지계, 인욕, 정진바라밀을 거치고 이들을 밑바탕으로 얻어질 수 있는 마음의 상태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 사이에 순서가 있기보다는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선정바라밀 수행은 단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분별망상을 멈추어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앞에서 이미 밝힌바 있지만 육바라밀에서 핵심은 보시바라밀이다. 완전한 보시바라밀의 실천, 삼륜청정의 보시행에 다섯 바라밀,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다시 말해서
육바라밀의 네 번째는 정진바라밀이다. 정진(精進)은 게으르지 않게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이미 생겨난 불건강한 행위는 재발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노력하고,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잠재된 불건강한 행위는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고, 이미 생겨난 올바르고 건강한 행위는 더욱 발전시키고, 잠재된 건강한 행위는 잘 자라도록 부지런히 힘쓰는 네 종류의 올바른 노력(四正勤)이 대표적인 정진의 예가 될 수 있다. 정진바라밀도 지계나 인욕바라밀과 마찬가지로 삼륜청정의 보시바라밀을 완성하는데 필수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다. 왜냐하면 보시바라밀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서 타자를 향한 관심과 관계 형성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보시바라밀은 기대나 계산이 들어가지 않는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