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도 38호선의 신설과 확장으로 두 번 연속 피해를 입은 사찰이 있다. 삼척 안정사다. 30년 전 국도 38호선 신설로 사찰토지를 수용당한 안정사는 1986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그런데 이내 시련이 또 다시 닥쳐왔다. 2007년 원주지방국토관리청이 국도 38호선 4차선 확장공사를 추진하면서 사찰 경내지를 편입시켰고, 이로 인해 경내지 1만4392㎡(4300여평)를 강제 수용 당했다. 놀라운 건 도로확장공사에 따라 만들어지는 부체도로가 대웅전 앞 경내지를 관통한다는 점이다. 가람이 분해되는 상황이니 원래의 사찰 기능은 상실된다고
지난 10월16일자(1507호) ‘백만원력 결집, 불자 자긍심 고양 견인한다’ 제하의 사설에서 백만원력 결집위원회가 추진하는 ‘인도 부다가야 한국사찰 건립’이 꼭 성취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인도순례를 떠난 불자들이 깨달음의 땅에 세워진 한국사찰에서 자비와 상생을 온몸으로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결코 녹록지 않은 불사인데 올해가 지나가기도 전에 낭보가 날아들었다. 설매, 연취 두 보살이 사찰건립 불사에 써달라며 백만원력 결집위원회에 50억원을 보시했다는 소식이다. “불사 원력을 세우면 성취되는 법”이라는 옛 선지식의
‘1978년 그곳은 논밭이 대부분인 허허벌판이었다. 걷기에도 불편할 정도로 발을 디디면 발이 푹푹 빠질 만큼 질퍽했고 논밭이 대부분이었다.’광덕 스님의 포교전법 상징인 ‘불광사·불광법회’가 들어서기 전 잠실 부지의 모습은 이와 같았다. 광덕 스님이 2만여 불자들의 십시일반 지극한 정성을 모아 1982년 8월15일 법요식과 현판식을 갖은 뒤 본격적인 포교전법의 활동을 시작한 도량이 불광사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오늘의 불광사 법당에서 일요법회가 중단됐다. 충격이다. 불광사가 광덕 스님의 전법도량을 상징한다면 일요법회는 스님의 포교
화성연쇄살인사건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천도재가 11월23일 효행본찰 용주사에서 엄수됐다.위패단에 봉안된 희생 영가들은 누군가의 어머니였으며 누군가의 딸이었다. 희생 영가들의 억울함과 범인이 누구인지도 모를 가족들의 답답함은 최근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범인의 유전자 확인과 자백에 따라 그 전모가 드러나며 풀리기 시작했다. 살인을 저지른 범인을 몰랐기에 30여년이 넘는 세월을 회한과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가족이었다. ‘화성시’가 범죄의 고장으로 낙인찍히고 있다는 비난 여론 때문에 범인만이라도 찾아달라는 목소리도
최근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까지 언급하며 과도한 방위비분담금을 우리 정부에 요구한 것에 대해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가 “미국의 요구는 한국의 안전을 지키는 분담금이라기보다 미국의 패권을 유지, 확장시키기 위해 한국의 국가예산을 폭력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설득력 있다. 냉전이 종식될 즈음 미국은 세계의 안전을 위한 동맹국들의 기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공동방위’ ‘책임분담’이라는 용어가 수면 위로 급부상했고, 2010년대 들어서서 ‘부담분담’이라는 용어로 대체됐는데 미군의 해외주둔에 따른 비용을 동맹국
전국비구니회 12대 회장 본각 스님이 취임했다. 취임사를 통해 “신중하되 주저하지 않는 발걸음으로 비구니승가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일성이 인상적이다. “소통과 화합, 그리고 협력이라는 가치가 비구니승가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주기 바란다”는 당부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아울러 안정적인 수행환경 조성을 위한 복지체계 보완, 비구니 승가 도약을 위한 인재육성, 사회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지향점 제시, 사찰음식 세계화와 비구니 승가 역사조명 등을 약속했다. 불교계가 전국비구니회에 요구하
조계종 백년대계본부가 종단과 한국불교의 중장기적 미래설계를 위한 여론조사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24개교구에서 법랍 10년 이상 9455명의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설문조사다. 법랍 10년 이상이라면 3급 승가고시 합격자로서 주지소임 자격 요건을 갖춘 스님이다. 전법과 수행 현장에서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을 인식하고 풀어온 스님들에게 듣는 여론이고, 조사결과를 토대로 중장기 과제와 전략을 수립할 예정인 만큼 이번 조사에 실린 무게감은 실로 지대하다. 그러고 보면 자연스럽게 설문 조항에 눈길이 쏠린다. 설문은 총 100여개 문항으
중국과 일본이 수교(1972)를 맺은 20년 후인 1992년 한국은 중국과 수교를 맺었다. 삼국간의 교역과 현지투자가 뒤따르기 시작했고 정치, 경제, 문학, 예술 등의 교류도 증가했다. 급속한 변화에 불교계도 꿈틀거렸다. 한중일불교우호교류대회가 대표적이다.중국불교협회장이었던 조박초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을 지낸 거물이자, “중국 대륙의 불교가 대중을 위해 일하고, 사회복리를 도모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불교 역할의 중요성을 역설해 온 인물이었다. 중국·일본 간의 수교 이후 양국의 불교계를 돈독히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진각종 13대 총인 추대법회에서 경정 대종사가 전한 법어가 의미심장하다. “가을 햇살이 더 없이 살가운 오늘, 부끄럽고 겸허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 아직도 아픔이 가득한 현실 상황에 대하여 불제자의 한 사람으로 그저 부끄럽습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신흥불교교단은 1947년 대구에서 창종된 진각종이다. 당시 불자들에게는 꽤나 낯설었을 밀교의 부흥을 표방한 종교임에도 단숨에 한국불교 4대 종단으로 비약했다. 선·통불교가 주류를 이류는 한국불교계에서 밀교 수행법을 품고 있는 진각종이 차지하는 가치는 지대하다. 잠
국립중앙박물관이 사명유정 스님의 친필·유묵 특별전을 열었다. 일본 교토 교쇼지(興聖寺)와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들이다. 전시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스님의 선기와 대승보살 정신을 직면할 수 있기에 의미 깊다.스승인 서산휴정 스님의 문하에서 정진 한 사명유정 스님은 공관을 깨친 후 금강산에서 무애한 삶을 영위하던 중 임진왜란을 맞이했다. 처참하게 살육 당하는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승병을 모아 참전했지만 적장마저도 부처님 법으로 다스렸던 사명유정 스님이다.무장이었던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는 임란 때 사명유정을 처음 만났는데
‘원력’에 담긴 의미는 깊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스스로 보살이 되어 다른 사람을 구제하려는 굳은 결의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목적 또는 공동체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려는 결연한 의지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측면에서 보면 후자를 ‘소극적 원력’이라 하겠지만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현안을 타개하려는 서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억불숭유 시대에 꺼져가는 법등을 다시금 밝혔던 허응보우 스님의 삶을 돌아보면 이해할 수 있다.허응보우 스님은 연산군이 폐지한 선교양종을 복원한 후 승과를 복원해 실시했고, 성종이
통도사 사중의 원로스님들 사이에서는 의미 있는 구전 하나가 내려오고 있었다. 영축총림 통도사가 6·25 한국전쟁 당시 부상병을 돌보는 야전병원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최근 공개된 통도사 미륵불소조좌상 복장유물 중 하나인 용화전미륵존불갱조성연기(龍華殿彌勒尊佛更造成緣記)를 통해 이 구전은 사실로 밝혀졌다.이 자료에는 ‘한국전쟁 후 국군 상이병사 3000여명이 통도사에 들어와 1952년 4월12일 퇴거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절에 남아있던 스님들이 부상병 간호에도 힘썼다”는 구전을 감안하면 당시 통도사는 전각, 요사채 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