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이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중생이다. 중생이라고 해도 이 마음은 줄어들지 않으며, 부처가 된다고 해도 이 마음은 늘어나지 않는다. 6바라밀과 만행의 공덕을 본래 구족하고 있으므로 굳이 수행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인연을 만나면 베풀고, 인연이 다하면 곧 고요해질 뿐이다. 만약 이 마음이 반드시 부처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형상에 집착해 힘써 정진해서 뭔가 구하려고 한다면, 이는 망상에 빠진 것이요, 도와는 어긋난다. 세상 모든 것 마음이 만들어마음변화 따라 세상 움직여일상 그대로 불교적 삶이요깨달아 있는 부처로서의
수천년 출가해 수행한 이유부처와 성품 같다 믿음 때문황벽 스님의 주요 가르침은부처·중생 성품이 모두 일심원문:선사께서 배휴에게 말씀하셨다. 부처와 더불어 일체중생은 오직 마음이요, 다른 법이 없다. 이 마음은 무시이래 생겨난 것도 소멸되는 것도 아니고, 푸르거나 누런 것도 아니며, 형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유ㆍ무에 속박되지도 않으며, 옛것이니 새것이란 것도 아니고, 길거나 짧은 것도 아니며, 크고 작은 것도 아니다. 명칭이나 언어로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으로 그 당체가 곧 진실함이니, 생각을 일으키면 어긋난다. 마음은
중국 근현대 허운(1840~1959) 선사는 법문을 하실 때, 간혹 제자들에게 사과를 하였다고 한다. 승려들이 법을 설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는 본성을 구족하고 있는데, 주칠법사(主七法師)로서 법문을 할 수 밖에 없고, 법문이 오히려 제자들의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소납이 신문 지면을 통해 황벽의 수승한 선리(禪理)를 어긋치는 것은 아닐까? 심히 염려된다.황벽이라는 스님의 법호출가지 황벽산에서 유래훗날 임제 스님으로 법통구산선문과도 같은 법맥하동의 배휴가 황벽의 선리를 배우고, 정리하다.원문: 선
배휴는 회창 2년(842년) 강서성(江西省) 종릉(鐘陵)의 관찰사로 재임할 때, 황벽의 명성을 듣고 황벽을 홍주(洪州·현 남창)의 수부(首府)로 모셔다가 용흥사에 머물게 하고, 조석으로 도를 물었다. 몇년 후, 배휴가 849년에 완릉(宛陵)의 관찰사로 전임이 되자, 예를 갖추어 황벽을 다시 개원사로 모셨다. 여기서도 선사에게 아침저녁으로 도를 묻고 가르침을 받았다.배휴가 묻고 황벽이 대답선사상 이해 긴요한 어록천재일우 만남 결과물이지금도 선의 길잡이 역할 이때 황벽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필록(筆錄)해 두었다가 황벽이 입적한 뒤에 황벽
황벽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어록은 ‘전심법요’와 ‘완릉록’이다. 이 어록을 편찬한 사람이 배휴(裵休, 797~870)이다. 배휴는 하남성 맹주 제원 출신으로 당나라 때 유명한 정치가이다. 목종 때, 진사시험을 거쳐 정치인이 되었고, 852년 중서문하평장사와 중서시랑을 역임했다. 문장에 능했고, 글씨도 잘 썼으며, 교양이 깊고 성품이 온화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배휴는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선사 세분을 스승으로 섬겼다. 처음에는 규봉 종밀(圭峯宗密, 780~841)을 섬겼으며, 다음 위산 영우(山靈祐, 771~853)와 황벽 희운
‘전심법요’의 저자 황벽 희운(黃檗希運, ?~856)이 활동하던 시대는 당나라 말기에 해당한다. 황벽이 활동하던 때는 조사선이 싹터 한창 발전하던 시대이다. 황벽이 활동하던 전후 사회적인 배경 및 불교적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당대(唐代) 교학불교의 여러 종파가 형성되어 최대의 전성기를 누릴 무렵, 사회적으로 두 개의 큰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는 당 무종 때 회창파불(845~847)이고, 또 하나는 회창파불보다 80여년 앞서 일어난 안사의 난(755~763)이다. 회창파불, 역대 가장 큰 법난경전 중심 교종 치명적 피해실천 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