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대표하여 파견된 지앙 장군을 만난 후 달라이라마는 피난처인 트로모에서 수도인 라싸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그 나름 정중했던 중국군의 태도가 1951년 10월 갑자기 변했다. 참도에서 티베트군을 진압했던 중국군 3000명이 라싸로 진입해온 것이다. 그들은 중국군에 협력하는 티베트인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 얼마 후 중국군의 규모는 2만 명으로 증강되었다.그 무렵 중국군은 자신들이 티베트와 맺은 ‘17개 조항’을 지키는 듯했다. 그 협정에 따르면 인민해방군은 정당한 매매행위를 통해 물품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중국군은
제14대 달라이라마는 1935년에 티베트 북동부 변방인 암도에 있는, 스무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 탁최에서 소작농인 아버지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분’으로 기억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열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중 일곱이 살아남았다. 어렸을 때 그의 이름은 라모 툰둡이었으며 나중에 달라이라마가 되면서 텐진 갸초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그가 세 살이 되어가던 때, 제13대 달라이라마가 서거한 후 정치를 맡고 있던 섭정 정부는 서거한 달라이라마의 환생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떤 아이가 전대의
달라이라마(Dalai Lama) 14세는 불교 역사상 불멸 후 이백여 년 후의 아소카대왕(?~BC 238) 이래로 가장 위대한 전법자이다. 불교의 교세 확장은 부처님께서 직접 행하신 45년간의 전법, 아소카 대왕에 의한 인도 전역으로의 확장 및 스리랑카로의 전파, 대승불교의 흥륭, 대승불교의 북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산 등 단계를 거치면서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여러 불교인들에 의해 유럽과 미국 등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불교가 확산되고 있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전법자는 달라이라마이다.가장 먼저 부처님 당시의 전법은
한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다. 경전에 그녀의 이름이 전해져 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지어 수다나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녀는 라자가하에 사는 한 부자의 딸이었다. 결혼할 나이가 되자 그녀의 부모는 그녀로 하여금 함부로 외출을 할 수 없도록 높은 집을 지어 그 꼭대기층에 머물도록 했다. 어느날 저녁, 수다나는 창가에서 밖을 내려다보다가 사냥한 사슴들을 팔려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한 청년을 보았는데, 그의 이름은 꾹꾸따밋따였다. 수다나는 꾹꾸따밋따에 대한 사랑의 염을 느꼈다. 그녀는 하녀를 시켜 청년이 언제 성에서 나오는
1979년 봄, 미치 앨봄은 매사추세츠 월섬시에 있는 브랜다이스대학을 졸업했다. 그에게는 모리 슈워츠라는 은사가 있었다. 슈워츠는 청록색 눈동자를 가진 교수로, 귀가 크고, 코는 삼각형이며, 청록색 눈동자가 숱이 많은 잿빛 눈썹 아래에서 빛나는 은발의 노신사였다.“계속 연락할 텐가?”하고 모리 교수가 물었고 “물론이지요”하고 미치가 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오랫동안 미치는 모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삶은 한가로운 게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그 한가롭지 않은 삶의 한복판에 뛰어든다는 것이고, 그곳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안
춘추시대, 우(虞)나라는 강대국인 진(晉)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약소국이었다. 언제 진나라가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우공은 그 역시 약소국인 괵(虢)나라와 화친을 맺고 만일의 경우 서로 구원하기로 맹약하였다.괵공은 성정이 교만하고 싸우기를 좋아했다. 그가 자신보다 약한 주변 지역을 약탈하자 침략당한 지역 사람들이 진나라에 가서 괵국을 토벌할 것을 청했다. 진헌공(晉獻公)이 순식(荀息)에게 대책을 묻자 순식이 말했다.“우국과 괵국이 서로 화친을 맺고 있는 상태에서 괵을 칠 수는 없습니다. 먼저 괵국의 힘을 약화시켜야 합니다.
키케로(Cicero, BC. 106~43)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요, 연설가이자 저술가이다. 하지만 그는 정치가로서는 당대의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에 미치지 못하고, 철학자로서는 전대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연설가이자 저술가로서, 그는 위대한 서양인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큰 업적을 남겼다.원로원 계급 다음을 차지하는 기사 계급 신분으로 태어난 키케로는 법정에서의 변론으로 이름을 떨쳤다. 또한 그는 로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연설가이기도 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이름을 떨친 웅변가는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은 세가지 위격으로 분별된다. 첫번째 부처님은 무상정등각자, 두번째 부처님은 벽지불, 세번째 부처님은 아라한이다. 세 부처님은 똑같은 내용의 깨달음을 성취하지만 법을 펴실 때의 범주와 기간이 다르다. 그것은 그분들이 지은 전생 공덕에 따라 결정된다.무상정등각자로서의 부처님은 까마득한 과거 전생부터 어마어마한 공덕을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전인류에게 전파된다. 그러나 벽지불의 가르침은 짧은 기간 동안 작은 지역에서만 전파되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사성제와 연기법을 깨달
책을 낸 작가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동식씨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김동식씨는 20년 전 중학교 1학년을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무언가를 배운 적이 없는 작가다.집안 형편이 어려워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학교가 싫어서 공부를 그만뒀다. 학교 공부를 별로 잘하지 못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선생님들은 학생을 야단친다. 그게 싫었다. 아무도 나를 야단치지 않는 PC방에서 게임을 하며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닥치는
신라의 김춘추(金春秋·604~661)는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라 태종무열왕이 되었고, 매제이자 사위이기도 한 장군 김유신(金庾信·595~673)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신라 선덕왕 11년에 백제가 대량주를 공격했는데, 그 전투에서 그곳을 지키던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 아내와 함께 죽었다. 김춘추는 이 일을 통탄하여 백제를 치고자 하였으나 신라의 역량은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고구려를 설득하여 함께 백제를 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구려로 떠나기에 앞서 김춘추는 김유신에게 만일의 사태가 생
살라딘(Saladin)은 이슬람권 술탄(왕)들 가운데 다른 문화권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137년에, 제2차 십자군 전쟁 때 다마스쿠스 방어군 사령관으로서 유럽군을 패퇴시킴으로써 그 지역 총독이 된 아이유브의 아들로 태어났다. 얼마 후, 그 일대의 통치자였던 누레딘은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겼고, 어린 살라딘은 누레딘의 사랑을 받았다.당시 이집트는 300년 전에 성립한 파티마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 왕조는 시리아, 수단, 아라비아반도까지 진출했다. 왕조의 칼리프는 알 아디드였는데, 심신이 허약한 인물이었다. 그에
비구 말룬캬풋타는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서 명상을 수행하던 중에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일으켰다.‘세존께서는 수많은 주제에 대해 설법하시지만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설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은 항상됨이 있는가 없는가, 세계는 한정이 있는가 없는가, 목숨은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는가 없는가,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등이다.’그는 이어서 생각했다. ‘나는 이것이 궁금하다. 그런데도 세존께서는 이것들에 대해 설하시지 않는데, 나는 그것을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