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귀의 심리적 특징은 허기다. 지칠 줄 모르는 갈망과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이다. 그 원인을 심리학적 이론에서 찾아본다면 어린시기에 정상적이고 건강한 성장과 발달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사랑과 돌봄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것을 갈망하는 마음의 상태가 습관적인 에너지, 패턴으로 굳어져버린 것이다. 지구상에서 인간만큼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데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생존을 위해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서 돌봄과 사랑을 받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삶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른 생명체들에 비해 살아남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더 긴 시간을 더 많이, 그리고 더 필사적으로 요구하고 갈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인지도 모른다.
육도 가운데 아마 가장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아귀도일 것이다. 바짝 마른 사지와 잔뜩 부풀어 오른 배에 비해 가느다란 목구멍을 가진 유령 같은 형상을 한 아귀들은 자신들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다. 바늘구멍같이 가늘고 좁다란 목구멍으로 과거생생 누적된 태산 같은 욕망의 배를 채운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육도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한 마크 엡스타인은 아귀들의 모습을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비유했다. 한편 쵸감 트룽파 린포체는 아귀도의 특징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부자를 원하고, 소비에 몰두하면서도 계속적으로 궁핍함을 느끼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즉 어린 시절에 결핍되고 좌절되었던 욕구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성인이 되서도 과거의 불만족을 충족시키고자 집착하는 인간의
지난 호에서 자비심을 배양하기 위해서 자비의 감정을 가장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족, 사랑하는 사람을 제일먼저 떠올리고 그들의 행복과 평화, 안전, 건강 등을 기원하는 방법을 소개했다. 그런 다음에 점차로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느낌의 대상들을 향한 기도로 이동한다. 이때 사람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과 무생물, 자연과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그들의 안전과 평화, 웰빙을 기원하는 기도를 보낸다. 마지막에는 자비심을 베풀기에 가장 어려운 상대들, 싫어하고 혐오하는 대상을 향해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훈련한다. 그런데 실제로 자비명상 수행 프로그램에서 보면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자비심을 일으키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특
지난 호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화는 상대를 공격하면 할수록 더 큰 저항과 공격에 직면하게 되는 심리상태다. 이는 화가 화를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상태이기 때문에 화가 나는 상대를 향해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으로는 자신의 고통을 제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때의 화는 자신의 내면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공격한다고 해서 화의 감정이 근본적으로 제거되지 않기 때문이다. 화가 많은 사람들은 화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화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정말로 화를 내고 싶지 않지만 시시때때로 치밀어 올라오는 화를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분노의 감정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기는 화를 내고 싶지
지옥은 흔히 불 속이나 끓는 기름 속에서 고통을 받거나 굶주린 동물에 의해 사지가 뜯기는 고통과 같은 이미지로 그려진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공격성과 불안, 공포에 의한 고통이 지옥에 해당된다. 그 가운데서도 성난 불길처럼 화(anger)로 가득 차서 이글거리고 활활 타오르는 공격성의 심리상태다. 공격성의 대상은 타자나 자기 자신을 향한 멈추지 않는 분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에 대해 쵸감 트룽빠 린포체는 “공격성에는 끝이 없는 혼란과 불확실성이 함께 있는데, 왜냐하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전체를 공격성으로 물들이고, 마침내 그 환경이 다시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치 뜨거운 한 여름에 아스팔트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아서 땀이 공기에 식혀지면서 잠시 잠깐 괜찮은 듯하다가도 계속적
불교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생사해탈, 즉 삶과 죽음의 순환고리로 부터의 해방이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의 세계를 돌게 되어 있는데 그 세계를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아수라, 천상의 6곳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육도윤회라고 부른다. 육도윤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고통이다. 그래서 불교의 일차적 목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윤회의 근본 원인이 우리가 탐진치 삼독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삼독을 해독하는 방식으로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등 다양한 방법을 가르쳐 준다.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삼독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알지 못하기도 하고
지난 호에서는 명색의 단계에서 사심사관(四尋伺觀) 훈련, 즉 감각과 인식대상이 가지고 있는 이름(名), 그 이름과 연합된 의미(義), 본질(自性), 그리고 현상적 차이(差別)를 분석하고 자각하는 작업을 알아봤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집착하는 정신적 물질적 대상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다. 사심사관 수행은 유식 5위 수행에서 두 번째 단계로 첫 번째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6바라밀과 37조도법, 그리고 사섭법과 사무량심 훈련을 바탕으로 깨달음을 향해 본격적으로 노력하는 단계다. 이를테면 사심사관 훈련은 말이나 행동으로는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무의식 수준에서는 마음이 계속해 대상에 메이고 집착하는 경우나, 아니면 말로만 부질없다고 하면서 행동과 생각으로는 대상을 쫓고 있기 때문에 내면
지난 호에서는 12연기의 열두 고리 (①무명-②행-③식-④명색-⑤육입-⑥촉-⑦수-⑧애-⑨취-⑩유-⑪생-⑫노사) 가운데 번뇌가 극심한 ⑧갈애를 기준점으로 삼고 고통이 발생하고 순환하는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았다. 이번에는 망상이 극심한 ⑤육입을 중심으로 탐색해보고자 한다. 육입은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마음을 의미한다. 이들이 각각 감각/인식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을 만나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느낌이 발생한다. 그런데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마음이 각각의 대상과 부딪치는 과정이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대상에 부여된 의미, 가치 또한 실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안이비설신의가 앞의 단계인 ④명색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의미다. 그 결과 다섯
12연기는 불교교리에서 핵심 개념가운데 하나다. 그래서인가 대다수의 불자들에게 12연기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아주 심오한 가르침이라는 선입견을 안겨준다. 하긴 부처님께서 6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으신 연기법을 6단계, 8단계, 9단계, 10단계로 분류해서 설명을 시도하다가 최종적으로 12단계로 마무리 해 놓은 것이 12연기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들 수준에서 하루아침에 12연기를 이해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겠다. 솔직히 12연기는 왠지 모르게 선뜻 다가가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설명하려니 부담스럽다. 개인적 무지겠지만 무명에서 출발해서 생사로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가 명료하고 자연스럽게 이해되지 않고, 중요하다고 하니까 뭔가 인위적으로 억지로 끼워 맞추어서 이해되어지는 느낌을 지
올 가을, 운문사의 단풍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수목원 감들이 익어갈 무렵 한 도반이 방문했다. 그 친구는 자주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불보살의 화신에 대한 의미를 상기시키는 영혼이 아름다운 친구다. 우리는 학인스님들의 풍요롭고 여유로운 정신세계를 돕고자 수목원을 만드신 명성 스님의 자상함과 안목에 감탄하고 또 그 속에 담겨있는 수많은 졸업생, 운문사 대중 스님들의 노고에 감사하면서 맑고 투명하게 흐르는 도랑과 흰구름, 바람, 온갖 생명들의 지저귐과 더불어 감을 따먹으면서 잠시 세상을 잊었다. 친구는 떠나고 가을도 막바지에 다다른 어느 날 오후, 혼자 수목원을 산책하던 중에 참으로 아름다운 감나무 가지에 나의 시선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잎들 속에서 친구와 보냈던 느낌과 기억을 보았다. 나는 그 가지를 꺾
우리는 지난 호에서 연기를 깨닫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과 세상만물을 통해 무아(無我)와 무상을 보아야만 한다고 했다. 그런데 무아를 보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다시 말해 무아를 통해 연기를 보는 일이 현실적으로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는 의미다. 사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고 육신이 있다는 느낌과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설사 때가 되면 사라지고 없어진다고 해도 현재 살아있는 이 순간만큼은 육신과 마음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끊임없이 체험하고 확인하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는 업식(業識) 또한 지울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무아를 사유하는 일은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마음과 육신을 부정하고 현실의 삶과 존재를 부정하는 끊임없는 피드백을 알게 모르게 우리 스스로에게 심어주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을 우리도 똑같이 깨달아서 삶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열망은 모든 불자들의 로망이다. 다만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지, 얼마나 효과적이고 실용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다.불교의 모든 가르침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도 부처님처럼 깨달을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개인의 수준과 조건에 맞추어 팔만사천가지(셀수 없이 많다는 의미로)로 설명하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천백억화신불, 온 우주에 가득한 불보살님들이 다양한 인연으로 우리들의 근기에 맞추어 깨달음을 돕는다고 한다. 또 평생을 공부해도 다 공부하지 못할 정도로 무수히 많은 경전들과 논서들이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다양한 방편들이 애초에는 우리들의 수준에 맞추어 깨달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고자 시작된 친절함이고 연민이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