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는 자비를 남을 위한 선행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자비는 나를 위한 길이다. 자비는 연기에서 비롯된다. 연기를 깨닫고 나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뿐만 아니라 모든 타자들,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 우주의 구성 성분들 모두가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다.” 모든 중생의 고통을 보듬어 안기 위해 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손을 펼쳤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사라지는 것이/강은,/안타까왔던 것이다./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몸을 바꿔 흐르려고/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그런 줄도 모르고/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강은,/어젯밤부터/눈을
“자비란 그리 거룩한 길이 아니다. 누구든 다른 이의 무게를 느끼고 그를 달갑게 맞으면 그것이 곧 자비의 길이다. 자비란 나 아닌 다른 이의 무게를 느끼는 데서, 나는 홀로 아무 것도 아니며 상대방이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에 남아있는 이 거대한 석면불은 미소를 가득 머금은 관세음보살. 캄보디아 사람들이 생각한 충만한 자비의 얼굴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 동물이다. 자신, 자신의 범주에 들어온 자신의 형제와 자식과 부모가 잘되고 잘 살기를 원한다. 오로지 나만이, 나의 가족만이 남보다 더 출세하고,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남보다 더 많은 재물을 갖기를 원한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자기의 것을 채우고, 남을
내가 이미 불성을 품고 있으니 티끌만 거두어 버리면 청정한 하늘이 보이듯 무명에서 벗어나면 곧 바로 부처가 드러난다. 그러니 내 몸이 곧 부처요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바로 불국토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유적은 옛 사람들이 상상하던 수미산 위의 극락을 지상 위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향가 기행을 떠나자는 제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경주 남산을 찾았다. 용장골 어디쯤으로 기억한다. 호젓하게 완상하자는 욕심으로 일행을 저만치 따돌리고 바위에 새겨진 불상을 찾았다. 바위에 새겨진 불상의 선을 따라 눈을 옮기다가 불상 앞에 처음 섰을 때보다 더한 감동에 아무 말도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거기 너무도 푸른 하늘이 바위를 이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푸름을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는 곳이 고향이라면 한 번 가면 누구든 되돌아오지 못하는 곳이 극락이다. 육신을 이고 가서 육신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곳이 고향이라면, 영혼이 비상하여 영혼의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곳이 극락이다” 진정 고향이 그리운 이유는 그곳에 어린시절 나와 함께 했던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대한민국불교사진연합회 허건영 회원의 작품 ‘동자승의 나들이’. 현대인의 삶의 소외와 고독의 연속이다. 우리 집 창으로 관악의 푸른 능선이 보이고 집 안에 아내가 한 달 이상을 걸려 한 땀 한 땀 수놓은 전통 보자기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어느 동네의 몇 평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듯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대체하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아미타삼존판불은 화려한 신라의 미술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토왕생을 발원했던 신라인들의 기원은 솔직하고도 소박했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우리들 삶은 화로에 떨어지는 눈과 같다. 그 찰나의 순간, 덧없이 사는 삶이기에 서럽고 슬플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들 생의 모습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다.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좀더 달콤한 향락을 맛보고자 우리의 욕망은 이글거린다. 그 불을 재조차 남김없이 소멸시키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달아 이제/서방 거쳐 가시리잇고/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여쭙는 말씀 함씬 사뢰소서//다짐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두 손 모아 합장하옵고/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아무리 부자라도 고통은 있다. 아무리 돈이 많다 한들 부족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삶은 고통의 연속이고, 그리 고통 속에 지내다 결국 죽을 것을 생각하면 서럽다. 나도 서럽고 너도 서럽다. 우리도 서럽고 천여년 전 신라인들도 그 서러움을 느끼고 그를 벗어날 길을 모색하였다. ‘신라의 미소’로 불리는 ‘웃는 수막새’는 경주 영묘사터에서 출토됐다. 영묘사는 공덕을 지어 극락에 왕생하길 발원한 수많은 백성들의 노동으로 완성됐다. 오다 오다 오다/오다 설움 많아라/설움 많은 우리네여/공덕 닦으러 오다 향가 중 ‘풍요’다. 신라 선덕여왕 때 양지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은 재주가 많고 덕이 많아 지금 경주 두두리들 자리에 영묘사를 짓고자 장육존상을 모시러 하
“무지개는 꿈과 이상이며, 강철은 현실의며 의지이다. 극한의 절망적 상황에서도 작가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확고하며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조국 독립의 꿈을 꾸는 것이다.…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강철처럼 단단한 의지로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중생과 더불어 살기 위해선 전적으로 나를 버려야 한다. 사진은 작가 여동완 씨의 ‘비가 오는 중에도 오체투지를 하는 순례자들’. 일찍이 시인 윤동주는 노래하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 가야 겠다.//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육바라밀이란 다름이 아니다. 모든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지언정 자식은 결코 부모와 같지 않다. 경험을 통해 완성되지 않은 부분들을 채우며 끝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사진은 불교사진연합회 회원 김우영 作 '난 심심해'. 아들을 키우다보니 유전자라는 것에 새삼 감탄한다. 지능지수뿐만 아니라 성격에서 버릇까지 똑같다. 별스런 것까지 유전자에 다 있어 어느 때엔 등골이 오싹하기까지 하다. 나의 체세포를 떼어내 복제인간을 만들면 그들은 똑같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상당하지만, 분명 경험을 통하여 학습하고 깨닫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재수를 하지 않았어도 겸손한 인간이 되었을까. 내가 치매를 앓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지 않았어도 실존적 자각을
모든 아름다운 것은 사라지기에 더욱 빛난다. 연꽃이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면 누가 그 아름다움을 찬탄할 것인가. 사진은 불교사진연합회 회원 박익진 씨의 사진 ‘겨울 연밭’ 봄날은 갔다. 그리 산천을 흐드러지게 수놓던 꽃들은 모두 지고 없다. 6월, 여름이 왔다. 녹음 짙은 숲을 바라보며 봄날의 회한에 젖고 싶은 가슴엔 지훈의 ‘낙화’가 제격이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주렴 밖에 성긴 별이/하나 둘 스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머언 산이 다가서다.//촛불을 꺼야 하리./꽃이 지는데//꽃 지는 그림자/뜰에 어리어//하이얀 미닫이가/우련 붉어라.//묻혀서 사는 이의/고운 마음을//아는 이 있을까/저허하노니//꽃이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 괴테는 “하
죽지랑은 빼어난 용모의 화랑이었다. 아마도 그의 얼굴은 경주 곳곳에 남아있는 불상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 흐드러지며 절정을 이루면서 산천을 수놓던 꽃들이 진다. 신록들이 처음의 푸름과 신선함으로 어루만져 주지만 온 세상을 생기로 번쩍이게 하던 그 새잎들도 곧 낙엽이 되어 하나 둘 사위어 가리라. 울고 싶은 만추의 하루다. 늦은 봄날 천여 년 전의 신라에서도 무상의 슬픔을 절절하게 노래한 이가 있다. 지나간 봄 다일 것이매/안 계실사 울 시름/두두룩함이사 좋아 끼치신/얼굴이 해를 셀수록 헐어가는구나//눈안개 돋을 지경의/만나기 어찌 상상이나 하리//郞이여! 그리는 마음에 가올 길/누추한 거리에 잘 밤 있으리. 신라 효소왕(孝昭王: 692~702
용장골 마애불은 평범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옛 신라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펼쳐질 정토까지 이어지는 곡선의 시간이 어우러져 있다. 시간은 우리의 삶에 깊이 스미어 있다.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이 통째로 변할 정도로. 허기진 그리움에 떨다/용장골 부처 앞에 서면/바위 속 부처는/달빛과 어울려/춤을 추다가/또 춤을 추다가/빛 되어 정토로 오르고//달도 멈추는 그 찰나/九世가 하나. 필자가 지은 ‘시간’이라는 시다. 경주 남산 용장골 마애불상은 원융미(圓融美)와 질박함이 어우러진 불상이다. 질박하면 미천하고 원융미가 빼어나면 온화함과 평안함을 잃기 마련인데, 이 불상은 거룩하면서도 소탈하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그시 감은 눈과 수려하게
「목민심서」를 저술한 다산 정약용의 생가. 자살하는 사람들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불행과 고통 속에서도 삶을 영위한다. 남편을 암으로 떠나보내고 난 후 유일하게 기댄 자식마저 교통사고로 잃고 몸마저 동네 폭력배에게 유린당한 여인마저 살아간다. 산다는 것이 죽음보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눈덩이처럼 빚만 쌓여가는 살림 속에서도, 곧 과로사로 죽을 정도로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수모와 멸시와 조롱과 천대 속에서도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늘 고통인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은 물론 가족과도 거의 매일 싸우면서도 사람들은 “다들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난 때는 알아도 언제 죽을지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부조리하다. 누구나 이상과 꿈을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