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막론하고 쥐는 혐오스러운 동물로 취급된다. 튀어나온 앞니에 긴 꼬리로 생김새가 얄밉다. 진 데 마른 데를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병을 옮기고 저장한 곡식을 약탈해 가기 때문이다. 쥐 하면 떠오르는 “찍, 찍” 소리는 간혹 불쾌한 느낌을 줄 때도 있다.그러나 이런 이미지로 인해 오히려 쥐는 특별한 영물로 추앙받기도 한다. 민간에 전승되는 쥐와 관련된 설화 등에 의하면 쥐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살아남는 근면한 동물, 미래의 일을 예지해주는 영물이었다.약 3600만년 전부터 서식해온 것으로 알려진 쥐는 1800여종에 달한다. 창고
■삼국·통일신라시대 △544년 신라 최초 사찰 흥륜사 천경림에 준공 △676년 2월 의상 스님 부석사 창건 △724년 오대산 상원사 창건 △760년 4월 월명사, 향가 ‘도솔가’지어 해가 두 개 뜬 변괴를 없앰.■고려시대 △1012년 황룡사탑 중수 △1096년 황룡사탑 6차 중수 △1216년 9월 거란병 묘향산 보현사 불태움 △1348년 태고 보우 스님 원에서 귀국 중흥사에 주석.■조선시대 △1420년 세종, 능침주위에 절 세우는 것을 금지 △1492년 2월 3일 도첩제 폐지 △1516년 11월 절의 노비와 전지를 관에 귀속시킴 △
경자년 쥐띠해를 맞아 쥐에 대한 생태 상징과 문화상 등 다양한 측면에서 쥐를 조명하는 전시가 열린다.국립민속박물관(관장 윤성용)은 3월1일까지 관내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 ‘쥐구멍에 볕든 날’을 개최한다. 통일신라시대 쥐 조각상을 비롯해 쥐를 소재로 한 부적, 대나무 병, 그림 등 자료 60여 점으로 쥐에 관한 생태와 문화상을 조명한다.1부 ‘다산(多産)의 영민한 동물, 쥐’에서는 ‘십이지의 첫 자리’ ‘다산과 풍요’ ‘영민과 근면’ 등 우리 민속에 담긴 쥐의 상징과 의미를 보여주는 자료를 소개한다. 쥐를 뜻하는 서(鼠) 자를 쓴 부
“25살 트로트 가수 바네입니다. ‘반해’의 소리글에서 따왔어요. 귀에 쏙 들어오지 않나요?”가수 바네씨의 첫 느낌은 ‘통통’ 튀는 90년대 생 그 자체였다. 언니 같은 어머니를 매니저로 대동하고 나타난 바네씨는 당차게 자신을 홍보하면서도 한없이 겸손한 자세로 인터뷰에 응했다.데뷔 5년 차인 불자 트로트 가수 바네씨는 20살 나이에 트로트 앨범을 발표했다. 이후 모태신앙이었던 불교와 인연이 이어져 산사음악회와 군부대, 교도소 등 각종 행사에서 꾸준히 활동을 펼치고 있다.예명이 독특하다는 질문에 바네씨는 프랑스 요리에서 사용하는 전문
한국불교의 역사는 곧 우리 민족의 역사다. 1700년을 이어온 한국불교에는 불교사상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와 문화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최고의 정성과 시대정신, 그리고 창의성을 바탕으로 후대에 전할 빛나는 불교문화를 일구었다. 이 같은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1700년 역사에 새로움을 더해 찬란히 빛날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을 잃지 않는다는 뜻 그대로다. 한국불교의 전통 위에 현대미술을 접목해
유·무형유산 아우른 불교문화 발굴·연구 ‘길 없는 길’ 열었다범패 발굴·무형문화재로 등재시켜 불교 문화·학문 영역 무형유산으로 확장문화재 인식 ‘성보’로 전환에 매진…성보보존위·불교미술공모전 탄생 주역2019 조계종 불자대상 수상… 동국대 불교학술원 발전기금으로 상금 회향소년의 꿈은 교육자였다. 1934년 경남 산청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은 집 앞 우뚝 솟은 황매산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그리고 지금 소년은 유·무형을 망라한 불교문화재와 불교민속학에 이르기까지 불교문화 전반에 일가를 이룬 큰 산이 되었다. 동국대 명예교수 홍윤
2018년 기준 국내 거주 이주민 수가 공식적으로 205만명을 넘어섰다. 2006년 53만명 이후, 12년만에 무려 4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집계에 포함되지 않은 미등록 체류 이주민까지 포함하면 250만명상당. 이제 한국은 명실상부 다문화사회에 진입했다고 봐도 무방하다.사실 다문화사회 진입을 앞두고 한국불교계의 역할을 모색하기 위한 고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다소 단편적이지만 당위성도 명확하다. 한국에 유입되는 이주민들의 상당수가 불교국가 출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한국과 고용허가제 양해각서를 체결한 16개 국가 중 절
2019년 5월 아산시 음봉면 신정리에 문을 연 마하위하라 사원은 한국 최초의 스리랑카 사찰이다. 이주민으로서의 설움과 아픔을 나누고, 부처님 가르침을 함께 실천할 수 있는 신행공간을 조성하자는 재한 스리랑카 불자들의 원력이 만든 결실이기도 하다. 매주 일요일마다 법회를 열어 부처님 법을 배우고, 고된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시간을 가지면서 마하위하라 사원은 재한 스리랑카 이주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아산 마하위하라 사원은 2007년 대승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에 온 담마끼띠스님이 스리랑카 유학생 11명과 결성한
인천 부평구에 자리한 미얀마불교전법사원은 희망을 품고 고국을 떠나온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에게 고향의 품 같은 의지처이자 쉼터다. 한국불교계나 본국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불사금을 조성, 상가건물 1개 층을 매입해 안착한 법당은 미얀마인들의 자부심이자 굳건한 신심의 결정체이기도 하다.미얀마불교전법사원의 역사는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 부평구 일대는 한국사회에 정착한 미얀마 출신 사업자들이나 결혼이주여성이 많아 일찍부터 재한 미얀마인들의 구심점이었다. 이들과 함께 신행활동을 이어가던 이주노동자들은 2007년 미얀마불
‘캄보디아 불교센터’는 지난 2008년 캄보디아 이주민들의 자발적 동참으로 경기도 군포시에서 문을 열었다. 6만여 캄보디아 이주민의 귀의처인 이곳은 매주 일요일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고 있다. 특히 캄보디아 주요 명절인 4월 쫄츠남(새해), 10월 프쭘번(추석), 11월 물축제 등에는 이주노동자를 비롯해 결혼이주민과 그 자녀 등 수천명이 찾아올 만큼 캄보디아 이주민들의 불교성지로 깊이 뿌리를 내렸다.불교센터 건립은 주지 린사로스님의 한국 유학에서 비롯됐다. 2000년대 초반 당시 도선사 주지 선묵 스님은 캄보디아 불교계와 다양
노동으로 꿈꾸는 코리안드림 혹은 결혼으로 한국에 거주하게 된 태국 이주민들의 애환을 달래는 귀의처는 안산에 있다. 붓다라마사원은 태국인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처음 건립됐다. 한국인 남편과 결혼한 태국여성이나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의 고됨과 고향에 대한 향수, 언어와 문화 차이에서 오는 갈등 등 애환을 풀어내는 부처님 품이다.붓다라마사원은 2010년 불심 깊은 대사 부임 후 처음 건립이 논의됐다. 태국인들의 정서적 안정과 일탈을 방지하기 위해 태국 법당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본국 사찰 큰스님과 상의하면서 불사가 추진됐다. 20
2019년 7월 천안 동남구 목천읍에 개원한 베트남불교 원오사(圓悟寺)는 국내 첫 베트남 사찰이다. 원오사는 2013년 설립된 ‘재한베트남불교공동체’로부터 시작됐다. 베트남에서 공부 중이었던 젊은 대학생 팃뜨엉탄 스님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페이지를 만들면서 시작된 이 공동체는 2014년 봄 결혼 이주민이었던 이옥빈씨가 공동체 대표를 맡으며 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1994년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왔다가 1999년 한국인과 결혼한 뒤 귀화한 이옥빈 대표는 팃뜨엉탄 스님과 온라인으로 의사소통하며 공동체를 조직해 나갔다.처음 공동체에
서울 중구 광희동 몽골 타운은 몽골인들이 틈나는 대로 들러 고향 사람을 만나고 전통음식을 먹으며 정보를 교환하는 곳이다. 1990년 한·몽골 수교 이후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 유학생들이 속속 들어오면서 국내 거주 몽골인 수는 수교 30년 만에 3만 명을 넘어섰다. 몽골에서 가장 큰 사찰인 간단사 서울포교당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다.간단사 서울포교당은 2007년 방한한 몽골 간단사 총무원장 초이담츠 스님이 한국에 포교당 설립을 희망하고, 이를 당시 조계종 종책모임인 무량회가 받아들여 후원하면서 2008년 문을 열었다. 덕분에 몽
경기도 동두천시에 자리한 네팔법당 용수사는 파드마삼바바 보살상과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한 이주민들의 보금자리다. 주지 우르겐 스님이 서울 능인선원 산하 비영리민간단체인 한국 YBA와 인연을 맺고 이주민사업의 일환으로 네팔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중, 2007년 한국 YBA와 함께 ‘네팔 법당 건립을 위한 만다라전’을 열어 그 수익금을 바탕으로 2008년 개원했다.용수사 주지 우르겐 스님은 네팔 카트만두 나가르주나 굼바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했으며 만다라 시연을 위해 한국을 처음 찾았었다. 한국불교에 매
서울 강남구 일원동 주택가의 한 건물 입구에 한글과 네팔어·영어로 동시에 이름을 표기해 놓은 ‘서울네팔법당’이 최근 사찰 이름을 ‘텍첸사’로 변경하고, 한국불교와의 교감에 본격적으로 나섰다.텍첸사는 오랫동안 경기도 마석 보광사에 머물며 한국 불교계와 인연을 맺어 온 쿤상 스님이 한국 사찰과의 교류를 기반으로 설립한 법당인 만큼 한국 불교계와의 공고한 협력관계 구축은 물론, 불단도 네팔식과 한국식을 혼용하는 방식으로 조성해 이주민과 한국 불자들이 함께 찾을 수 있는 도량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텍첸사도 다른 이주민법당처럼 네팔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방글라데시에서 불교를 신앙하는 소수민족 줌머족은 오랜 세월 종교·사회·문화적 차별과 박해를 받으면서 정치·종교적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인도, 캐나다, 미국, 호주, 프랑스 등 세계 곳곳에서 난민으로 정착하게 됐다.그들 중 종교적 신념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한국을 찾은 이들이 있다. 1992년부터 한국을 찾기 시작한 줌머인들은 1997년 ‘재한방글라데시 선주민 불자연합’을 설립했다. 그리고 2002년 불교인과 비불자까지 포함한 ‘재한줌머인연대’를 발족해 방글라데시의 인권유린을 호소하고 줌머인들의 인
초연결사회는 IT 분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국내 체류외국인이 250만 명이 넘는다는 것은 국내에서 국외로 연결된 링크가 250만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지난 12월 초, ‘한국다문화불교연합회’(이하 다불련)가 창립했다. 다불련은 외국법당을 회원으로 하는 연합체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과도 같다. 창립에 즈음하여 이주민의 역사가 가진 의미를 되새기고 그 역할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의 최초 유입시기를 1986년 아시안게임 또는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보고 있다.
매주 목요일 오후면 흥겨운 음악소리가 위례 상월선원을 휘감는다. 찬불가를 비롯해 국악, 사물놀이패까지. 박범훈 조계종 불교음악원장이 지휘하는 봉은국악합주단의 신명난 공연은 참석대중들의 박수소리와 더해져 상월선원 주변의 고요함을 깨운다. 안거 때면 문을 걸어 잠그고 발소리, 숨소리조차 엄격한 것이 일반 선원에서의 풍경이지만 상월선원은 사뭇 다르다. 이는 애초에 상월선원 결사 대중들이 조용한 산사를 거부하고 삶의 현장으로 내려와 정진하고자 했던 연유와 맞닿아있다.박범훈 원장은 “위례천막결사에 나서는 스님들이 ‘수행은 삶의 현장에서 진행
위례상월선원이 한국불교의 새로운 성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9명 스님들의 목숨 건 정진뿐 아니라 스님들을 응원하며 함께 정진하고자 찾는 스님과 불자들이 줄을 이으면서 불교계 안팎에서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상월선원이 주목받게 된 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진대중들을 뒷바라지하고, 불자들과 함께 수행을 이끄는 출재가 외호대중들의 역할도 컸다. 동안거 반결재를 맞아 상월선원 외호대중들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위례 상월선원 총도감 혜일 스님(성남 봉국사 주지)은 요즘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택지개발현장 허허벌판에 천막으로 지은
홍련암(紅蓮庵)에서 붉은 연꽃[紅蓮]을 바라봅니다. 가물거리는 어둠 헤집고 붉은 태양이 찬연합니다. 찰랑대는 고해의 물결, 그 위로 부처님 백호처럼 붉은 광명이 떠오릅니다.천년에 오백년을 더한 아득한 옛날. 신라 의상 스님이 파랑새 깃든 석굴 향해 칠일기도한 뒤 마침내 바다 위 홍련이 피어오르고, 그 빛 타고 거룩히 관세음보살이 오셨습니다.세상사 모진 풍파, 뒤집어 쓴 무진번뇌(無盡煩惱), 홍련암 상주하신 관세음보살님 자비로 녹여내고, 무심한 눈 들어 문밖 바라보니, 검은 바다 위로 한 점 붉은 연꽃입니다.찬란한 광명 안에 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