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7월25일 해인사에서 열린 16회 임시중앙종회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종단 부채의 책임을 물어 경산 총무원장의 경질을 요구했던 종정 청담 스님이 자신의 뜻이 반영되지 않자 “종정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이날 중앙종회에서는 종정스님의 사직문제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일부에서는 종정스님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사직원을 보류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다른 측에서는 종정스님과 함께 총무원장의 사표도 받아 함께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결국 중앙종회는 이틀에 걸친 논란 끝에 종정과 총무원장의 동
경산 스님은 1967년 조계종 종정 청담 스님과의 갈등으로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 모든 소임을 내려놓고 그길로 서울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 들어가 6년여간 두문불출했다. 당시 천축사 무문관은 수좌스님들이 사활을 걸고 용맹정진하던 수행처였다. 천축사는 1965년 12월 관응·정영·현구·석영(제선) 스님 등이 ‘6년 결사’를 시작하면서 무문관을 열었다. 서옹 스님이 초대 조실을 맡아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무문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많은 스님들이 세속과 절연한 채 오로지 화두 하나에 매달렸다. 1967년 총무원장 물러난 뒤천축사 무문
1979년 12월25일 조계종에 비보가 날아들었다. 당시 조계사·개운사 총무원으로 나뉜 조계종에서 조계사측 총무원장을 맡았던 경산 스님이 이날 새벽 서울 돈암동 적조암에서 돌연 입적했다. 스님은 한 달 전 총무원장에 선출돼 “2개월 내에 종단을 수습하겠다”며 종단분규 해결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지만, 갑작스런 뇌출혈로 뜻을 접어야 했다.청담스님 등과 불교정화 앞장통합종단조계종 출범의 산파비구측 첫 총무원장으로 ‘실세’비구·대처 갈등해결 나섰지만‘화동 협정’ 결렬로 끝내 무산종정 청담 스님과의 갈등 빌미1967년 청담 종정과 동반퇴진‘
1962년 8월20일 서울 문교부회의실에서 열린 불교재건비상종회(비상종회)는 불교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날 통합종단조계종 출범의 산파 역할을 했던 비상종회가 초대 중앙종회의원으로 50명을 선출했기 때문이다. 앞서 법륜사(대처)측은 통합종단 출범 정신에 따라 양측 25명씩 동수로 선출할 것을 요구했지만, 조계사(비구)측과 정부측이 추천한 사회인사들은 무기명비밀투표로 선출하기로 의견을 모으면서 갈등을 빚었다. 결국 이날 비상종회는 법륜사측이 불참한 가운데 무기명비밀투표방식으로 조계사측에서 32명, 법륜사측에서 18명을 선출했다.
12세 나이에 송광사로 출가동국대 전신 중앙학림 졸업3·1운동 참여로 일경에 감시송광사로 돌아와 강사로 활동‘송광사사고’ ‘금강경역해’ 등전문 학자도 힘든 저술 남겨총본산 태고사·종단 건설 앞장총무원장·동국대 이사장 등한국불교 근대사 큰 족적 남겨“스님은 송광사를 중흥했고, 중앙의 단일종단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정광고등학교 교장, 동국대 이사장으로 계시면서 종립학원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처럼 힘겹고 바쁜 일을 하면서도 스님은 전문학자로도 하기 힘든 연구와 저술에 또한 몰두했다.” (김영태 동국대 명예교수)“화상께서는 불교를 다
한국 현대사는 파란의 역사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냉전과 이념의 희생양이 되어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다.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군부세력의 등장, 독재와 인권유린의 긴 세월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민주화를 맞이할 수 있었다.통합종단 첫 총무원장 취임대처측 추천으로 선출됐지만취임식서 ‘정화’의지 드러내‘배제식’ 정화에는 반대입장통합종단, 군사정권 의지반영비구·대처 어색한 동거일 뿐초대 종회의원 선출 갈등으로통합종단 5개월 만에 ‘파국’한국불교계도 격동의 세월이었다.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탄압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