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 스님은 지엄 스님 문하에서 ‘화엄경’을 중심으로 7년간 연학하고 44세 되던 해인 668년에 ‘화엄경’과 ‘십지론’에 의거하여 ‘반시’(‘일승법계도합시일인’)를 지었다. ‘반시’는 이에 대해 의상 스님 스스로 주석한 ‘법계도기’와 합하여 ‘(화엄) 일승법계도’로 유통되고 있다. ‘일승법계도’의 저술은 스승인 지엄 스님의 영향과 엄격한 지도아래 이루어졌다.지엄의 문하에서 7년 수학화엄과 십지론 의거해 저술지엄, 의상 스님에게 ‘의지’법장 스님에 ‘문지’ 호 내려법성게를 법계도인과 합해반시라는 그림으로 완성해법계도인 54각으로 구
의상 스님은 화엄성중의 옹호를 받은 화엄행자(華嚴行者)이다. 화엄성중은 ‘화엄경’에 출현하는 신중(神衆)이다. 신중은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옹호하는 호법신인데, 성스러운 무리라고 하여 성중(聖衆)이라고 부르며 신 가운데 장군이라 하여 신장(神將)이라고도 한다.화엄성중을 통칭해서 신중신중들이 의상 스님을 외호신중의 범위에 화엄성중 외무속의 신까지 전부 습합돼신중들을 모신 단이 신중단상중하단 중 중단에 모셔져‘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 조의상 스님과 신중 관련 설화신중 부리는 의상 스님 법력사리 봉안에 도선율사 조력불자라면 화엄성중이 옹
의상 스님은 험난한 해로로 입당해(661년) 이듬해 장안 종남산 지상사에 당도하였다. 원효 스님과 헤어진 후 지상사에 이르는 도중에 의상 스님의 심경에도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원효 스님과 함께 현장 스님을 찾아가려던 발걸음을 지엄(600~668) 스님에게로 돌렸기 때문이다.원효와 의상 스님 유학 시도현장 스님의 명성에 큰 영향원효 스님과 도중 헤어진 뒤의상 스님 심경 크게 변한 듯입당 후 지엄 스님 명성 듣고종남산 지상사서 문하에 입실중국, 각종 학파와 종파 형성화엄종 등 13개 종파가 확립수나라 때 창건
의상 스님은 원효 스님과 함께 650년(진덕여왕 4년)에 육로로 입당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런데 요동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려던 차에 국경을 순시하며 지키던 고구려 병사에게 첩자라고 오인되어 붙잡혀서 수십일 동안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났다. 그래서 1차 입당 시도는 실패하고 신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첩자 몰려 입당유학 실패귀국길 평양 지나던 길에연복사에서 보덕화상 친견첫 번째 입당 시도 11년 뒤백제 멸망으로 해로 열리자육로 아닌 해로로 입당 시도원효·의상 스님 입당 도중에해골과 밤새 잠 잔 원효 스님깨달음 얻고 입당구법 포기원효
법성게 내용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먼저 법성게를 짓게 된 인연과 유통을 포함하여 의상 스님의 행장에 대하여 짚어보기로 한다.‘삼국유사’와 ‘송고승전’ 등의상 관련 17여종 자료 전해15세 전후 추정되는 나이에낭산 북쪽의 황복사로 출가출가 10여년 뒤인 26세 때에원효와 함께 당에 유학 시도두 스님의 입당 시도 전후로고승 출현·중국 구법승 왕래신라에 ‘화엄경’ 전래된 시기늦어도 자장율사 때는 확실화엄과 깊은 인연 자장 율사신라화엄 초조 인정 못 받아 의상 스님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전기 자료로서는 가장 오래된 ‘부석본비’의
‘법성게(法性偈)’는 신라 의상(義湘, 625~702) 스님이 ‘화엄경’의 핵심교의를 담아 668년에 지은 게송으로서, 저술된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1350년간 지속적으로 널리 수지 독송되면서 전승되어 왔다.‘해동화엄 초조’ 의상 저술‘법’ 시작해 ‘불’로 마무리1350년간 지속적으로 독송문자·모습 등에 매이지 말고지금 부처로 살라는 가르침조선시대에도 주석서 편찬마지막까지 듣는 천도법문전체 내용이 ‘법성’ 노래해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예불과 기도를 포함한 의례의식에서 자주 예송되는 의식문 가운데 경전의 핵심내용을 담은 것으로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