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슬 퍼런 선의 지극한 경지 드러내한양의 사대부들에게 깊은 영향 끼쳐 수종사에서 바라본 두릉. 이곳 수종사에서 초의 스님은 지우(知友)들과 시를 교유하면서도 절경에 얽매이는 스스로를 자조하기도 했다. 초의 스님과 인연 깊은 운길산 수종사(水鐘寺)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암자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되는 곳에 두릉이 섬처럼 떠 있어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다산 생가 옆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 초의 스님은 유산의 형제들과 이 강가에 조각배를 띄우고 서로의 속 깊은 정을 나누기도 하였고 한양의 지체 높은 인사들과도 교유했다. 수행승과 달사(達士), 뜻 맞는 지기(知己)의 걸림이 없는 종유(從遊)의 아름
장안 사대부와 본격적인 교유 계기용문사 대웅전 현판 추사 글씨 확인 1830년 겨울, 초의 스님은 이곳 용문사에 머물며 ‘쓸쓸한 용문산 아랫길 옛 절터에는 시골사람이 밭을 갈고 있네(惆悵龍門山下路 寶坊遺與野人耕)’라는 시를 읊었다. 경전을 외는 소리 낭자했을 옛 절터에서 고단한 삶을 위해 밭을 갈고 있는 농부. 그 교차되는 시공간 속에서 초의 스님이 느낀 무상의 무게는 얼마였을까. 초의 스님이 두 번째 상경 길에 오른 것은 1830년 겨울이다. 그는 스승 완호 스님이 열반하자 2년 후 완호탑을 완성하고 이 탑의 음기를 썼다. 다시 2년 뒤 그는 스승의 탑명을 구하기 위해 상경한 것. 실로 15년 만에 다시 한양을 찾은 셈이다. 최근 발굴된 『주상운타(
1815년 초의 스님이 평생지기 추사를 처음 만난 학림사. 초의 스님과 추사의 만남을 지켜보았을 600년 된 반송이 지금도 학림사를 지키고 있다. 사진=도서출판 동아시아 제공 수락산 학림암은 초의 스님이 첫 상경에서 평생지기 추사를 처음으로 만난 곳이다. 이 암자는 초의와 추사의 교유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수락산은 도봉산과 북한산을 마주하고 있다. 간간히 드러난 화강암 암벽이 단아하고 신비로운 산. 수락의 넓은 품은 동쪽 사면에 금류계곡과 서쪽으로 쌍암사, 석림사를 품고 남쪽으로 계림암, 흥국사를 끼고 있다. 학림암은 덕능고개에서 불암산으로 이어지는 남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암자인데 지금은 학림사라 부른다. 1861년 가을, 초의 스님이 쓴 ‘제해붕
‘채산기행’ 등 탈속한 삶의 자취 곳곳에다산 요청으로 월출산을 화폭에 담기도 초의 스님이 다산의 부탁을 받아 직접 그린 월출산 ‘백운도’. 이 그림은 젊은 시절 초의 스님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대둔사(현재 대흥사)는 남도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묘향산 원적암에서 앉은 채로 입적한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진 곳.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이끌고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했던 그의 공을 기린 표충사에 정조의 친필 사액이 내려졌다. 조선시대에 승려의 사당을 만들어 나라에서 제물물목을 하사하는 곳이 어디 그리 흔한 일이었으랴. 서산대사의 양대 제자 편양과 소요가 이룩한 대둔사의 수행 기풍은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할 만큼 조선 후기 불교계를 주도했다. 대둔사. 이곳은 초의 스
아암 스님 소개로 다산과 인연 시작돼다산에 대한 존경심 행간마다 오롯이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 호남의 소금강 혹은 5대 명산 중 하나로 손꼽이는 월출산(月出山)은 소백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백제시대에는 월나산(月奈山), 고려시대에 월생산(月生山)으로 불렸던 곳. 조선시대에 다시 월출산으로 개명된 신령한 산이다. 달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 산 이름마저 월출인 웅장하고 당당한 산. 여기에서 초의 스님은 개오(開悟)했다 전해지는데 그가 이 산에 오른 것은 운흥사에서 쌍봉사로 잠시 거처를 옮긴 1806년경으로 짐작된다. 범해의 『동사열전』 「초의선백전」에 “19세가 되던 해 월출산에 올랐다가 마침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광경을 보고 밤늦게까지 졸지 않고 앉아
신기리의 신동…15세에 운흥사로 출가사대부들 약관의 초의 스님 詩才 찬탄 초의 스님이 출가했던 나주 운흥사 전경. 몇 년 전까지도 폐사지 같던 사찰이 이제는 제법 절다운 규모를 갖추고 있다. 초의 스님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율사이요, 선승이며 시문에 밝았던 수행승이다. “여섯 개의 별들이 어머니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후, 그가 태어났다”는 『동사열전』의 얘기는 범상치 않았던 그의 됨됨이를 드러낸 것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전남 무안군 삼향면으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삼향면 구산(舊山) 근처에 마련한 새집에서 보낸 듯하다. 그의 출가 동기가 무엇인지는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다. 15세에 고향을 떠나 나주 운흥사의 벽봉 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그가 고향의 옛 집을 찾은
스님 남긴 시문·편린들과당대 문인들 자료 토대로 초의 스님 탁견과 이상수행자로서의 면모 조명 초의 스님이 40여 년 머물렀던 해남 일지암. 올해로 차를 만들고 연구한지 삼십년이 되었으니 한 세대를 훌쩍 넘긴 셈이다. 그동안 모은 자료를 토대로 초의(草衣, 1786~1866) 스님의 차에 대한 연구도 한편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완성했다. 이제 비로소 차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단계가 아닌가 싶다. 초의 스님의 차에 대한 논문을 끝낸 후 그와 인연이 있는 곳을 따라 꼼꼼히 현장을 답사해 보고 싶었다. 19세기 초의 스님이 살았던 시기와 지금은 많은 변화를 거치는 동안 그와 인연이 있었던 곳도 지형이 변화하고 사람도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산하는 여전히 옛 모습 그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