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솔사 부속 암자인 보안암 석굴.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돼온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9호 다솔사 보안암 석굴(多率寺普安庵石窟)이 신라시대에 창건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경남 사천 다솔사 인근에 머물며 한학을 연구해 온 추전 김화수씨는 “1336년(고려 충숙왕) 이곡(李穀)이 쓴 『서봉사사적』과 1657년(조선 효종) 고성현령 최응천(崔應天)이 쓴 『서봉사기』에 다솔사 보안암 석굴이 신라 신문왕(神文王, 681~691) 때 창건됐다는 내용이 적혀있다”며 “지금까지 알려진 고려시대가 아닌 신라 시대 때 창건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김 씨에 의하면, 『서봉사사적』에는 “신라 신문왕 4년(684년)에 신문왕의 두 아들이 의명 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며 김일
1910년대 『불교유신론』을 발표하고 정치권의 힘을 빌려 불교개혁론은 단행하려 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은 1931년에는 정교를 분리하라며 불교계의 각성을 촉구했다. 만해 스님은 무엇 때문에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선언한 것일까.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은 12월 19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주최로 열린 제229회 월례연구발표회에서 ‘한용운의 정교분리론 연구’를 발표했다. 김 연구원의 논문에 따르면 1910년대 만해 스님이 일본 여행에서 돌아와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할 당시 그에게는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없었다. 오히려 공부하지 않고, 사회와 괴리돼가고 있는 불교계의 개혁을 촉구했다. 이러한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만해 스님은 국가 권력의 힘을 빌려 성취하고자 한다. 1910년 3월 중추원에
미륵사지는 백제 古都 익산의 심장모두 해체하면 후손에 돌만 남겨줘 “1층 탑신과 기단부까지 해체되면 1400년전 백제인들이 지은 미륵사지석탑의 원형은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지식과 기술로 미륵사지석탑의 원형을 찾지 못한다는 판단이 선 이상, 석탑의 해체는 현재에서 중단돼야 한다.” 미륵사지석탑 복원 자문위원인 김삼룡 전 원광대 총장은 “미륵사지석탑의 1층과 기단부는 해체하지 말고, 후대인들의 몫으로 물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 공청회와 심포지엄을 통해 여론을 수렴하고 있지만 미륵사지석탑 복원 방향은 사실상 자문위원회에 의해 결정된다. 현재 자문위원회에서는 완전 해체설과 기단부를 살리는 현상 복원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백제석탑의 원형이 남아있는 기단부를 살려야 한다
“모두 해체해 원형 찾자”“후대의 몫으로 넘겨야”학계 전문가도 의견 엇갈려 현재 1층 탑신부와 기단부를 남겨놓고 있는 미륵사지석탑은 더 이상 해체할 것인지 현상태에서 중단할 것인지 기로에 서있다. 한국 최고(最古)의 석탑인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해체 복원작업이 ‘딜레마’에 빠졌다. 2001년부터 해체를 시작한 미륵사지 석탑은 현재 1층 탑신부와 기단부의 해체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채, 조선시대에 설치된 석축들의 잔석을 걷어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 미륵사지 석탑 자문위원회에서는 1층 탑신과 기단부의 해체를 앞두고 의견이 양분되어 있다. 1층과 기단부까지 모두 해체를 해서 한국 최초 석탑의 원형을 찾아보자는 주장과 1층과 기단부는
양주 회암사지 출토유물 소유권 확인 2차 소송에서도 회암사가 승소했다. 서울고법 민사 15부는 12월 15일 대한불교조계종 회암사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회암사지 출토 유물에 대한 소유권 확인 청구소송’에서 ‘항소 기각’을 내렸다. 의정부 지법 민사합의 12부는 지난 2월 1일 회암사가 문화재청과 경기도 양주시를 상대로 낸 회암사지 출토 유물에 대한 소유권 확인 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를 판결한 바 있다. 1차 소송에서 패소한 문화재청은 판결에 불복, 항소를 제기했다. 이번 2차 승소에서 서울고법 민사 15부는 “현재 회암사와 구 회암사가 동일 사찰인 것이 인정되며,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회암사지 출토 유물이 모두 현 회암사의 소유”라는 판결을 내렸다. 따라서 현재 회암사에서 출토 27만여점의 유물뿐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이어진 범패는 우리시대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유산을 몇몇 어장 스님들에게만 맡겨둔 채 전승 보존하라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시급히 영산재를 세부 종목으로 분할, 예능보유자를 지정해 전승보존에 힘써야 한다.” 동방대학원 대학교 겸임교수 능화 스님은 12월 11일 신촌 봉원사 범음대학 세미나실에서 열린 ‘중요무형문화재 제 50호 영산재보존회 제 4회 학술세미나’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능화 스님은 ‘범패의 전승’이라는 주제 논문을 통해 “범패는 석존의 공덕을 찬탄하는 노래로 삼국시대 이래 일제시대까지 명맥이 유지돼 왔던 우리의 문화유산”이라며 “그러나 범패는 무형문화재로 보존하는 정도의 정책으로 일관할 뿐 행정적 지원이 미미해 그 명맥이 단절될 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2월 14일 ‘황룡사복원기본계획 공청회’를 개최했다. 이번 공청회는 황룡사 복원을 앞두고 복원정비사업의 타당성과 추진계획에 관한 각계 전문가들과 시민단체의 의견을 수립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황룡사 복원을 국책사업으로 설정하고 황룡사 복원을 위한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날 공청회 발표자로 참가한 양윤식 한얼문화유산연구원장과 홍성걸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그리고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조물연구실장은 황룡사 복원과 관련한 사례분석과 추진절차, 응용기술 방안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여전히 복원 불가의 목소리 또한 높았다. 이날 종합토론자로 참여한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복원 불가하다’는 입장을 내세우면서 “현재 황
정병국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주최하고 (재)명원문화재단과 (사)다도총연합회가 주관한 2006년 국제차문화학술세미나가 12월 5일 대한민국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한국 차문화의 부흥’을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국내외 차 전문가들이 참석해 한국 차문화의 역사와 앞으로의 발전방향을 논의했다. ‘한국 차문화 부흥운동의 역사와 현대적 가치’를 발표한 이승원 국민대 재단이사는 “문헌상으로는 한국에 처음으로 차가 전래된 기록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선덕여왕대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 길림상에서 발견된 6세기 후반 고구려 무덤에서 발견된 선인진다도에는 공작을 탄 공자선인이 대접 모양의 검은 그릇을 받쳐들고 있는 그림이 등장한다”며 “이 다완의 모양이 신라나 고려의 다완과 크게 다르지 않음으로 볼 때 이미 고구
구산장학회는 12월 16일 법련사에서 제11기 구산장학회 수여식을 거행했다. 올해의 구산장학생으로는 동국대 불교학과 권순범(석사), 장석영(석사), 서울대 국사학과 김용태(박사), 동국대 불교학과 차상엽(박사), 인도철학과 최지연(박사), 심준보(박사)가 선정됐다. 구산장학회는 이범세 현 구산장학회 이사장의 부인 조동호 보살이 1995년 초등학교 평교사 직을 마치고 받은 퇴직금 2억2000만원을 출연하여 설립한 단체이다. 1996년부터 매년 불교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을 대상으로 석사 100만원, 박사 200만원의 장학금을 수여해왔다. 탁효정 기자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속 인물은 지금까지 화엄사의 창건주 연기 스님의 어머니라는 설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신용철 연구원은 이 인물이 화엄경의 사자빈신비구니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구례 화엄사에서도 지리산의 넉넉한 품이 가장 잘 보이는 효대(孝臺)에는 네 마리 사자가 탑신을 받들고 있는 석탑 하나가 서있다. 바로 국보 제35호로 지정된 화엄사4사자3층석탑(이하 화엄사석탑)이다. 탑 중앙부에 네 마리 사자들로 둘러쌓인 가운데는 가사를 걸친 스님이 서있으며, 탑과 마주보고 있는 석등에도 작은 잔을 든 또 한 명의 인물이 서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 심상치 않은 인물들을 둘러싸고 조선시대 문인들과 근현대 학자들은 여러 설을 제기해왔다. 혹자는 화엄사 창건주 연기 스님과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에서 사자에 둘러싸인 인물은 화엄경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사자빈신비구니이며, 맞은 편 석등에서 작은 잔을 들고 있는 인물은 선재동자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같은 해석은 그동안 학계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진 ‘화엄사 창건주 연기 스님과 어머니’설을 완전히 뒤집는 주장이다. 신용철 통도사성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미술사학연구』 250·251권 합집에 「화엄사 사사자석탑의 조영과 상징-탑으로 구현된 광명의 법신」을 발표했다. 신 연구실장은 이 논문에서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은 화엄경 사자빈신비구니와 선재동자의 일화를 형상화한 것이며, 화엄사 가람배치는 붓다가 불타가 모든 대중을 사자빈신삼매에 들기 위하여 대광명을 발하는 순간, 즉 화엄불국토가 완성되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 연구
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이하 조사단)과 문화재청은 12월 9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한국의 사찰문화재’를 주제로 제1회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번 세미나는 발굴조사단과 문화재청이 2002년부터 10개년 계획으로 추진해오고 있는 ‘전국 사찰문화재 일제조사’의 성과를 정리하고, 관련학계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번 학술세미나에서는 전국 사찰문화재 일제조사의 성과에 대한 조사단 단장 탁연 스님의 발표를 시작으로 △서산 개심사 목아미타삼존불과 충남지역의 고려후기 조각(덕성여대 최성은 교수) △비암사괘불을 중심으로 한 충청지역 불화연구(동국대 김창균 교수) △순천 송광사 성보박물관 소장 불교문헌 연구(중앙대 송일기 교수) △조선후기 범종 장인 연구(국립중앙박물관 최응천
‘다선일미’, 차와 선이 한 맛으로 통하는 경지를 일컫는 이 말은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용어이다. 한국 차와 선불교의 역사는 뗄래야 뗄 수 없을 만큼 밀접한 연관을 맺어 왔다. 선사의 수행공간에는 항상 다기가 함께 했으며, 차밭 근처에는 선사들의 수행처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최근 한 연구에 의하면 한국과 일본의 녹차가 모두 중국 절강성 천태산의 차종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연구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3년 대렴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면서 가져온 차종이 바로 중국 절강성 천태산이며, 이는 일본차의 발상지와 동일한 것이다. 또 중국 용정차의 고향 또한 절강성이다. 한국에 처음으로 차가 전래
백제 무왕과 선화 공주의 러브스토리를 소재로 한 SBS 방송의 드라마 ‘서동요’ 주인공 무왕. 삼국유사는 무왕이 과부인 어머니가 연못의 용왕과 사통하여 태어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백제 국왕이 용왕의 아들이며, 수도가 아닌 변방지역 과부에게서 태어났다는 설화는 무왕의 출생과 왕위에 등극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무왕의 고향이자, 왕이 된 후에 선화공주와 함께 내려가 미륵사를 창건한 도시 익산은 법화·미륵사상을 바탕으로 건설된 군사·종교적 계획도시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조경철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고대사연구소 전임연구원은 『내일을 여는 역사』 26집에 ‘왜 백제 무왕은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했나’를 발표했다. 조 연구원은 이 글에서 “익산은
“8세기 서풍(書風)인 것은 확실하지만 김생 글씨라 단정 짓기는 어렵다. 추사가 ‘금자 사경은 모두 김생과 안평대군 이름을 갖다붙인다’고 말할 정도로 김생 글씨는 가짜가 많았다.” 지난 20년간 진위여부로 논란이 돼온 ‘불설불명경편’〈사진〉이 서울대 기초과학교육연구공동기기원 탄소연대측정 결과 통일신라시대 문서인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것이 ‘해동(海東)의 서성(書聖)’이라 불린 통일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의 글씨인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학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이 문서에 대한 학술세미나가 지난 11월 25일 한국서지학회의 주최로 열렸다. 온양정씨 집안에서 9대째 보관해온 ‘불설불명경편’ 문서가 통일신라시대에 쓰여진 것은 확실하지만 김생의 글씨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진단이 나왔다. 한국서지학회는
근대를 거치면서 일본 불교는 크게 세 번의 폭격을 맞았다. 천황을 신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신도 강화정책(신불분리정책) 과정에서 야기된 폐불훼석, 국가신도체제의 확립에 따른 종교계의 순응과 전시체제 확립, 그리고 중일전쟁에서 제2차세계대전까지 국가총동원체제 속에서 이루어진 종교 탄압이 그것이다. 11월 25일 ‘동북아 삼국의 근대화와 불교계의 대응’을 주제로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중점연구소가 개최한 중간발표회에서 원익선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와 사토 아츠시 연구원은 1930년대 전시체제 속에서 불교계의 저항운동을 사회주의 노선과 불교 지식인들의 활동으로 나누어 소개했다. 흔히 종교를 아편으로 간주하는 사회주의는 불교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로 간주된다. 하지만 1931년 일본의 세노오 기로에 의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보존회는 12월 11일 오후 1시 신촌 봉원사 범음대학 세미나실에서 제4회 학술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명복(동국대 법학과) 교수는 ‘불교와 인간’, 김흥우(동국대 연극과)명예교수는 ‘불교의례와 연희적 측면’, 장휘주(서울대 국악과)교수는 ‘반 짓소리 연구’를 각각 발표하며 김갑기(동국대 국문학과) 교수는 국문학적 측면에서의 영산재를 조명한다. 또한 최로덴(명중) 인도 국립박물관 박사를 비롯해 이애주(서울대)교수, 김종형(동방대학원) 교수, 이미향 박사는 각각 ‘티베트 불교의식의 수행적 의미’, ‘불교와 무용’, ‘영산재 전승’, ‘한·일 불교음악’ 주제 발표를 한다.
파라미타청소년협회(이하 파라미타)의 12번째 지부가 탄생한다.파라미타는 12월 16일 오후 인천불교회관에서 인천지부(이하 인천 파라미타)의 발대식을 가질 예정이다. 인천 파라미타의 초대 지역 총재에는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아 발대식을 준비하고 있는 인천불교회관 일지 스님이 내정됐다.호남지역과 함께 불교세가 상대적으로 약한 인천지역의 올바른 청소년 문화 정착과 건전한 청소년 육성을 기치로 내건 인천 파라미타의 창립으로 향후 인천지역의 청소년포교는 한층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일지 스님은 “좀 더 세밀한 준비를 위해 11월 18일로 예정했던 인천 파라미타의 발대식을 연기했다”며 “신중하게 출발하는 만큼 앞으로 인천지역의 청소년포교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인천 파라미타의 활동에 많은 분들의 관심과 동참을
진각종이 초기불교에서의 전통 밀교에 대한 학술적 논의를 통해 한국 밀교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이론 정립에 착수했다. 진각종 회당학회(회장 혜정)는 11월 28일 스리랑카 콜롬보 켈라니아 팔리 불교대학원에서 '남인도의 대승불교와 밀교'라는 주제로 상좌부 불교에서의 밀교와 한국 밀교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상호 비교하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그 동안 '초기불교에서는 의식과 의례를 강조하는 밀교를 배척했다'는 기존 학계의 시각과는 달리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초기불교에서도 밀교의 전통이 있었다는 점을 밝혀 관심을 끌었다. 팔리불교대학원 찬드라 위크라마가마제 명예교수는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스리랑카에서 밀교의 전통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발굴된 유적 또는 각종 문헌을 통해 그 사실이 입증된다"며 "
발해에서 건립된 전탑은 주로 무덤 위에 세워졌으며, 이는 중국과는 다른 발해만의 독특한 문화적 특징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방학봉(方學鳳) 연변대 역사계 교수는 11월 18일 서울 관문사에서 열린 제8회 천태학술대회에서 ‘발해의 탑터’를 발표했다. 방 교수가 조사한 유적 중 발해의 전탑은 정효공주무덤탑, 마적달무덤탑, 영광탑〈사진〉 등 총 세 개다. 그런데 이 세 개의 전탑이 모두 무덤위에 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방 교수는 “정효공주무덤탑과 마적달탑은 발해왕실귀족의 무덤과 불탑이 결합돼 세워진 것으로 지궁은 무덤이며 무덤위에 탑을 쌓은 것이 발해전탑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방 교수는 또 “발해 사찰의 가람배치를 살펴보면 무덤탑은 산에 있고 근처의 산아래 절간이 있는 특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