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윤리적인 종교이다.’이 제목을 본 일부 독자들은 분명 기이하게 여길 것이다.‘그럼, 윤리적이지 않은 종교도 있나? 나쁜 짓 하라고 시키는 종교가 어디 있어.’옳은 말이다. 비윤리적인 종교를 어찌 종교라 이름 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굳이 불교의 특징으로 윤리를 든 것은, 많은 종교들 가운데서도 불교는 특히 철저하게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악행의 금지와 선행의 권장. 이 세상에 태어나 철이 들 무렵부터 집에서는 부모님으로부터, 학교에서는 선생님으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듣고 살아왔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지키고 살아가야 할 도덕적 가르침이다. 이렇듯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가르침을 불교 경전에서는 수없이 반복한다. “악행은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악행을 저지
수계식에서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결의는‘계체(戒體)’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 수계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고, 이후 그 사람이 불교도로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해 주는 하나의 길잡이가 된다. 그런데 수계식을 통해 얻은 계체는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다. 계를 받은 후,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계체의 힘이 약해질 수도 혹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수계식이 거행되는 동안에는 앞으로 불교도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노라 가슴 벅찬 결의를 하지만, 수계식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여러 가지 유혹 앞에서 그 결의는 눈 녹듯 서서히 사라져 간다. 재가불자의 불도(佛道) 실천법을 다루는 몇몇 경전들은, 수계 후 계체의 힘이 약해지거나 아예 잃어버릴 경우를 전제로 그 후의 실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
며칠 전에 반가운 메일 한통을 받았다. 2년 전 쯤, 필자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 보내 온 새해인사 메일이었다. 속 썩이는 자식이 효도한다 했던가, 그 당시는 통제가 안 될 만큼 산만한 청강 태도로 필자의 마음을 그리도 상하게 하더니, 언제부터인가 가끔 소식을 전하며 안부를 묻곤 한다. 이번에는 얼마 전에 받은 수계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동안 사이비 불교신자로 살다가, 최근 어머니가 다니시는 절 주지스님의 권유로 계를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괜히 계를 받은 것은 아닐까 요즘 들어 후회막급이라고 했다. 이유인즉, 계를 받고 나니 그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신경 쓰이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술 한잔 할 때도 왠지 찜찜하고, 친구에게 장난삼아 하던 거짓말도
“계율이란 말을 듣기만 해도 왠지 숨이 막혀요.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그럼 뭘 하면서 살라는 거예요?”주변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불평이다. 이 불평 속에는 계율이란 출가수행자들이나 지키면 그만이지, 왜 우리 같은 재가불자까지 그 속박 밑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잠재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계율=출가수행자의 율’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계율이란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계율이란 계와 율이라는 두 말이 합쳐져 이루어진 용어인데, 이 합성어는 빨리어나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는 그 용례를 발견할 수 없다. 즉 중국에서 한역되는 과정에서 계율이라는 합성어가 생겨나고, 한국이나 일본불교도 이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계율이라는 표현이 크게 잘못되
새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가지 계획을 세우며 새로운 삶을 다짐하곤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 담배를 끊어야지, 운동을 해야지 등등. 지난 한 해 동안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못했던 점 등을 고쳐, 새해에는 좀 더 멋진 모습으로 거듭 나 보겠다는 참으로 가상한 생각이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이 가상한 생각은 작심삼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하루 이틀은 의욕으로 불타지만, 몸은 곧 게을러지고 마음도 적당한 핑계거리를 제공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켜 준다. 필자 역시 작심삼일녀다. 그래서 요즘 삶에 크고 작은 자극을 주는 책들을 틈나는 대로 뒤적거리며 스스로를 바꿔 보고자 노력 중인데, 흥미롭게도 이런 종류의 책들이 성공의 비결이라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좋은 습관’이다. 생각해 보면, 새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