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에서 혜원(慧遠)이라는 법명으로 기억되는 스님이 두 분 있다. 동진 때의 여산혜원(廬山慧遠, 334~416) 스님과 북주와 수나라 때 살았던 정영혜원(淨影慧遠, 523~592) 스님이다. 두 스님은 황제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출가수행자로서의 기개를 지킨 스님들이다. 여산혜원 스님은 절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황제에게 부처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절을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정영혜원 스님은 북주의 무제가 스님들에게 사찰을 폐하겠다고 위협할 때 유일하게 죽음을 무릅쓰고 왕의 면전에서 잘못을 조목조목 따졌던 스님이다.이 두 스님의
조계종 종단개혁이 20주년을 맞았다. 1994년 따스한 봄, 불교계에 태풍이 불었다. 개혁의 광풍이었다. 1987년 6·10항쟁을 계기로 사회는 민주화로 향했다. 국민들은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았다. 세상은 달라지는데 불교는 바뀌지 않았다. 종권은 당시 총무원장 의현 스님에게 집중돼 있었다. 사회는 상식으로 가고 있었지만 불교는 비상식이 판을 쳤다. 민심을 얻지 못한 의현 스님은 정부권력에 기댔다. 선거 때마다 여당후보를 지지했다. 노골적인 찬양이었다. 의현 스님은 정권과 결탁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부패해 갔다.상황이 이런데도
1970~80년대 수학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방문지가 경주였다. 학생들은 선생님을 따라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고 대능원을 관람했다. 3박4일, 산과 문화유적과 공업지구 몇 곳을 돌고 아쉬움을 간직한 채 학교로 복귀했다. 시간이 제법 흐르고 나서 그때의 수학여행이 삶에 큰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선생님으로부터 견문을 넓히고 문화유산과 국토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을 수학여행의 목적이라고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수학여행이 끝나도 자부심이 생겼던 것 같지는 않다. 가봤다는 경험, 별것 없더라는 기억만이 오랫
알고 하는 잘못과 모르고 하는 잘못 중에 어떤 것이 더 나쁠까? 사회법의 관점에서 죄질을 따지자면 알고 행하는 잘못이 훨씬 나쁘다. 잘못인 줄 알면서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다르다. 모르고 저지르는 허물이 더 크다. 죄의식이 없어서 개선의 여지 또한 없기 때문이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전국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들이 열렸다. 이들 행사들을 보면서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에 대한 가르침이 불현듯 이해가 됐다. 개인의 소원이나 희망을 담아 하늘로 띄워 보낸 풍등과 풍선을 통해서다. 새해를 맞이하는 현장에서 빠지지 않는 행사가
커피열풍이 거세다. 최근에는 믹스커피로 대변되는 인스턴트커피 시대를 넘어 직접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먹는 ‘핸드드립 커피’가 유행이다. 대중화를 넘어 고급화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7위의 원두 수입국이다. 올 한해만 1인당 484잔에 이르는 커피를 소비했다. 2000년 313잔에 비해 55%가 늘어난 가파른 상승세다.세간의 커피열풍으로 불교계의 고민이 깊다. 커피열풍이 불교계에도 거세게 불고 있기 때문이다. 커피를 즐기는 스님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절 집안의 풍속도마저 바뀌고 있다. 스님들은 전통적으로
일평생 차별없는 세상위해 헌신폭동조장 혐의로 27년간 옥살이대통령 돼서도 화해·용서로 치국만델라 삶서 사회갈등 해법 찾길 넬슨 만델라(1918~2013). 그는 평생을 단 하나의 목표에 매달렸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철폐,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세계인권운동의 아버지라 불렀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인권운동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역경에 굴하지 않은 강인한 정신력과 선함에 대한 무한한 믿음, 사람에 대한 사랑과 자비, 그리고 겸손한 그의 삶은 성자의 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마하트마 간디에 비견하기도 한다. 그는 남아공 한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저 평범한 흑인청년에 불과했던 그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자신의 나라가 처한 상황에 눈을 떴다. 흑인이
정권 휘둘려 국민신뢰 잃은 검찰바로세우겠다는 김진태 신임총장부당한 권력에는 맞서 싸우면서약자엔 자비롭던 신념 잃지않길 김진태 검찰총장 시대가 열렸다. 김 총장은 12월2일 취임사에서 “정치적 중립에 대한 모든 시비를 불식시키고 오직 국민의 편임을 각인시키겠다”고 밝혔다. 김 총장이 애써 검찰의 중립을 강조하고 국민의 편임을 역설해야 할 만큼 검찰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검찰은 1년 사이 수장이 두 번이나 바뀌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지난해 11월 검찰 내부의 이전투구로 검찰총장이 사퇴했고, 올해에는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를 진두지휘하던 검찰총장이 물러났다. 이런저런 이유들이 거론됐지만 모두 정권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첫 번째가 누가 정권의 신임을 얻고
서울시 유네스코 문화유산 추진“불교전통·음식쓰레기 해결 대안”불가에서는 평등 실천하는 수행발우공양 의미 되새기는 계기로 대학시절 산사로 오리엔테이션을 간 적이 있다. 불교대학이었으니 불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어스름한 새벽, 장엄한 예불에 전율처럼 소름이 돋았다. 너무 맑아 싸한 산사의 공기를 마시며 참선할 때는 이대로 부처가 되는 것 아는가 하는 기대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산사의 체험이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발우공양은 낯설고 불편했다. 특히 발우를 씻은 천숫물을 모두 나눠마셔야 할 때는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발우공양은 공양을 마친 다음에 김치쪼가리와 천숫물을 사용해 발우를 말끔히 씻어야 한다. 그런데 그 천숫물이 더러웠다. 일부의 극렬한 반대
숭례문 부실복구로 퇴진한 변 청장여론무마 위한 정부의 정치적 결정불합리한 인사의 또 다른 단면일뿐문화재보호 신념 국민은 기억할 것 변영섭 문화재청장이 취임 8개월만에 경질됐다. 정부는 숭례문 부실복구의 책임을 물었다고 했다. 숭례문은 대한민국 국보1호다. 이명박정부 출범을 앞둔 2008년 2월, 방화로 훼손되자 국민적인 성원을 모아 5년에 걸쳐 복구했다. 지난 5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완공을 알리는 기념식도 열었다. 그런 숭례문이 반년도 안 돼 단청이 떨어지고 기둥에 금이 가는 등 부실복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변 전 청장을 신속하게 경질해 국민을 달랬다.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의 관리와 보수를 책임지는 행정책임자다. 이런 의미에서 박 대통령의 결정은 국민정
불교미래위해 재정 확충은 필요종단재정 부족 불법서 멀어진탓세간의 셈법에 몰두하기 보다는대만불교 재도약 이유 살펴보길 447억원. 내년도 조계종 예산이다. 최근 열린 조계종 중앙종회는 2014년도 종단예산을 이렇게 결정했다. 전국의 사찰에서 분담금 형식으로 보내오는 정재를 모은 것이다. 결코 적은 것도, 허투루 쓸 수 있는 재원도 아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자랑한다는 불교의 장자 종단, 조계종의 1년 예산으론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종단 차원이 아닌 단일교회로 매년 1200억원의 예산을 집행하는 현실을 보면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이런 우려 때문인지 조계종 총무원장에 재임된 자승 스님은 선거운동 당시 임기 내에 종단
한 스님의 일탈행위 교계에 충격여론불구 참회 없고 변명만 일관승복만 입었다고 승보 될 수 없듯더 이상 불자들 한숨 묵과 말아야 최근 본지가 보도한 한 스님의 일탈행위가 종단 내에 크게 회자되고 있다. 야심한 시각 여성과 함께 호텔에 들어가는가 하면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술집에서 자정을 넘긴 시각까지 여성과 함께 단둘이서 술을 마시는 범계행위로 불자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스님은 당시 여성과 더불어 만취상태였다고 한다. 일부 스님들의 일탈행위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새삼 이 스님이 주목받는 것은 종단 내에서 차지하는 무시할 수 없는 위치 때문이다. 이 스님은 세간의 국회격인 조계종 중앙종회의 다선 의원이다. 상임분과위원장이라는 중책도 맡고 있다. 지난 9월, 34대 조계
첫 주한 프랑스대사 샹바르유언에 따라 해인사에 묻혀한국불교에 대한 깊은 애정정갈한 정신·문화 때문일 것 로제 샹바르(Roger Chambard). 그는 과거 한국에 파견됐던 첫 프랑스 대사였다. 1959년 주한 프랑스 대사로 부임해 꼬박 10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당시 한국은 참으로 볼품없었다. 한국전쟁은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 국민이 몸부림치던, 회색빛 가득했던 그 시절의 기억 속에 그가 있다. 그는 가난한 한국을 위해 프랑스 자본과 기술을 끌어와 팔당댐 건설을 도왔다. 한국을 위해 남다른 노력과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외교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는 1982년 타계했다. 이미 30년이 지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