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는 우리에게도 우주인이 탄생했다는 기쁨의 일환으로 우주의 왕복은 우리가 수 천년 전부터 앞서가 있었다는 억지스런 이야기를 해 보았다. 그 근거로 우리는 달을 따 보겠다는 의욕을 어려서부터 심고 자라 온 사실을 일례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삼았다. 이래놓고 돌이켜 보니 의식이란 마음의 작용인데, 마음이 무엇이냐 하고 되물어보니 손에 잡힐 듯한 명쾌한 대답을 못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몸가짐의 가르침을 주장하게 되면 마음을 잘 다스리라 함이 공통의 명제일 터인데, 이 다스림의 주체인 마음을 찾아 보려 하면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때 몸가짐의 대칭이 마음 찾기라면 마음이 몸과 상대적 지칭임이 분명하니 몸은 알거나 찾기가 눈 앞에서 분명히 들어나는데, 상대인 마음은 그 실
2008, 4, 8, 20, 16, 39의 숫자는 우리에게 황홀했던 순간으로 남을 숫자이다. 우리나라의 연약한 여인 한 분이 지금 우주의 공간에 안주하면서 미래 과학의 싹을 키우고 있는데, 위의 숫자는 그런 계기를 제공하던 순간의 시간이었다. 우리에게도 우주로 날아간 한 분이 있어 우리도 우주인을 탄생시킨다는 흥분에서 온 국민의 시선이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의 우주기지로 쏠려 있었다. 비록 남의 나라 우주 기지에서의 일이지만, 우리도 우주인을 갖는다는 자부심이 온 겨레의 가슴을 설레게 한 것이다. 수십 년 전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할 때도 우리의 일처럼 기뻐했던 일이 어제처럼 연상되면서 당시의 감회가 다시 떠오른다. 그 당시 나는 이런 말을 아이들에게 한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미국인이 달에 착
절제 미덕인 말줄임 뒤엎는 말풍년 세상 양설, 죄악으로 경계한 불교율법 새겨야 사람에게는 제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욕구가 있다. 이 욕구에는 신분의 높낮이나 알음알이의 많고 적음에 의한 차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보편적 욕구가 먹을거리와 이성의 사랑이겠지만, 말하고 들으려는 욕구도 이에 못지않게 갈망되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것도 사람의 생리 현상의 하나인 듯하다. 말하기가 있으면 듣기가 있어야 하니 듣기 또한 생리적 욕구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그런데 이 말하기의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여 사람살이에 갈등과 불화를 일으키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러기에 몸닦이의 가르침에는 말을 아끼라 하여 ‘입 조심하기를 물병처럼 하라’는 격언까지도 있다. 물병은 열려 있어도 좋고 나쁨의 시비를
대학 교육 표준 방향의 하나로 대학에서 법을 전공하여 사회기강을 바로 잡을 인재를 육성시키기 위한 이른바 ‘로스쿨’이라는 법률 전공 대학원을 둔다하여 시끄럽다. 여기에 불교 종립대학의 하나인 동국대학교가 선정되지 못하여 당해 대학의 구성원이나 출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교계에서까지 교육행정적 잘못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필자 역시 당해대학의 교직에서 퇴임을 한 사람이기에 그 이유에 대한 자성도 하면서 당국의 편파적 잣대에 의아와 격분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대체로 법이란 것이 무엇인가. 사회의 질서를 잡는 것이 아닌가. 사회란 너와 남의 집합체이니 법이란 나와 남의 관계를 정립하는 잣대이리라. 동양사회에서 유교이념으로 사회의 기강을 삼았던 과거에는 법이란 말보다는 예(禮)가 우선하였으니, 이것
세계화시대 다문화 융합 동력은 ‘상즉상입’여러 사상 인정해 공존함이 진정한 세계화 우리 역사에서 불교는 일찌감치 종교로 자리 잡아 개인이나 국가의 성장에 많은 공헌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피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유구한 세월동안 사람들의 몸 가짐에 길잡이 구실을 한 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역대 왕조에서도 조선 왕조 이전에는 불교가 국교와 같은 자리를 유지하여 개인이나 국가에 이바지 한 점이 적지 않다. 그러나 왕실에 대한 지나친 의존 속에서 경계의 시선도 항시 함께해 왔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불교문화의 극치를 이루었던 신라를 계승한 고려왕조가 그대로 불교를 사회적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기에 고려 초기 불교의 폐단은 적지 않은 듯하다. 태조가 임종을 앞둔 26년 4월에 미
百行의 근원을 효라 함은 만고의 진리효 배움 덕목삼는 사회는 기강 절로 서 현재의 우리들의 시간 생활은 두 갈래를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공통의 시간 단위인 양력과, 일상의 생활 풍습에 즐겨 쓰는 음력이다. 한 해의 첫날인 1월 1일을 지낸 지가 이미 달포가 되었는데도 설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한 정월 초하루가 있다. 사회적 공통의 삶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세계적 공통의 시간 계산을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지만, 전통적 풍습에 의한 생활 관습은 어쩔 수 없이 음력의 시간을 따라지는 것이 시간의 흐름을 이어가는 육체적 정서의 감각인 것 같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새해 첫날의 덕담도 지난 1월 1일에 듣는 것과‘정월 초하루인 설날에 듣는 것에 느낌이 다르니, 설날에 듣는 이 덕담에서 비
배움의 목적은 대학 아닌 삶의 방편 아는 것교육정책도 배우는 사람 입장서 기준 세워야 ‘사람’이란 말의 어원적 풀이가 무엇일까. ‘살다’의 명사형이 아닐까. 살아감의 일상적 일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이지, 일상의 일을 제쳐 놓고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의 태어남으로 인하여 나의 삶이 형성되는 것이요, 이 나의 삶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의 조직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가장 가까이의 가족 구조부터가 나의 존재로 인하여 서로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지, 어떤 조직을 전제해 놓고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인간질서의 기본이 되는 윤리 자체가 살아감의 일상적 순서이지, 삶을 제쳐 놓고 고상한 이론의 도입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살이의 삶이 되어진 그대로의 자연이지 인위적 꾸밈으로부
거창한 설계보다 현재 충실이 값진 삶 땔감 나르고 물 긷는 일상이 선의 실천 지난번에는 1년이라는 시간의 경계에 무슨 구분이 있겠느냐는 회의를 펴 본 적이 있지만, 어찌되었든 새해라는 시간 단위가 지나고 보면, 지난 한 해의 되돌아봄이나 돌아온 한 해에 대한 새로운 마음가짐을 설계해 보는 것이 사람살이의 일상일 듯싶다. 그럴 경우 대개 지난 해에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반성과 그에 대한 재설계를 시도하는 것이 대부분이 아닐까. 지난해의 같은 시간에도 크든 작든 어떤 계획을 세워 추진하려 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일에 대한 되살핌이 있어, 새 해의 새 설계로 잡았었음이 분명하지만 이루어진 결과는 또 그 전 해의 섣달그믐에 결산 된 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그렇지만 새해라는 큰 시간 단
본분대로 사는 게 순리이자 곧 행복지도자는 우열보다 평상심 갖추어야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쌀쌀하기보다는 추워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인공으로 만든 호수가 있다. 말이 호수이지 큰 연못이라 할 정도이다. 우리나라의 땅덩이가 워낙 좁으니까 이런 정도를 두고 호수라 하지, 넓은 땅덩이라면 대굴 안의 연못에 지날 것도 없으리라. 어찌되었든 이러한 물이 있어 양회가루를 비벼다가 부어 놓은 도시 속에 갇혀 사는 처지로는 시원한 숨을 들이마시고 내어뱉기에 안성맞춤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와 같이 게으른 사람에게도 이러한 주변이 있기에 아침저녁으로 한가히 거닐어서 모자라는 운동량을 보충하게 되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꽃이 피어 있어 눈길을 즐겁게 하더니, 이
남쪽 원력-북쪽 응원 하나 된 통일의 상징불국토 통일이어 국토 통일도 멀지 않은 듯 우리 민족의 역사는 동아시아 대륙의 끝자락에 있어, 마치 누군가에 의하여 쫓겨 오다 멈춰 선 것 같은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광대한 대륙을 등에 지고 있고, 광활한 대양을 가슴으로 품었으니, 풍수적 해석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배산림수(背山臨水)의 명당이다. 이런 명당이기에 동아시아의 역사적 기록에는 항시 아름다운 나라, 해 돋는 나라, 예의 바른 나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외민족의 침략으로 굴욕적인 수치를 겪은 것이 병자호란만한 것이 없다. 우리에게는 수치스런 결과인 전란이지만, 청나라의 오랑캐 민족에게는 승리의 쾌거인 것이다. 청나라에서 이러한 승리를 계기로 하여, 이즘에 우리의 풍속을 그들의 관습
연꽃 속에 열매 품는 동물적 포태잎까지 갖춘 연실 삼세 공존 보여줘 동물은 포태로 다음 세대를 이어가고, 식물은 열매로 다음 세대를 이어간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꽃을 피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되도록이면 식물의 첨단에 매달려 화려하게 드러내야 한다. 반면 동물의 포태는 암수의 수정체를 되도록이면 깊이 숨겨 은밀하게 성장시킨다. 이것은 수시로 움직여야 하는 동물적 특성에서 일정 기간을 안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일 것이고, 식물적 특성의 고정적 부동은 되도록 햇볕의 수용에 용이한 첨단에 씨앗을 간직함일 것이다. 식물의 꽃이 다음 세대의 이어감을 위한 열매 맺음이 목적이기에 꽃과 열매가 동시에 형성되어 꽃잎이 지면 열매만이 남아 자라다가 일정한 시한이 되면 독립된 존재로 지상으로 되돌아온다. 거의 대부분의
항시 나를 돌아보는 삶이 거짓 면하는 길명예에 집착말고 직분에 맞게 살아가야 모든 만물의 존재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이름이 있다. 그러기에 자연은 이름 없는 물건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어떤 실상의 모습이 있다면 이름은 따라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다시 뒤집으면 이름은 실상이 있고나서 그 실상을 지칭하기 위하여 빌려온 것이 된다. 요즘 ‘가짜’라는 말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데, 이 가(假)라는 말이 바로 빌려왔다는 뜻이다. 빌려온 것은 내 것이 아니니 바로 거짓이 된다. 그러나 이름이 없고서는 실체를 드러내어 알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니, 이 이름과 실상의 사이를 참과 거짓이라는 상관적 관계로만 바라보고 모든 것을 빌려온 가짜로 볼 수만도 없다. 이러한 이름과 실상의 관계를 사회적 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