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법제일로 불리기도 했던 동산 스님은 ‘화엄경’, ‘원각경’ 등 경전 말씀을 자주 인용했다. 철저한 계행에 바탕을 둔 수행인으로 성철, 광덕, 지유, 능가, 정관, 무진장 등 걸출한 제자를 길러냈던 동산 스님은 평소 보살계 법문을 할 때면 “사람마다 천진 그대로요 조금도 건드릴 것이 없으며 뚜렷하고 깨끗한 그것을 이름하여 계(戒)라 한다”며 계를 잘 지킬 것을 강조했다. 출가자는 물론 재가불자들에게도 계를 잘 지키라고 누누이 당부했던 스님은 1941년 선학원에서 개최한 유교법회에서도 다시한번 지계(持戒)를 강조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잘못된 불교를 바로잡아 조사의 종풍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을 역설한 스님은 이때 ‘범망경’을 강설해 취처승들이 왜
▲스님의 좌탈입망 모습. 한암 스님은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 7인의 교정으로 추대된 이후 조계종 창종 때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는 등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종정을 역임하면서 근대 한국불교를 이끌었다. 오늘날 조계종이 선종을 표방하며 선 제일주의에 빠져 있으나, 조계종 탄생에 크게 기여하며 종정까지 역임했던 한암은 결코 선에만 머물지 않았다. 한암은 이른바 승가오칙이라 하여 “참선, 간경, 염불, 봉사, 포교 등 다섯 가지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선중방함록 서’에서 염불과 참선이 둘이 아님을 명쾌하게 적시하고, 선문납자로 하여금 선의 본지를 깨달아 선원을 개창한 의의를 저버리지 않도록 간절한
▲한암 스님 보조국사 ‘수심결’ 내용 중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자성 밖에 법이 있다는 생각을 굳게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소신연비의 고행을 하고 모든 경전을 독송하더라도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아 오히려 수고로움을 더할 뿐이다”라는 대목에서 지견을 얻었던 한암 스님은 이후 수행과 후학양성 과정에서 보조 스님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이후 1903년 해인사에서 ‘전등록’을 읽다가 “한 물건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구절에 이르러 의단이 끊어지는 경지를 만나 확철대오한 한암은 금강산 장안사 지장암에서 수행하던 중 1921년 건봉사 주지 이대련 등의 청을 받아들여 건봉사 조실로 주석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
▲ 한암 스님은 제자들에게 ‘금강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25년 왜색 승려들이 설치는 꼴을 보다 못해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으로 들어가 27년간 동구불출하며 ‘오대산 학’으로 불린 한암 스님은 1876년 3월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속성이 방 씨였던 스님은 9세에 처음 서당을 다니며 ‘사략(史略)’을 배우던 중 ‘태고에 천황씨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반고씨가 있었다면,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는가’를 선생에게 물을 정도로 유년시절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이때부터 세상과 인간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 스님은 이후로도 10여년 동안 그 근원적 의문을 풀지 못한
▲용성 스님 유훈 실현 중심도량 장수 죽림정사. 역경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용성 스님은 당대 뛰어난 선승이기도 했다. 열아홉에 첫 번째 깨달음을 경험하고 1884년 21세에 금강산에서 무(無)자 화두를 통해 2차 깨달음을 얻었다. 이어 각처에서 수행하며 ‘육조단경’ 등 경전을 보며 수행을 점검한 후 순천 송광사 삼일암에서 ‘전등록’을 열람하던 중 ‘달은 굽은 활과 같고 비는 적은데 바람만 많구나’라는 대목에서 홀연 세 번째 깨달음을 겪었다. 그리고 제방선원에서 참선하는 한편으로 ‘기신론’, ‘법화경’, ‘선요’, ‘서장’, ‘화엄경’, ‘선문염송’ 등을 배우고 선사들의 어록을 살펴본 스님은 마침내 1886년 23세에 확철대오의
▲용성 스님 진영. 서대문 형무소 수감 중 역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출소 후 부처님 부촉이라 여기며 역경 작업에 나선 용성 스님에겐 크나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교계 기득권 세력의 터부와 질시였다. ‘법당에 웬 풍금소리냐’며 찬불가를 반대했던 것처럼, 당시 교계에선 ‘그동안 써온 한문을 두고 왜 천한(?) 언문을 쓰느냐’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때문에 애써 외면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스님의 뜻에 동조하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스님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지금 인류는 서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고 세상은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누가 어려운 한문에 매달려 골치를 썩이며 세월을 바치려 할 것인가. 지금은 철학이나 과학으로부터 시작해 천문학, 정치
▲용성 스님은 부처님 부촉이 역경이라고 확신했다. 불교 개혁과 혁신을 실천했던 용성 스님은 1864년 5월8일(음력) 전북 장수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이 상규인 스님은 어려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 때문인지 여섯 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냇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잡힌 고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모두 살려주는가 하면, 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아버지와 재혼한 어머니에게 고사리가 아프니 그만하자고 호소하는 등 남다른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일곱 살 무렵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해 문학적 재능까지 갖추는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중 열 네살 어느 밤 꿈에 부처님을 만나 정법 계승의 실천에 대한 계시를 받으면서 불교인연이
▲백양사 강사로 떠나는 운기 스님 편에 석전 스님이 만암 스님에게 보낸 서한(운기 스님이 석전 스님의 전강제자임을 밝힌 내용). 한국불교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학적 불교학을 추구한 학승 석전 스님은 평생에 걸쳐 동서양의 많은 글을 읽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석전의 독서와 글쓰기는 자신의 불교적 지성을 닦는 일이었다. 동시에 스님의 글쓰기는 불교적, 그리고 민족적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는데 역량을 쏟아 붓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 결과 석전 스님은 단행본 형식의 역서와 저술 9권을 비롯해 100여 편이 넘는 논설과 수필을 남겼다. 석전 스님은 학문은 물론 교와 선에 정통할 뿐만아니라 내·외전에 이르기까지 세
▲조계종 제24교구본사 선운사 소장 석전 스님 진영. 수많은 경전을 해석하고 글을 썼던 스님은 ‘불교유신과 서적간행’이라는 글에서 “불교계는 정리되지 않은 오래된 서적이 많으나 관심을 갖고 정리한 사람이 적으니, 같은 몸이지만 때가 낀 몸을 목욕을 하면 정신이 빛나듯 정리되지 않은 고문을 새롭게 정성들여 인쇄해 간편하게 장정하면 새로 나온 서적을 대한 듯 할 것”이라며 옛 문헌을 새롭게 번역하고 대중이 볼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스님은 그러면서도 “옛 것이 훌륭하고 뛰어나지만 지나치게 옛사람의 학문을 숭상하는 것은 오늘을 낮추는 실마리로 보고 오늘날 뛰어나고 생명을 이롭게 해주는 말과 글이 옛 사람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러서도 받아들이지
▲석전은 추사가 백파 스님에게 미리 지어주었던 이름이다. 불교계의 유신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외세에 대응한 ‘근대 선각승’으로 존경받는 석전 박한영 스님은 1870년 9월14일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읜 스님은 유년시절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음에도 타고난 총명함과 남다른 학문적 관심은 감출 수 없어, 서당을 가까이 하면서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홉 살 되던 해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한 스님은 ‘통사’와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열여섯에 서당에서 학인들을 교육시킬 정도로 학문적 성숙도가 깊었다. 1886년 17세에 출가해 승려로서 배워야 할 바를 익히기 시작한 스님은 1890년 장성 백양사 운문암 김환응 스님 문하에서, 그리고 1
▲스님은 ‘유마힐소설경강의’를 펴내기도 했다.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민족불교·대승불교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불교가 새롭게 나아갈 길을 제시한 만해 스님은 이후 불교개혁과 관련하여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팔만대장경을 요약 정리해 대중들이 쉽게 읽도록 한 ‘불교대전’ 발간을 비롯해 불교 대중화 및 혁신을 위한 단체 조선불교강구회, 조선불교회, 불교동맹회 등을 조직해서 이끌었고 대중들을 계몽하기 위한 잡지 ‘유심’을 발간하는 등 쉼 없이 자신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리고 시, 소설, 수필 등 문학작품을 통해 많은 대중을 지도하면서 민족의 심성을 울렸다. 만해의 그러한 열정과 정신은 바로 선(禪)에서 발현됐다. 이미 오세암에서 견처를 얻은 만해
▲만해 스님은 화술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달변가였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그날 금강산 표훈사에 있던 만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저녁 공양에 열중하는 스님들을 보면서 울분을 참지 못했고, 결국 발우를 내던지며 “이 산중 중놈들아, 나라를 빼앗겼는데 밥숟가락이 주둥이로 들어가느냐”고 일갈하고는 석왕사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한영을 만났다. 이후 박한영을 때론 도반처럼, 때론 스승처럼 여기며 많은 대화를 나눴고 훗날 그를 대상으로 10여 편의 시를 지을 만큼 남다른 관계를 유지했다. 금강산에서 백담사로 돌아온 만해는 불교개혁 이론의 완성이자 자신의 일생을 통해 지향했던 사상의 정수를 담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조선불교유신론’의 초고를 마무리 했다. 그
▲만해 스님은 18세에 서당 훈장을 하기도 했다. ‘혁명가와 선승과 시인의 일체화’로 평가되는 만해 스님. 조선왕조의 국운이 다한 1879년 태어난 스님은 어린 시절 충남 홍성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시작으로 ‘대학’, ‘통감’을 비롯해 동양의 고전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그리고 그때의 공부는 훗날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형성하는데 주춧돌이 되었다. 스님은 어린시절 기억력과 이해력이 서당 훈장까지도 놀랄 만큼 동년배들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어서 신동으로 불렸다. ‘대학’을 읽으면서 책 중간에 먹칠을 해 놓고는 연유를 묻는 훈장에게 “여기에 나오는 정자의 주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다”고 했을 정도다. 중국 유학 부흥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정자의 풀이가 마
▲스님은 마음 법문 중 금강경을 자주 인용했다. 서암 스님은 이미 생사의 기로에 서며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었고, 수행 끝에 도를 얻음으로써 수좌로서의 그 결기 또한 남달랐다. 그러나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종단 일에도 관여할 수밖에 없었고 종무원장, 총무원장, 종정의 자리에 앉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자리에나 조금의 집착도 없었고 항상 미련 없이 훌훌 털고 스스로 떠나갔다. 때론 억울한 말을 많이 들었음에도, 그런 말에 마음 쓰지 않고 닭 벼슬 내려놓는 마음으로 떠나갔다. 그리고 문중 간 다툼과 이해관계에 매몰된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종단마저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은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는 자유인이었고, 법을 찾는 곳이라면 누구라도 상
▲서암 스님 불법의 바다에 빠져 가르침을 마음껏 흡수한 서암 스님은 4년에 걸쳐 사미, 사집, 사교과 공부를 했다. 그리고 훗날 “가까이 있는 도반이나 스승 중에 사표가 될 만한 분이 있으면 그를 푯대 삼아 분발하고 정진하게 되는데 내게는 금오 스님이 그런 푯대였다”고 회상한 금오 스님을 이때 만났다. 또한 스님은 여기서 “우리 불교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일본 승려들이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기 싫으면, 옛날에 우리가 불교를 가르쳤던 저들에게 거꾸로 수그리는 수모를 면하려면 저들에게 우선 배워야 한다”는 금오 스님의 말에 유학을 결심, 종비유학생 신분으로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은 출판업이 세계적 수준이었고 각종 불서 간행이나 연구 업적이
▲스님은 출가를 하기 위해 절에서 3년간 머슴살이를 했다. 특별히 거창한 수식어가 필요 없이 말 그대로 ‘부처님 법대로’ 살다 간 서암(1914∼2003) 스님은 1914년 경북 풍기에서 부친 송동식, 모친 신동경의 5남 1녀 중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부친이 독립운동 혐의로 붙잡혔다가 안동경찰서 유치장을 부수고 탈옥하면서 유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 중 하나라도 공부를 시키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 충북 단양과 경북 예천 경계선인 소백산 중턱 올산 마을이란 곳에서 화전을 가꾸며 겨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음에도 스님을 산 아랫마을 서당에 보냈다. 또 대강면 소재지에 보통학교가 생기자 그 학교에
▲스님은 ‘신심명’을 강의하고 책으로 펴냈다. 청담 스님은 한국불교 정화에 나서면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포교’, ‘도제양성을 위한 교육’, ‘경전의 대중화를 위한 번역 불사’를 종단의 3대사업으로 정하고, 3대사업 성취를 위해 정진했다. 특히 스님은 “불경은 승려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차라리 더 많은 대중의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은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한글세대들이 계속 자라나고 있기 때문에 불경 번역은 한국불교의 가장 시급한 최대 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경전 대중화를 위한 번역 불사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역경과 포교를 통해서 불교의 대중화를 꾀해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 스님은 196
▲스님은 화엄경을 가장 깊이 연구해 해득했다. 불교정화의 주역으로 각인된 청담 스님은 정화승 이전에 수행승이었다. 개운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몇 년간 운수행각에도 견처를 얻지 못한 스님은 “내가 그토록 뼈에 사무친 각의 본처는 찾으면 찾을수록 아득하고 좇으면 좇을수록 어둡기만 하다. 조용한 암자에서 견성대오의 소식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겠다”는 원을 세우고 수행에 전념했다.그리고 마침내 만공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음에도 “아직 부족하다”며 가행정진 하던 중 “옛부터 모든 불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길가 고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라는 게송을 지어 견처
▲스님은 한국불교정화에 자신의 신념을 다 바쳤다. ‘성불을 한 생 미루더라도 한국불교 정화는 기필코 완수하겠다’는 신념으로 불교정화에 앞장섰던 청담 스님은 1902년 진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봉부차제라는 한문사숙에서 처음 글을 배운 후, 18세에 이르러 보통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숨겨진 재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3·1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질 때는 앞장을 서기도 했다. 그 때문에 경찰서에서 7일 동안 훈계를 받다 풀려났고, 이는 진주농업전문학교 불합격 이유가 됐다. 이때 스님은 낙방 이유가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교장을 찾아가 며칠간이나 부당함을 역설한 끝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이처럼
▲혜암 스님 출가 전 일본에서 수많은 동서양 철학서와 사상서를 탐독했던 혜암 스님은 ‘경전을 여의지 말고 외도의 서적은 마음에 두지 말라’며 수행자들의 경전 이외 서적 읽기를 경계했고, 스스로도 출가 후에는 경전과 선어록 이외의 서적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수많은 경전 중에서도 혜암 스님에게 있어서 특별한 경전이 ‘금강경’이다. 일본 교토에 머물고 있던 당시 그곳 임제종 계열의 절에서 유나 소임을 맡고 있던 서옹 스님을 만났을 때, 서옹 스님은 발심하고 출가를 결심한 혜암 스님에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니,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