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에서 천일 기도를 하면서 세운 일과 한 가지가 일기쓰는 일이다. 1000일 동안 기도를 하면서 일기를 쓰되 붓글씨로 쓰려는 스스로의 약속 때문에 매일 해가 넘어가면 붓글씨로 일기를 썼다. 기도 시작 시간과 끝나는 시간은 하루에 세 번 거의 일정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일과는 매일 다르다. 매일 찾아오는 관광객도 다르고 법당에서 제를 지내는 이나 불공하는 사람들도 거의 다른 모습이다. 관광객들 중에는 다수가 전등사 대웅전 추녀 끝 나녀상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나는 전등사 안내를 하며 포교를 한다. 대웅전 역사부터 나녀상 전설까지 이야기 한다. 추녀끝 나녀상은 대웅전 네 귀퉁에 추녀를 받들고 있다. 전설상으로는 대웅전 불사를 진행하던 도편수가 전등사 밑 마을 주막의 여인을 사모한
불자들의 참선수행공간 마련을 위해 96년부터 시작한 대웅보전 중창불사를 마치며 10월 28일 해안 스님 추모법회를 여는 성북동 전등사 동명 스님. 전등사는 1969년 해안 스님의 도심포교 원력으로 세워진 이후 도시 불자들에게 편안한 수행도량으로 다가서기 위해 96년부터 불사를 시작해 시민 선방을 갖춘 도량으로 거듭났다. 불사를 회향하는 올해는 해안 스님의 탄생 100주기 되는 해이기도 하다. 동명 스님은 “해안 스님 살아 계실 적에 녹음해 둔 스님의 법문을 풀고 당시 내소사 불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글귀 등의 자료를 수집해 스님 법어집인 해안집을 완성했다”며 “해안집은 3권으로 이루어졌으며 1천 질 가량을 강원이나 선원, 도서관, 불교대학 등 일반불자들에게 무료로 나눠줄 계획”
지난 10월 13일 강화 전등사 신임 주지로 선임된 계성 스님은 “선조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되찾는 것은 후손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며 “외규장각 도서를 되찾기 위한 시민 서명운동과 강화도 일대에 연등 6만개를 매다는 등 지속적인 반환운동을 펼쳐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운동은 단순히 도서 반환 운동으로만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일본·미국·유럽 등 해외에 유출된 우리의 국보급 문화재를 모두 되찾는 운동으로 전개시켜 나갈 것”이라는 계성스님은 “앞으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 국과 인터넷을 통해 조직적으로 연대하여 국제적 문화재 반환 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계성스님은 지난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강화 전등사에서 ‘삼랑성 역사문화축제’를 열고 병인양요 사건
강화 전등사는 지난 10월 12일 ∼14일까지 강화 삼랑성 일대에서 ‘삼랑성 역사문화축제’를 개최했다. 이번 축제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에 약탈되어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위한 범국민적 운동의 일환으로 열렸다. 특히 축제 기간 중 열린 학술세미나에서는 외규장각 도서가 가지는 역사적의의를 재조명하고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된 원인과 결과를 분석, 이때 프랑스 해군에 빼앗긴 외규장각 도서의 정확한 수량을 밝혀내는 학술적 토의를 가졌다.
하이텔불교동호회 차모임 ‘명등계’는 지난 10월14일 강화 전등사에서 가을모임 들차회를 열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 등의 식순을 마치고 차를 우려 첫 잔을 부처님께 공양한 뒤 회원들이 차담을 나누고 일반 관광객에게도 차공양을 하는 행사를 가졌다. 회원들은 녹차, 연차 등 한국차와 우롱차, 철관음 등 중국차, 말차로 대표되는 일본차 등 다양한 차를 준비해 차의 효능과 마시는 법을 홍보했다.
지장기도를 하다보면 천도재도 겸하게 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천도재뿐만 아니라 구병시식도 많이 하게 되는데 특히 지장기도는 더 그렇다. 그래서인지 나도 천도재를 지낼 일이 많이 생겼다. 한 번은 전등사 대웅전 추녀 끝의 나녀상과 그걸 만든 도편수의 천도재를 지냈다. 몇 백년의 역사 속에서도 도편수는 결혼을 하고 싶어 했을 것이고, 추녀 끝 나녀는 결혼을 속이고 도망간 죄의식을 영원히 갖고 있으리라 생각됐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분들이 기도를 원만히 회향하려면 그 두 사람의 영혼을 결혼시키고 천도시켜야 한다고 말하며 나보고 명부전에서 염불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지스님과 상의를 했지만 “기도하는 스님이 쓸 데없는 짓을 한다”고 반대를 하셨다. 그래서 .취소하기로 했지만 신도님들은 끝까지 굽히지
천도재를 지냈던 신도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지금의 강화 양조장 총무님 소개로 전등사엘 왔다. 그 신도는 옷을 만들어 외국으로 수출하는 회사를 경영했다. 스님이 기도도 천도재도 잘 한다고 해서 왔다는 것이었다. 두 부부는 “사업이 잘 되지 않고 하는 일마다 안 돼서 매우 힘들다”는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천일지장기도에 입제를 하게 하고 본가와 처가, 시집과 친정의 모든 영가에 대해 고조부부터 유산된 태중 아기영가까지 위패를 적어 올리고 기도와 천도재를 겸하게 했다. 얼마 후 천도재를 올린 뒤 공장을 개업한 이래로 외국수출을 최고 많이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리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앞으로 절에 다니다 보면 불사할 일이 많으니 그
성북동 전등사(주지 동명 스님)가 10월 28일 오전 10시 ‘해안 스님 추모 법회 및 대웅보전 불사 회향법회’를 봉행했다. 이날 행사는 조계종 원로 석주 큰 스님, 교육원장 무비 스님, 포교원장 도영 스님을 비롯해 대흥사 보선 스님, 화엄사 종걸 스님, 선운사 법현 스님, 신흥사 마근 스님 등 200여 명의 스님과 1000여 명의 불자들이 동참한 가운데 여법하게 진행됐다. 전등사 주지 동명 스님은 해안 스님 추모법회에 맞춰 법어집 좬해안집좭과 해안 스님의 육성법문이 담긴 금강경 법문CD를 함께 발간했다. 한신애 기자
생사 없는 곳에 따로 한 세계가 있으니 때묻은 옷이 떨어져 다하면 바로 이 달 밝은 때이니라. 生死不到處 別有一世界 垢衣方落盡 正是月明時 라는 게송을 남기고 27년 전 홀연히 사바와의 인연을 접었던 해안(海眼) 대종사가 3권의 책과 함께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후학들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생일날을 택해 열반에 들고, 사리가 나오더라도 물에 띄워 버릴 것이며, 비(碑) 같은 것은 일체 세우지 말라는 유훈을 남길 정도로 엄격했던 스승의 뜻을 금과옥조처럼 간직해온 불교전등회 회주 혜산 스님과 전등사 주지 동명 스님 등 후학들이 전등(傳燈·부처님의 혜명을 전하는 일)으로 평생을 일관해온 스승의 가르침과 숨결을 더 많은 인연중생들에게 생생히 전하기 위해 세
천일 지장기도를 하면서 기도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매일 절에 참배오는 신도와 법회일에 오는 신도들에게 무엇인가 유익한 것들을 선사하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법회운영을 다양히 하고 관광객과 마을 주민을 상대로 적극적인 포교를 하자는 기획을 하였다. 전등사의 유구한 역사와 명성에 비하여 당시 신도는 300여명에 불과하였고 특히 강화읍 신도는 유일하게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신도확보에 주력하기로 하고 기도에 임했다. 먼저 매일 오는 신도들에게는 시간과 여건이 허락되면 차와 과일을 공양하며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상담도 하였다. 그결과 신도는 차츰 늘게 되어 기도회향 무렵에는 700여명이 되었다. 또 지장재일 법회에 오는 신도들에게는 천일기도 기간동안 정견스님의 지장경강의를 들
금강경 강의로 유명한 해안 스님의 경전 독송 CD가 출시됐다. 서울 전등사 동명스님이 해안 스님 탄생 100주기를 맞아 해안집3권을 낸데 이어 금강경 예불, 한글발원문 등 해안스님의 육성이 담긴 CD를 출시했다. 이 CD는 해안 스님의 상좌였던 동명 스님이 1960년대 어렵게 녹음기를 구해 해안 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사찰에서 발전기를 돌리며 녹음을 하는 등 많은 노고가 담겨있다. 구입문의 02)762-0643
"성역화 기반 확실히 마련하겠다"선원사 복원 기원 3차천일기도입재 성원 스님"올해는 팔만대장경이 강화 선원사에서 서울 지천사로 옮겨진지 꼭 6백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런 뜻깊은 해를 맞아 팔만대장경 판각성지 선원사 복원을 위한 3차 1천일 지장기도를 입재하게 돼 감회가 새롭습니다." 팔만대장경 판각성지 선원사 복원을 위한 제3차 1천일 지장기도를 입재하는 선원사 주지 성원스님은 이번 기도를 통해 선원사가 더 많은 불자와 국민들에게 알려지길 기원하고 있다. 지난해 11월4일부터 80일간 사적259호 선원사에 대한 1차발굴을 통해 강화군선원면 지산리의 현 선원사가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곳임을 확신하고 있는 성원스님은 이번 1천일 기도를 통해 선원사 성역화 작업에 필요한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강화는 전등사를 비롯한 사찰이 13개인데 비해 교회는 170여개이다. 너무도 큰 차이에 마음이 늘 편치 않았다. 여하튼 나름대로 신도배가에 힘쓰기로 하고 우선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방편으로 삼아 조기축구회에 나가기로 하였다. 매일 아침예불기도 후 동이 틀 무렵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마을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아침운동 시간이면 종종 새로운 사람들과 일들을 접하곤 한다. 자연히 불자들 외에 타종교인들도 보게 된다. 이렇게 오며가며 인사도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은연중에 포교가 되고 내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매일 보는 어떤 한 기독교인은 나를 볼 때마다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할렐루야, 아멘, 스님 잘 계셨습니까? 스님 장가가시죠. 하나님은 스님을 보고 안타까워
불제자 입문후 신혼되찾은 '겨울부부' 15년전 국수 공양 통해 불교 참의미 알아 겨울이 되면 새하얀 눈이 쌓인 산사(山寺)의 풍경이 좋아 막내아들(윤재영15)을 데리고 자주 전국의 명찰(名刹)을 찾는다는 윤종건(법명 송산˙47) 박화예(법명 자현˙45)부부. 이들 두사람은 자신들이 결혼한 시기도 겨울(74년12월)이라면서 비록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못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불자가정이라며 흐뭇해 한다. 충남 천안에 있는 조그마한 농촌마을에서 태어난 이들 두사람의 생활을 주위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이들 두사람이 불자로서 서로를 믿고 이해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15년전 제가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아내의 돈독한 불심(佛心)덕이었습니다. 매일 저녁 아내는 서울 전등사
강화도 불교포교의 중심도량이 될 `강화포교당 법왕사(주지 계성 스님)'가 지난 20일 증축 준공기념대법회와 미타삼존불 점안식을 갖고 강화불교 중흥의 돛을 올렸다. 강화읍 남산리 343의 6번지에 소재한 코끼리 유치원을 증축해 이전˙개원한법왕사의 건물규모는 지하4층 지상1층 연건평 408평 크기로, 지하1층과 지상1˙2층은 코끼리 유치원과 어린이집 시설로 이용하고 3층과 4층은 법당과 신행공간으로 활용된다. 특히 법왕사는 강화불교신도회와 강화불교어린이회 등의 단체에 사무실을 제공, 명실상부한 강화불교 중심센터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불사로 현재 1백여명의 유치원생을 확보하고 있는 코끼리 유치원의 정원을 3개 학급 1백20명으로 늘렸고, 이른 시일내에 어린이집(40명 정원)을 신설해 맞벌이 부부 등 지
지난 15일 새벽 강화 전등사 극락암에서 "형상이 없지만.....,"이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한 이목당 서운대종사의 영결식과 다비식이 19일 오전 11시 김천 직지사(주지 녹원스님)에서 1만여명의 사부대중이 스님의 마지막 가는길을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히 봉행됐다. 5번의 명종으로 시작된 이날 영결식에서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혜암스님은 영결사를 통해 "서운큰스님은 대자대비로 광도중생하는 방편문을 열어서 조계종의 총무원장직을 담당하셨다"며 서운스님의 원력을 이제 남은 우리가 종단발전의 계기로 삼아야한다면서 스님의 유덕을 기렸다. 이어 총무원장 월주스님은 조사를 통해 "큰스님은 정화불사의 선봉에 서서 본사주지와 총무원장등을 두루 거치면서 불조혜명을 드높이는데 큰 공헌을 남기셨다"며 50년대이후
동래구 사암연합회 제 1회 장학금 전달식 【부산】동래구사암연합회(회장 전등사 주지 도문스님)는 5월3일 동래구청회의실에서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제1회 장학금 전달식을 가졌다. 이날 전달식에서 동래구사암연합회는 학산여중 김양경양 외 13명의 저소득층주민 자녀에게 2백80만원의 장학금을 수여했다. 사경으로부처님 오신 뜻기려 보문종(총무원장 혜일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종단 차원의 봉축행사로 5월7일 사경법회를 봉행했다. 보문종의 이번 부처님오신날 맞이 사경법회는 그동안 보문종 총무원 보문사차원으로 봉행되던 것을 종단차원의 봉축행사로 확대 실시키로한 지난 3월말의 방침에 따른 것이다. 보문종 총무원은 이번 사경법회에서 우수한 작품을 선정, 5월14일 초파일 봉축법회때 총무
산의 앉음새가 반드시 그 높이로써만 헤아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본보기가 이 마니산이다. 표고가 아무리 1천미터를 넘는다 한들 그 보다 더한 높이의 산덩치들이 둘레에 득실거리는 강원도 오지에 놓였다면 그 산은 눈에 뛸 리도 만무한 것이다. 그와 반대로 5백미터에도 못미치는 높이일망정 둘레가 탁 트인 평지에 솟았다면 한눈에 그 산을 알아보다 뿐인가. 인근 주민들이 조석으로 그 산을 우러르며 칭송하게 된다. 산의 놓임새가 그 산 품격을 좌우하는 까닭이 거기 있다. 사실 마니산은 국내에서 5번째로 큰 2백93평방킬로미터의 강화도에 군림하여 내륙으로도 물론 서쪽으로 망망대해를 내다보고 앉았으되 그 산세마저 깍아세운 암봉으로 치받들려 있으니, 김정호의 《대동지지》가 그 모양새를 한마디로 이렇게 전한다.
적상산(1,029.2m)의 본디 이름은 그저 상산, 치마바위로 둘러싸였다는 뜻이다. 그 절경은 지금 장수에서 무주를 잇는 서쪽 19번 국도변에서 더욱 장관이지만, 가을철 단풍이 물들 무렵에는 더구나 그 바위들이 붉은 치마를 두른듯 찬란하여, 거기 붉은 적자를 얹어 적상산이다. 여기에 관하여 《동국여지승람》은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사면으로 곧추 선암벽이 층층이 험하게 깍이어 마치 치마를 두른 것같아 그 이름이니, 옛사람들이 그 험준함을 사서 성으로 삼았다. 두 갈래 길이 겨우 위로 열리지만, 그안은 평탄하고 넓어 시냇물이 사방에서 솟아난다. 참으로 천연의 요새라. 옛날 거란병과 왜구가 근방 수십고을을 침략해 들어왔을 때도 백성들이 모두 여기 의지하여 목숨을 보존했다." 서쪽 사천
9)불교건축 우리나라의 불교건축사는 불교가 이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됐다. 역사책에기록된 최초의 사찰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로 고구려소수림왕 2년(375)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옛 불교건축인들은 매우 유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백제 장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초기사원의 조영에 참여했다. 삼국이 통일된 후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사원건축 명인들이 통일신라의 수도로모여들어 한단계 더 수준 높은 건축물들을 빚어냈다.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 바로 건축물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불교가 흥했던 시대에 세워져 지금껏 남아있는 불교 건축물에서 확인된다. 이야기를 근세로 돌려본다. 근세에 접어들기 전까지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