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당선 초기 대북 압박정책 일변도에서 탈피해 북한 비핵화의 조건을 벗어나 인도적 지원과 사회문화 교류의 작은 만남을 통해 조금씩 신뢰를 재구축하며 한반도의 평화를 단계적으로 실현하겠다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응원하는 글을 몇 차례 서술했다. 탄핵 당한 박근혜의 ‘통일대박론’ 정체가 대체로 드러난 지금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순진한 학자의 어리석은 기대에 다름 아니었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은 5대 국정목표의 하나로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에 앞서 2017년 7월 독일 베를린에서 ‘신한반도평화비전’을
가을이 한껏 무르익어 가고 있다. 나뭇잎이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가고 성질 급한 나뭇잎은 벌써 낙엽이 되어 거리를 뒹군다. 벌써 올해도 달력이 두 장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쉬이 피로해지고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것도 서글프지만, 그보다 기억력이 감퇴해 전화번호를 외울 때 앞에 번호를 외우면 뒷 번호가 생각나지 않고, 뒷 번호를 외우면 앞 번호가 생각나지 않는걸 보면서 이만 저만 서글픈 게 아니다. 흔히 기억은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되는 반면 망각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또 기억과 관련된 단어
예전에 일본 도쿄의 강연회에서 동아시아의 불교를 소개한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유럽에서 온 어떤 부인이 일어나, 깨달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불교를 잘 모르는 분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써 이미 깨달은 스승이 인가하는 것, 또 하나는 대중이 알아볼 것이라고 했다.전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통적인 사자상승(師資相承)의 길을 말한다. 후자는 깨달은 사람의 말과 행동과 마음을 보고 대중들이 판단하는 것이다. 결국 전자는 나름의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실천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고 또 자신이 아무리 무능해도 초심만 지킬 수 있다면, 소망한 바를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초심을 지켜내지 못한다. 그것이 자신의 기존 삶의 방식과 다를 때에는 초심을 더욱 쉽게 포기해 버린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초심이 곧 궁극의 깨달음이다. 깨달음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해석을 요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윤리적 실천적 의미는 누구나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오
우리는 북한이 핵실험과 제재의 악순환에도 불구하고. 거듭 핵실험을 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북한 체제의 문제점을 대북제재 탓으로 돌리고, 체제 수호를 위해 핵개발을 하면서 군사국가화를 정당화하기 위함인지를 고려해볼 수 있다. 또한 대북제재가 그대로 진행되고 한반도 분단에 대한 현상유지 정책으로 강대국의 입장이 관철되는 질서를 타파하고. 체제의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추구하기 위하여 북미관계를 해결하고자 핵실험을 강화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전자일 경우 북한의 경제 회복은 어렵다. 핵실험으로 폐쇄성을 자처했지만, 강
세계의 언론은 한반도가 곧 전쟁터가 될 것처럼 요란하다. 남북전쟁 이후 줄곧 정전상태인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 한미일이 공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쪽 사람들은 하도 많이 겪는 일이라 그저 그렇거니 하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그처럼 큰일은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긴장되는 것은 북한과 미국의 험한 말 때문이다. 북한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화염과 분노” “완전한 파괴”라는 말을 통해 우리 한반도에 불안을 더하고 있다. 세
조계종이 매우 소란스럽다. 총무원장 선거가 다가오면서 종단의 갈등이 폭발적 양상으로 치닫는 모습이다. 한쪽에서는 폭로와 농성, 집회를 이어가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런 행동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의 계획대로 밀어붙이고 있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상징하는 일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급격히 줄어든 신도를 생각하면 스님들이 정진과 포교에 매진해도 모자랄 판인데, 많은 스님들이 정쟁에 휘말리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다. 더욱이 정쟁의 한 가운데 한국불교의 마지막 보루인 수좌스님들과 그 수좌스님들을 대표하는 스님들이 서 있다. 이러
총무원장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선거가 가까워짐에 따라 교계언론의 기사를 자주 들여다보게 되는데 언론의 성향에 따라 기사의 방향이나 내용이 경이로울 정도로 다른 점이 이채롭다. 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형제간에도 생각이 다를 수는 있지만, 같은 사안을 놓고도 저리도 다르게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을 보며 언론의 본연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정권에 호의적인 언론을 어용언론이라 낮잡아 부른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던 진보성향 언론이나 방송이 현재 두 야당의 모습에 비판을
연일 한미군사훈련과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으로 한반도 8월 위기설이 현실화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 7월7일 G20 정상회의 직전 중국과 러시아의 “북한 핵활동과 한미군사훈련 동시 동결”을 거절하였다. 즉,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 고조를 막으려는 ‘쌍중단’ 요구를 거부한 것이다. 미국의 헤더 나워트 국무부 대변인은 “군사훈련과 미군 주둔은 1950년대부터 이어져오던 것이며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으로 타당한 것인가? 우리는 한반도 군사적 긴장 고조의 직접적 피해자로서 한미군사훈련 중단이 불가능한 문제인가를
필자는 최근 사드(THAAD)반대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주말이면 짐을 싸들고 익산에서 성주까지 차를 몰고 간다. 사드발사대, 엑스밴드레이다, 발전기 등이 배치된 구 롯데골프장이 있는 소성리에 가서 주민들의 저항에 함께 참여하며, 사드가 지나간 진밭교 앞에 평화를 사랑하는 전국 민중들이 직접 세운 원불교 평화교당을 밤낮으로 지키는 일을 한다.연대운동을 할 때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경찰들과 실랑이도 벌이며,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하늘을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한 해 전부터 진행된 사드배치 전 과정은 얼마나 터무
종교는 현실 너머의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을 본래 사명으로 삼지만, 현실을 도외시 할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 가운데 전자에 대한 비전 때문에 종교를 갖게 된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주된 이유는 현실세계 너머에서 오는 힘으로 현실 속 자신의 삶이 원만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사회 속에서 성장하려면 사람들에게 현실 너머의 세계에 대한 비전과 동시에 현실에 대한 대책도 아울러 제시해야 한다. 기독교는 한국사회의 산업화 과정과 민주화 과정에서 그러한 대책을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시도가 있는 21세기에 살면서 우리는 여전히 “열심히 공부해야 잘산다.” “열심히 일해야 성공한다”는 20세기적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사업가 롭 무어가 쓴 ‘레버리지’란 책을 보면 20세기적 성공방식, 즉 제조업적 근면성과 21세기적 성공방식, 다시 말해 일을 덜하고 더 많은 성과를 내는 효율성이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사례가 나온다. 한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회사에서 1억7000만원의 연봉을 받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자신의 업무를 연간 3600만원을 주고 중국 업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