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소리를 들으면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떤 소리를 들으면 시끄럽다고 느낀다. 하지만 아름다운 소리와 시끄러운 소리를 가르는 명료하고 뚜렷한 기준은 없다. 예전에는 ‘화음’이라고 불리는 소리, 즉 ‘음악적 소리’와 화음 아닌 소리, 즉 비음악적 소리가 음정 같은 개념에 의해 명료하고 뚜렷하게 구별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초기 ‘현대음악가’인 에드가 바레즈(Edga Varèse)는 망치질 하는 소리나 사이렌소리도 음악적 소리로 사용하고, 소닉 유스(Sonic Youth)나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
연기법은 어떤 것도 그것이 기대고 있는 연기적 조건에 따라 본성이 달라진다고 설한다. 본성이 달라지니 규정도 달라질 것이다. 가령 달걀이 어미의 따뜻한 품속에 들어가면 병아리가 되겠지만, 냄비의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면 삶은 달걀이 된다. 똑같은 달걀이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한 생명체의 ‘알’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음식물의 재료다. 다른 본성을 갖고 다른 규정성을 갖는 것이다.달걀이 한 생명체가 됐다가때론 식재료가 되는 것처럼모든 규정은 조건이 만들어조건 지우면 뭐라 할 것 없어그런데 그런 연기적 조건에 처하기 이전이라면 어떨까? 어
이런 횡단적 사고의 방법을 흔히들 말하듯 ‘변증법’이라고 해도 좋을까? 변증법 또한 유와 무, 동일성과 차이 같은 상반되는 대립개념이 서로를 전제하고 필요로 함을 말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이항적인 대립개념을 ‘종합’하여 더 ‘높은’ 단계로 고양시키며 ‘지양’한다. 두 대립개념을 종합하여 제3의 것을 만들어내곤, 그 안에다 이전의 두 범주를 보존해둔다. 그런 식으로 대립되는 두 개념을 ‘화해’시켜 종합적인 중간을 만들곤 거기에 ‘더 높은 것’의 자리마저 부여한다. 반면 중도의 횡단적 사유는 두 개의 이항적인 개념 모두가 무의
사회적인 영역으로 들어서면, ‘양변’이라고 명명된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가령 여장을 한 남자는 남녀의 양변을 넘어서 있다. 물론 그가 ‘정말’ 남자인지 여자인지 명료하고 뚜렷하게 구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참과 거짓을 가려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그가 왜 남자이면서 여장을 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저 거기다 ‘거짓’이나 ‘악’과 같은 범주를 들씌우고 말뿐이다. 사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자이면서 남들과 다르게 여장을 했다는 점이고, 그렇게 한 이유를 아
개별 악기에 집중하다보면오케스트라 소리를 놓치듯중도는 명료‧뚜렷함을 위한인식의 극단 넘어선 상태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인식이나 판단의 ‘명료함과 뚜렷함’을 진리의 기준이라고 말한다. 명료함(clearness)이란 개념이나 인식의 내포가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뜻하고, 뚜렷함(distinctness)이란 외연이 확실하여 내부와 외부가, 그에 속하는 것과 속하지 않는 것이 확연하게 구별됨을 뜻한다. 가령 여자 옷을 입은 남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의심스럽다는 점에서 명료하지 않기에, 남성임을 가린 ‘거짓’에 속
도를 깨친 이가 아닌 한, 자신의 척도를,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게 옳은 생각이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일수록 내려놓기 어렵다. 도를 체득하지 않고선 분별을 떠나 사는 건 불가능한 걸까? 적과 동지를 가르고, 호오미추를 가르는 동물적 본성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예술이란 관념을 버리면모든 것이 예술이 되듯이분별 떠난 분별 가능하면모든 존재 의미 볼 수 있어흔히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대개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 익숙한 것, 숙
모든 분별은 척도를 갖는다. 좋고 나쁜 것을 가르는 기준, 정사미추를 가르는 기준이 없다면 분별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좋다고 끌어당기는 것이나, 싫다고 밀쳐내는 것이나 모두 척도의 힘에 의한 것이다. 분별이란 그 척도의 힘, 척도의 권력을 실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힘이나 권력이란 말은 결코 은유나 과장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쁜 얼굴에 대한 분별의 척도는 턱을 깎고 코를 높이는 물리적인 권력마저 행사한다. 연애도 취업도 그 예쁜 얼굴에 맞추어야 쉬워지기 때문이다. ‘남자다운 남자’가 되기 위해선 엔간한 일엔 눈물을 흘리지 않아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가려 선택하지 않으면 될 뿐이니라(至道無難 唯嫌揀擇).” 3조 승찬 스님이 쓴 ‘신심명’의 첫 문장이다. 조주 스님이 자주 언급하여 더 유명해진 문장인데, 100칙으로 된 ‘벽암록’에는 이 문장과 관련하여 조주 스님이 등장하는 공안이 4번이나 등장한다. 그중 하나는 달마대사 얘기에 이어 제2칙으로 언급된다. 가려 선택함(揀擇)이란 선악호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옳은 것과 잘못된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도’라고 명명된 지혜는 선악호오, 미추정사(美醜正邪)를 분별하지 않는 것을 요체로 한다는 말이다
모든 중생은 공동체다. 각각의 중생이 공동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각각의 중생들이 어떻게 생존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공동체란 구성요소들의 공생체다. 즉 뜻하지 않은 ‘소화불량’으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미생물의 공생은 이런 공동체들이 어떤 원리에 따라 구성되고 유지되는지를 보여준다. 잡아먹으려는 행위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그게 실패한 이후, 홍색세균은 자신을 잡아먹으려던 넘에게 에너지를 생산해주고 그로부터 영양소를 얻는다. 그러면서 미토콘드리아라는 소기관이 된다. 잡아먹은 넘은 반대로 영양소를 주면서 에너지를 얻는다. 어느
개인과 전체, 개체와 집단, 혹은 개인과 공동체는 근대 사회의 정치나 경제는 물론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대립개념이다.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는 그런 대립을 표현하는 이념적 지향의 대표적인 이름이다. 그리고 이런 지향은 인간의 본성, 아니 생물의 본성과 결부되어 이해되기도 한다. 가령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은 인간이란 이기적 본성을 가진 존재임을 가정하며, 다른 생물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반면 ‘전체란 부분의 합을 넘어 선다’고 보는 이들은,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서 행동하는 인간이나 생물들의 사례를 주
존재 그 자체가 편안함이 아니라 긴장을 선물하는 경우도 있다. 전에 어떤 건축가는 대학에서 미스 반 데어 로에라는 유명한 대가에게 배울 기회가 있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내 이름도 몰랐겠지만, 나는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만들려는 것이 그의 눈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긴장과 집중을 했고 그것이 내가 건축가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비약의 계기가 되어주었다.” 편안함이 아니라 긴장을 주었지만, 미스는 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을 준 것이다. 자신이 준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는 채, 누구에게
타얼사만큼은 아니지만, 불화의 주인공인 보살들 역시 화사하게 성장(盛裝)한 차림에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다. 가령 일본 카가미(鏡) 신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는 내가 본 어느 그림보다도 아름다운 그림인데, 거기서 관음보살은 옷부터 목걸이와 관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다. 이는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불상들이 수행자의 더없이 소박한 복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알다시피 보살이란 ‘보시’의 이타행과 짝이 되어 대승불교의 전면에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다. 정확하게 ‘선물’ 내지 ‘증여’를 뜻하는 보시는 육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